최근, 짧은 글 하나를 보았다. 나와 학번이 같은, 그러니까 비슷한 시대를 통과해 온 사람의 글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대학교 2, 3학년 때는 취준생에게 공기업 인기가 가장 많았다. 당시 삼전, 하닉 vs 한전 고르면 한전들을 선택했음. 2026년 지금은? 반도체가 호황이면서 삼전, 하닉이 떡상했지. [...] 2020년쯤 코로나 시기에는 개발자 붐으로 컴퓨터공학과가 떡상했었다. 2026년 지금은? AI시대를 맞이해서 기업에서 신규 개발자 채용을 안 해버림."
불과 몇 년 사이에 정답지가 세 번이나 바뀌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험이 끝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여전히 믿고 있다.
우리가 받은 교육들은 시험이 끝난 곳에 정답이 있다고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수능이 끝나면. 취업이 되면. 공기업에 가면. 공무원이 되면. 개발자가 되면. 결혼하면. 집을 사면. 승진하면. 아이를 낳으면. 그리고 우리는 늘 어떤 정답에 도달하면 삶이 정리될 거라고 믿으며 살았다. 정답에 나를 끼워 맞추면 불안함이 사라지고, 내 삶의 방향이 선명해지고, 비로소 삶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우리는 죽을힘을 다해 정답을 향해 달린다. 그리고 정답에 도달한다. 그런데 정답에 도달한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밤, 기대했던 안도감이나 충만함 대신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낯선 공허함이다. "이게 다야…?"라는 질문이 남는다. 그리고 그 질문이 선명해지기도 전에 세상은 우리에게 다음 정답을 찾으러 떠나라고 말한다. 대학에 갔다면, 이제 취업이라는 다음 정답을 향해. 취업이라는 정답을 이루었다면, 승진이라는 다음 정답을 향해. 우리는 그렇게 정답이라는 쳇바퀴를 무한히 타며 인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곳이 쳇바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게 찾아오는 묘한 허무함. 당신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정답이 끝인 것처럼 평생을 교육받았지만, 정답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정답이 약속했던 것들. 우리가 안정, 확신, 방향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정답 안에 들어있지 않다.
학교는 정답을 맞히는 법을 가르쳤다. 사회는 정답에 도달하는 법을 보상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우리에게 정답 이후를 사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우리가 추구하던 정답이 한순간에 오답이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배운 적이 없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난 사람의 이야기를. 정답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길에 도달한 사람의 이야기를.
April 18, 2026
운명의 멱살을 움켜쥐며
당신이 죽을힘을 다해 도달한 정답이 어느 날 오답이 된다면, 무엇으로 그 이후의 삶을 다시 해석할 것인가?
01
당신이 죽을힘을 다해 도달한 정답이, 어느 날 오답이 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최근, 짧은 글 하나를 보았다. 나와 학번이 같은, 그러니까 비슷한 시대를 통과해 온 사람의 글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대학교 2, 3학년 때는 취준생에게 공기업 인기가 가장 많았다. 당시 삼전, 하닉 vs 한전 고르면 한전들을 선택했음. 2026년 지금은? 반도체가 호황이면서 삼전, 하닉이 떡상했지. [...] 2020년쯤 코로나 시기에는 개발자 붐으로 컴퓨터공학과가 떡상했었다. 2026년 지금은? AI시대를 맞이해서 기업에서 신규 개발자 채용을 안 해버림."
불과 몇 년 사이에 정답지가 세 번이나 바뀌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험이 끝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여전히 믿고 있다.
우리가 받은 교육들은 시험이 끝난 곳에 정답이 있다고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수능이 끝나면. 취업이 되면. 공기업에 가면. 공무원이 되면. 개발자가 되면. 결혼하면. 집을 사면. 승진하면. 아이를 낳으면. 그리고 우리는 늘 어떤 정답에 도달하면 삶이 정리될 거라고 믿으며 살았다. 정답에 나를 끼워 맞추면 불안함이 사라지고, 내 삶의 방향이 선명해지고, 비로소 삶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우리는 죽을힘을 다해 정답을 향해 달린다. 그리고 정답에 도달한다. 그런데 정답에 도달한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밤, 기대했던 안도감이나 충만함 대신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낯선 공허함이다. "이게 다야…?"라는 질문이 남는다. 그리고 그 질문이 선명해지기도 전에 세상은 우리에게 다음 정답을 찾으러 떠나라고 말한다. 대학에 갔다면, 이제 취업이라는 다음 정답을 향해. 취업이라는 정답을 이루었다면, 승진이라는 다음 정답을 향해. 우리는 그렇게 정답이라는 쳇바퀴를 무한히 타며 인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곳이 쳇바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게 찾아오는 묘한 허무함. 당신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정답이 끝인 것처럼 평생을 교육받았지만, 정답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정답이 약속했던 것들. 우리가 안정, 확신, 방향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정답 안에 들어있지 않다.
학교는 정답을 맞히는 법을 가르쳤다. 사회는 정답에 도달하는 법을 보상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우리에게 정답 이후를 사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우리가 추구하던 정답이 한순간에 오답이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배운 적이 없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난 사람의 이야기를. 정답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길에 도달한 사람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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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18, 2026
운명의 멱살을 움켜쥐며
당신이 죽을힘을 다해 도달한 정답이 어느 날 오답이 된다면, 무엇으로 그 이후의 삶을 다시 해석할 것인가?
After Soyoon
당신이 죽을힘을 다해 도달한 정답이, 어느 날 오답이 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최근, 짧은 글 하나를 보았다. 나와 학번이 같은, 그러니까 비슷한 시대를 통과해 온 사람의 글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대학교 2, 3학년 때는 취준생에게 공기업 인기가 가장 많았다. 당시 삼전, 하닉 vs 한전 고르면 한전들을 선택했음. 2026년 지금은? 반도체가 호황이면서 삼전, 하닉이 떡상했지. [...] 2020년쯤 코로나 시기에는 개발자 붐으로 컴퓨터공학과가 떡상했었다. 2026년 지금은? AI시대를 맞이해서 기업에서 신규 개발자 채용을 안 해버림."
불과 몇 년 사이에 정답지가 세 번이나 바뀌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험이 끝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여전히 믿고 있다.
우리가 받은 교육들은 시험이 끝난 곳에 정답이 있다고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수능이 끝나면. 취업이 되면. 공기업에 가면. 공무원이 되면. 개발자가 되면. 결혼하면. 집을 사면. 승진하면. 아이를 낳으면. 그리고 우리는 늘 어떤 정답에 도달하면 삶이 정리될 거라고 믿으며 살았다. 정답에 나를 끼워 맞추면 불안함이 사라지고, 내 삶의 방향이 선명해지고, 비로소 삶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우리는 죽을힘을 다해 정답을 향해 달린다. 그리고 정답에 도달한다. 그런데 정답에 도달한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밤, 기대했던 안도감이나 충만함 대신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낯선 공허함이다. "이게 다야…?"라는 질문이 남는다. 그리고 그 질문이 선명해지기도 전에 세상은 우리에게 다음 정답을 찾으러 떠나라고 말한다. 대학에 갔다면, 이제 취업이라는 다음 정답을 향해. 취업이라는 정답을 이루었다면, 승진이라는 다음 정답을 향해. 우리는 그렇게 정답이라는 쳇바퀴를 무한히 타며 인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곳이 쳇바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게 찾아오는 묘한 허무함. 당신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정답이 끝인 것처럼 평생을 교육받았지만, 정답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정답이 약속했던 것들. 우리가 안정, 확신, 방향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정답 안에 들어있지 않다.
학교는 정답을 맞히는 법을 가르쳤다. 사회는 정답에 도달하는 법을 보상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우리에게 정답 이후를 사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우리가 추구하던 정답이 한순간에 오답이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배운 적이 없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난 사람의 이야기를. 정답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길에 도달한 사람의 이야기를.
1802년, 서른두 살의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썼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그는 음악가였다. 음악이 없다면 그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런 사람의 귀가 닫히고 있었다. 20대 후반부터 서서히 그가 사랑하던 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음악가에게 소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화가에게 시력이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 40대가 되자 귀는 거의 완전히 침묵해 버렸다.
동생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쓸 만큼, 베토벤은 끝에 서 있었다. 음악가가 들을 수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음악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렇게 정답의 끝에 섰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답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지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전부를 잃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정답이 무너질 때, 사람은 끝에 선다. 그 끝은 바닥이라고 느끼는 자리.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고 느끼는 자리다. 그래서 아무도 끝에 서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끝에 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커트 보니것은 말했다. "나는 절벽 가장자리에 최대한 가까이 서고 싶다. 넘어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가까이. 왜냐하면 끝에 서면 중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온갖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의 말은 옳다. 끝에서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중심에서도 보였겠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 인생의 공평함처럼 느껴질 만큼. 끝에서야만 보이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끝은 어두운 동시에 가장 투명한 자리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자리.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자리. 그 끝에 서면, 그때까지 자신이 믿어왔던 것들에 균열이 생긴다. 소위 정답이라고 부르던 것들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베토벤에게 음악은 '듣는 것'이었다. 소리를 듣고, 소리를 조합하고, 소리를 확인하는 것. 이것이 음악가라는 정체성의 토대였다. 청력을 잃는다는 것은 이 토대 자체가 깨지는 일이었다. 귀로 듣는 음악가. 그 정의가 무너졌다. 그의 정답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이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상상해 보라. "이렇게 하면 될 거야"라는 믿음이 사라지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정체성이 깨어지는 순간을. 정답이 무너지는 자리는, 자기 자신 쌓아 올린 모든 탑이 무너지는 자리와 같다. 그러므로 이 순간이 가장 고통스럽다.
베토벤이 유서를 쓰기 시작한 순간도 바로 이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대신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운명이 나를 완전히 짓밟을 수 없도록, 나는 운명의 멱살이라도 움켜쥐겠어."
나는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한참을 멈춰 있었다. 왜 그랬을까. 베토벤은 이미, 자신과 운명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자신과 운명의 힘 차이가 편파적이라는 것을. 거대한 운명의 무게에 비하면 자신의 무게는 너무나도 빈약하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히 짓밟히지는 않겠다고 선언했다. 운명의 멱살이라도 움켜쥐며 버텨보겠노라 다짐했다.
나는 베토벤의 이 다짐이 희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다짐은 오히려 균열에 가깝다. 그는 '듣는 음악가'라는 정의가 깨진 자리에서, 운명의 멱살을 움켜잡음과 동시에 "듣지 않고도 음악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그가 마주한 균열은 파괴가 아니다. 빛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이다. 듣지 않는 음악가의 탄생. 그 빛의 태동이다.
베토벤은 균열이 생긴 그 자리에서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읽고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읽기'는 특별했다. 들을 수 없게 된 후, 그는 대화를 위한 필담장을 사용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소리가 아닌, 글로 말을 걸었다. 베토벤은 그것을 귀가 아닌, 눈으로 읽었다. 그의 세상의 소리는 이제 전부 문자로 바뀌었다.
그의 '쓰기'는 악보였다. 들리지 않는 귀로, 내면에 울리는 소리를 악보에 옮겼다. 이제 그의 귀는 바깥을 향하지 않았다. 안을 향했다. 바깥에서 사라진 소리가, 안에서 더 또렷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베토벤은 들을 수 없게 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평생 무엇에 귀 기울여야 했는지를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읽는다는 것은, 이름 없이 떠돌던 감각에 언어가 붙는 일이다. 내 안에서 모양을 갖추지 못한 채 흐물거리던 것이, 타인의 문장에 붙잡혀 비로소 형태를 얻게 되는 일. 쓴다는 것은, 사라지고 말 어둠을 영원한 빛으로 치환하는 일이다. 쓰지 않아도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어둠은 사라지고 지나가겠지만, 그것을 쓰게 된다면. 그때부터 어둠과 고통은 영원히 그곳에 남아 있는 빛이 된다.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선물과 같은 것. 혹은 현재의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이를 위해 내가 세워둔 등대와 같은 것. 읽기와 쓰기. 이 두 가지가 만났을 때, 깨진 자리에서 새로운 것이 자라기 시작한다.
나 역시 베토벤과 같이 균열이 생긴 그 자리에서 나의 길을 찾고자 읽고 쓰기 시작했다. 암 판정 후, 나는 책을 약처럼 챙겨 다녔다. 새벽 4시, 캄캄하게 불이 꺼진 병원 복도에서 속삭이듯 음성메모를 남겼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으로 간신히 기록된 딱 한 줄짜리의 음성메모. "빛의 고향은 어둠이구나." 성대가 건강하던 시절, 수천 명 앞에서 했던 유창한 말들보다 그 엉성한 한 줄이 더 깊었다. 유창한 말들은 모두 허공에 흩뿌려졌지만, 이 엉성한 한 줄의 메모는 영원히 내 삶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문장은 내가 어둠을 통과한 끝에서 기록된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 밤의 나는, 베토벤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 들을 수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자리에서, 바깥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오직 안을 향해서만 열려있는 자리. 그런 자리에서만 기록될 수 있는 문장이 반드시 있다. 당신에게도.
정답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왜 읽고 써야 하는가? 읽고 쓰는 과정을 지나면, 어느 순간 뒤집힌 풍경을 만나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바깥의 소리를 잃었지만, 안의 소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안의 소리는, 바깥의 소리에 의존하던 시절에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종류의 것이었다. 청력을 잃은 후의 베토벤은 이전보다 더 대담하고, 더 실험적이고, 더 깊은 음악을 썼다. 바깥의 소리에 맞춰 쓰던 시절에는 관습의 틀 안에 있었다. 그의 귀가 밖을 향하지 않고, 오로지 그의 내면만을 향하자, 그는 관습을 벗어난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잃음이 오히려 자유가 된 것이다.
베토벤이 귀가 먼 후에 쓴 후기 현악 사중주들은, 당대의 음악가들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기이하다고, 너무 실험적이라고, 심지어 '미친 사람의 음악'이라고 평가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음악은 베토벤 이전의 그 누구도 쓸 수 없었던 음악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안다. 그것이 인류가 도달한 가장 깊은 음악 중 하나였다는 것을.
바깥의 소리에 맞춰 쓰던 시절, 베토벤은 천재였다. 하지만 안의 소리만 남은 이후, 베토벤은 혁명가가 되었다. 그의 귀가 바깥이 아닌, 안을 향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불멸한 음악을 만드는 혁명의 작곡가가 되었다.
우리는 언제 자신의 삶에, 자신의 분야에 불멸한 무언가를 남기는 혁명가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발견은 누구도 나에게 가르쳐줄 수 없다. 내게 일어나는 재앙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라고 말해준다고 해서는 더더욱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긍정'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긍정'은 끝이라는 자리를 진정으로 통과해 본 적 없는 사람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끝에 서고, 균열을 겪고, 읽고 쓰는 과정을 몸으로 통과한 사람만이 스스로 발견하는 자신만의 언어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 그것은 부정적인 사고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생각의 전환이 아니다. 자신의 세계가 뒤집히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뒤집힌 풍경을 마주한 사람은 그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만든다.
1824년, 베토벤은 교향곡 9번 '합창'을 완성했다.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는 노래를. 소리를 잃은 사람이, 인류에게 가장 위대한 소리를 선물한 것이다.
Ludwig van Beethoven, Symphony No. 9 in D Minor, Op. 125, Molto vivace (Second Movement). The Juilliard Manuscript Collection.
초연 날, 베토벤은 지휘자 옆에 서서 악보를 넘겼다. 자신이 직접 지휘할 수 없었으므로. 연주가 끝났고, 청중은 환호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알아채지 못했다. 들리지 않았으므로. 옆에 있던 솔리스트가 그의 소매를 잡아 청중석 쪽으로 그의 몸을 돌려주었다. 그제야 베토벤은 보았다. 사람들이 일어서서 손뼉을 치고 손수건을 흔들고 있는 것을. 자신이 듣지 못한 채로 만들어 낸 소리가 빚어낸 풍경을. 그는 똑똑히 보았다.
"운명의 멱살을 움켜쥐겠다." 그는 정말로 운명의 멱살을 잡았다. 들리지 않는 귀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을 썼다. 지금 귀가 들리는 그 누구도, 베토벤만큼 위대한 교향곡을 쓰지 못한다. 운명의 멱살을 움켜쥔 끝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을 작곡한 베토벤의 이야기는 단순히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이야기는 하나의 증거다. 심연의 바닥에서 운명의 멱살을 움켜쥐면, 정답 그 이상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증거.
나에게도 그런 문장이 있다. 수술 후, 죽음을 가까이한 병실에서 내게 찾아온 문장이. "삶은 죽음이 초대한 파티다. 파티의 룰은 단 하나, 이 파티를 만끽하는 것." 나는 암 환자들의 신음으로 가득한 병동에서 이 문장을 온몸으로 느꼈다. 삶은 하나의 파티에 불과하며, 파티는 내가 연 것이 아니라 죽음이 연 것이라는 사실. 그러므로 파티는 언제든 호스트의 마음대로 끝이 날 수 있다는 사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이 순간을 만끽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은 내가 죽음과 동석한 끝에 기록된 문장이다. 누구에게 배운 것도, 어디서 읽은 것도 아닌. 내가 통과한 시간이 빚어낸 나의 문장.
당신에게도 그런 문장이 있을 것이다.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했을 뿐. 나는 당신이 통과한 시간 안에 당신만을 위한 문장이, 이미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베토벤의 이야기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오래 곱씹었다. 역사 속의 인물들을 관찰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러자 하나의 패턴이 보였다. 정답이 사라진 자리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낸 사람들은, 서로 시대도 분야도 전부 달랐지만, 예외 없이 같은 과정을 통과하고 있었다.
나는 이 과정에 이름을 붙였다.
끝에 서는 것. Abyss. 기존의 해석이 깨지는 것. Fracture. 읽고 쓰는 것. Text. 반대편을 발견하는 것. Encounter. 자기 언어로 다시 쓰는 것. Rewrite.
A.F.T.E.R.
After the answer. 정답이 사라진 지점이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걸어가는 과정에는 A.F.T.E.R이 있다. 내가 만난 사람들. 내가 읽은 책 속의 인물들. 위대한 역사 속의 인물들. 정답 이후에 자신만의 길을 찾아낸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 과정을 밟고 있었다. 베토벤이 그랬다. 나도 그랬다.
A.F.T.E.R는 지도가 아니다. 순서대로 밟아야 하는 단계도 아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끝에 섰을 때 그 자리에서 일어난 일을, 통과한 후에 돌아보며 붙인 프레임일 뿐이다. 삶을 해석하는 도구로서 내 삶에, 이 글을 읽는 타인의 삶에 좋은 도구로 쓰이기를 원하며 정돈해 둔 것일 뿐이다. 우리는 평생 크고 작은 심연을 마주하며 이 프레임을 반드시 지나치지만, 살아내는 동안에는 자신이 이 과정 안에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 어쩌면 평생을 모르고 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쓴다. 지금 자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 모르는 채로 그 자리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리의 이름이라도 건네주기 위해. 만약 내가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 모를 만큼 커다란 운명이 나를 덮쳐온다면, 그 때 내가 운명의 멱살을 또 한 번 움켜쥐기를 바라면서.
나는 그 언젠가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의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정답을 맞혔던 순간은 언제인가. 그리고 그 정답은, 당신이 기대했던 것을 주었는가.
만약 정답이 당신에게 약속한 것을 주지 못했다면, 당신은 지금 A.F.T.E.R 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베토벤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쓰던 그 순간에는, 자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그 자리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교향곡 9번을 완성한 후였다.
이 글의 끝을 당신에게 물었던 첫 질문으로 매듭지으려 한다. 글을 시작하며 나는 당신에게 물었다. 당신이 죽을힘을 다해 도달한 정답이 어느 날 오답이 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만약 당신이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이제 답할 수 있다. 운명의 멱살을 움켜쥐며, A.F.T.E.R로 해석할 것. 그것이 내가 베토벤에게서 배운 답이고, 암이라는 심연을 통과하며 내 몸으로 증명한 답이다.
이제 당신의 답을 찾을 차례다.
1802년, 서른두 살의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썼다.
1802년, 서른두 살의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썼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그는 음악가였다. 음악이 없다면 그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런 사람의 귀가 닫히고 있었다. 20대 후반부터 서서히 그가 사랑하던 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음악가에게 소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화가에게 시력이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 40대가 되자 귀는 거의 완전히 침묵해 버렸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그는 음악가였다. 음악이 없다면 그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런 사람의 귀가 닫히고 있었다. 20대 후반부터 서서히 그가 사랑하던 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음악가에게 소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화가에게 시력이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 40대가 되자 귀는 거의 완전히 침묵해 버렸다.
동생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쓸 만큼, 베토벤은 끝에 서 있었다. 음악가가 들을 수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음악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렇게 정답의 끝에 섰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답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지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전부를 잃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정답이 무너질 때, 사람은 끝에 선다. 그 끝은 바닥이라고 느끼는 자리.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고 느끼는 자리다. 그래서 아무도 끝에 서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끝에 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동생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쓸 만큼, 베토벤은 끝에 서 있었다. 음악가가 들을 수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음악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렇게 정답의 끝에 섰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답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지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전부를 잃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정답이 무너질 때, 사람은 끝에 선다. 그 끝은 바닥이라고 느끼는 자리.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고 느끼는 자리다. 그래서 아무도 끝에 서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끝에 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커트 보니것은 말했다. "나는 절벽 가장자리에 최대한 가까이 서고 싶다. 넘어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가까이. 왜냐하면 끝에 서면 중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온갖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의 말은 옳다. 끝에서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중심에서도 보였겠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 인생의 공평함처럼 느껴질 만큼. 끝에서야만 보이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끝은 어두운 동시에 가장 투명한 자리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자리.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자리. 그 끝에 서면, 그때까지 자신이 믿어왔던 것들에 균열이 생긴다. 소위 정답이라고 부르던 것들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베토벤에게 음악은 '듣는 것'이었다. 소리를 듣고, 소리를 조합하고, 소리를 확인하는 것. 이것이 음악가라는 정체성의 토대였다. 청력을 잃는다는 것은 이 토대 자체가 깨지는 일이었다. 귀로 듣는 음악가. 그 정의가 무너졌다. 그의 정답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커트 보니것은 말했다. "나는 절벽 가장자리에 최대한 가까이 서고 싶다. 넘어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가까이. 왜냐하면 끝에 서면 중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온갖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의 말은 옳다. 끝에서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중심에서도 보였겠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 인생의 공평함처럼 느껴질 만큼. 끝에서야만 보이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끝은 어두운 동시에 가장 투명한 자리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자리.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자리. 그 끝에 서면, 그때까지 자신이 믿어왔던 것들에 균열이 생긴다. 소위 정답이라고 부르던 것들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베토벤에게 음악은 '듣는 것'이었다. 소리를 듣고, 소리를 조합하고, 소리를 확인하는 것. 이것이 음악가라는 정체성의 토대였다. 청력을 잃는다는 것은 이 토대 자체가 깨지는 일이었다. 귀로 듣는 음악가. 그 정의가 무너졌다. 그의 정답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이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상상해 보라. "이렇게 하면 될 거야"라는 믿음이 사라지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정체성이 깨어지는 순간을. 정답이 무너지는 자리는, 자기 자신 쌓아 올린 모든 탑이 무너지는 자리와 같다. 그러므로 이 순간이 가장 고통스럽다.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이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상상해 보라. "이렇게 하면 될 거야"라는 믿음이 사라지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정체성이 깨어지는 순간을. 정답이 무너지는 자리는, 자기 자신 쌓아 올린 모든 탑이 무너지는 자리와 같다. 그러므로 이 순간이 가장 고통스럽다.
베토벤이 유서를 쓰기 시작한 순간도 바로 이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대신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운명이 나를 완전히 짓밟을 수 없도록, 나는 운명의 멱살이라도 움켜쥐겠어."
베토벤이 유서를 쓰기 시작한 순간도 바로 이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대신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운명이 나를 완전히 짓밟을 수 없도록, 나는 운명의 멱살이라도 움켜쥐겠어."
나는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한참을 멈춰 있었다. 왜 그랬을까. 베토벤은 이미, 자신과 운명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자신과 운명의 힘 차이가 편파적이라는 것을. 거대한 운명의 무게에 비하면 자신의 무게는 너무나도 빈약하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히 짓밟히지는 않겠다고 선언했다. 운명의 멱살이라도 움켜쥐며 버텨보겠노라 다짐했다.
나는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한참을 멈춰 있었다. 왜 그랬을까. 베토벤은 이미, 자신과 운명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자신과 운명의 힘 차이가 편파적이라는 것을. 거대한 운명의 무게에 비하면 자신의 무게는 너무나도 빈약하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히 짓밟히지는 않겠다고 선언했다. 운명의 멱살이라도 움켜쥐며 버텨보겠노라 다짐했다.
나는 베토벤의 이 다짐이 희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다짐은 오히려 균열에 가깝다. 그는 '듣는 음악가'라는 정의가 깨진 자리에서, 운명의 멱살을 움켜잡음과 동시에 "듣지 않고도 음악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탄생시켰다.
나는 베토벤의 이 다짐이 희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다짐은 오히려 균열에 가깝다. 그는 '듣는 음악가'라는 정의가 깨진 자리에서, 운명의 멱살을 움켜잡음과 동시에 "듣지 않고도 음악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그가 마주한 균열은 파괴가 아니다. 빛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이다. 듣지 않는 음악가의 탄생. 그 빛의 태동이다.
그렇다면 그가 마주한 균열은 파괴가 아니다. 빛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이다. 듣지 않는 음악가의 탄생. 그 빛의 태동이다.
베토벤은 균열이 생긴 그 자리에서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읽고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읽기'는 특별했다. 들을 수 없게 된 후, 그는 대화를 위한 필담장을 사용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소리가 아닌, 글로 말을 걸었다. 베토벤은 그것을 귀가 아닌, 눈으로 읽었다. 그의 세상의 소리는 이제 전부 문자로 바뀌었다.
베토벤은 균열이 생긴 그 자리에서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읽고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읽기'는 특별했다. 들을 수 없게 된 후, 그는 대화를 위한 필담장을 사용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소리가 아닌, 글로 말을 걸었다. 베토벤은 그것을 귀가 아닌, 눈으로 읽었다. 그의 세상의 소리는 이제 전부 문자로 바뀌었다.
그의 '쓰기'는 악보였다. 들리지 않는 귀로, 내면에 울리는 소리를 악보에 옮겼다. 이제 그의 귀는 바깥을 향하지 않았다. 안을 향했다. 바깥에서 사라진 소리가, 안에서 더 또렷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베토벤은 들을 수 없게 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평생 무엇에 귀 기울여야 했는지를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쓰기'는 악보였다. 들리지 않는 귀로, 내면에 울리는 소리를 악보에 옮겼다. 이제 그의 귀는 바깥을 향하지 않았다. 안을 향했다. 바깥에서 사라진 소리가, 안에서 더 또렷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베토벤은 들을 수 없게 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평생 무엇에 귀 기울여야 했는지를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읽는다는 것은, 이름 없이 떠돌던 감각에 언어가 붙는 일이다. 내 안에서 모양을 갖추지 못한 채 흐물거리던 것이, 타인의 문장에 붙잡혀 비로소 형태를 얻게 되는 일. 쓴다는 것은, 사라지고 말 어둠을 영원한 빛으로 치환하는 일이다. 쓰지 않아도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어둠은 사라지고 지나가겠지만, 그것을 쓰게 된다면. 그때부터 어둠과 고통은 영원히 그곳에 남아 있는 빛이 된다.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선물과 같은 것. 혹은 현재의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이를 위해 내가 세워둔 등대와 같은 것. 읽기와 쓰기. 이 두 가지가 만났을 때, 깨진 자리에서 새로운 것이 자라기 시작한다.
읽는다는 것은, 이름 없이 떠돌던 감각에 언어가 붙는 일이다. 내 안에서 모양을 갖추지 못한 채 흐물거리던 것이, 타인의 문장에 붙잡혀 비로소 형태를 얻게 되는 일. 쓴다는 것은, 사라지고 말 어둠을 영원한 빛으로 치환하는 일이다. 쓰지 않아도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어둠은 사라지고 지나가겠지만, 그것을 쓰게 된다면. 그때부터 어둠과 고통은 영원히 그곳에 남아 있는 빛이 된다.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선물과 같은 것. 혹은 현재의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이를 위해 내가 세워둔 등대와 같은 것. 읽기와 쓰기. 이 두 가지가 만났을 때, 깨진 자리에서 새로운 것이 자라기 시작한다.
나 역시 베토벤과 같이 균열이 생긴 그 자리에서 나의 길을 찾고자 읽고 쓰기 시작했다. 암 판정 후, 나는 책을 약처럼 챙겨 다녔다. 새벽 4시, 캄캄하게 불이 꺼진 병원 복도에서 속삭이듯 음성메모를 남겼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으로 간신히 기록된 딱 한 줄짜리의 음성메모. "빛의 고향은 어둠이구나." 성대가 건강하던 시절, 수천 명 앞에서 했던 유창한 말들보다 그 엉성한 한 줄이 더 깊었다. 유창한 말들은 모두 허공에 흩뿌려졌지만, 이 엉성한 한 줄의 메모는 영원히 내 삶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문장은 내가 어둠을 통과한 끝에서 기록된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 밤의 나는, 베토벤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 들을 수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자리에서, 바깥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오직 안을 향해서만 열려있는 자리. 그런 자리에서만 기록될 수 있는 문장이 반드시 있다. 당신에게도.
나 역시 베토벤과 같이 균열이 생긴 그 자리에서 나의 길을 찾고자 읽고 쓰기 시작했다. 암 판정 후, 나는 책을 약처럼 챙겨 다녔다. 새벽 4시, 캄캄하게 불이 꺼진 병원 복도에서 속삭이듯 음성메모를 남겼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으로 간신히 기록된 딱 한 줄짜리의 음성메모. "빛의 고향은 어둠이구나." 성대가 건강하던 시절, 수천 명 앞에서 했던 유창한 말들보다 그 엉성한 한 줄이 더 깊었다. 유창한 말들은 모두 허공에 흩뿌려졌지만, 이 엉성한 한 줄의 메모는 영원히 내 삶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문장은 내가 어둠을 통과한 끝에서 기록된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 밤의 나는, 베토벤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 들을 수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자리에서, 바깥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오직 안을 향해서만 열려있는 자리. 그런 자리에서만 기록될 수 있는 문장이 반드시 있다. 당신에게도.
정답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왜 읽고 써야 하는가? 읽고 쓰는 과정을 지나면, 어느 순간 뒤집힌 풍경을 만나기 때문이다.
정답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왜 읽고 써야 하는가? 읽고 쓰는 과정을 지나면, 어느 순간 뒤집힌 풍경을 만나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바깥의 소리를 잃었지만, 안의 소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안의 소리는, 바깥의 소리에 의존하던 시절에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종류의 것이었다. 청력을 잃은 후의 베토벤은 이전보다 더 대담하고, 더 실험적이고, 더 깊은 음악을 썼다. 바깥의 소리에 맞춰 쓰던 시절에는 관습의 틀 안에 있었다. 그의 귀가 밖을 향하지 않고, 오로지 그의 내면만을 향하자, 그는 관습을 벗어난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잃음이 오히려 자유가 된 것이다.
베토벤은 바깥의 소리를 잃었지만, 안의 소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안의 소리는, 바깥의 소리에 의존하던 시절에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종류의 것이었다. 청력을 잃은 후의 베토벤은 이전보다 더 대담하고, 더 실험적이고, 더 깊은 음악을 썼다. 바깥의 소리에 맞춰 쓰던 시절에는 관습의 틀 안에 있었다. 그의 귀가 밖을 향하지 않고, 오로지 그의 내면만을 향하자, 그는 관습을 벗어난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잃음이 오히려 자유가 된 것이다.
베토벤이 귀가 먼 후에 쓴 후기 현악 사중주들은, 당대의 음악가들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기이하다고, 너무 실험적이라고, 심지어 '미친 사람의 음악'이라고 평가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음악은 베토벤 이전의 그 누구도 쓸 수 없었던 음악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안다. 그것이 인류가 도달한 가장 깊은 음악 중 하나였다는 것을.
베토벤이 귀가 먼 후에 쓴 후기 현악 사중주들은, 당대의 음악가들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기이하다고, 너무 실험적이라고, 심지어 '미친 사람의 음악'이라고 평가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음악은 베토벤 이전의 그 누구도 쓸 수 없었던 음악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안다. 그것이 인류가 도달한 가장 깊은 음악 중 하나였다는 것을.
바깥의 소리에 맞춰 쓰던 시절, 베토벤은 천재였다. 하지만 안의 소리만 남은 이후, 베토벤은 혁명가가 되었다. 그의 귀가 바깥이 아닌, 안을 향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불멸한 음악을 만드는 혁명의 작곡가가 되었다.
바깥의 소리에 맞춰 쓰던 시절, 베토벤은 천재였다. 하지만 안의 소리만 남은 이후, 베토벤은 혁명가가 되었다. 그의 귀가 바깥이 아닌, 안을 향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불멸한 음악을 만드는 혁명의 작곡가가 되었다.
우리는 언제 자신의 삶에, 자신의 분야에 불멸한 무언가를 남기는 혁명가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발견은 누구도 나에게 가르쳐줄 수 없다. 내게 일어나는 재앙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라고 말해준다고 해서는 더더욱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긍정'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긍정'은 끝이라는 자리를 진정으로 통과해 본 적 없는 사람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 자신의 삶에, 자신의 분야에 불멸한 무언가를 남기는 혁명가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발견은 누구도 나에게 가르쳐줄 수 없다. 내게 일어나는 재앙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라고 말해준다고 해서는 더더욱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긍정'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긍정'은 끝이라는 자리를 진정으로 통과해 본 적 없는 사람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끝에 서고, 균열을 겪고, 읽고 쓰는 과정을 몸으로 통과한 사람만이 스스로 발견하는 자신만의 언어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 그것은 부정적인 사고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생각의 전환이 아니다. 자신의 세계가 뒤집히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끝에 서고, 균열을 겪고, 읽고 쓰는 과정을 몸으로 통과한 사람만이 스스로 발견하는 자신만의 언어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 그것은 부정적인 사고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생각의 전환이 아니다. 자신의 세계가 뒤집히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뒤집힌 풍경을 마주한 사람은 그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만든다.
완전히 뒤집힌 풍경을 마주한 사람은 그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만든다.
1824년, 베토벤은 교향곡 9번 '합창'을 완성했다.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는 노래를. 소리를 잃은 사람이, 인류에게 가장 위대한 소리를 선물한 것이다.
1824년, 베토벤은 교향곡 9번 '합창'을 완성했다.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는 노래를. 소리를 잃은 사람이, 인류에게 가장 위대한 소리를 선물한 것이다.
Ludwig van Beethoven, Symphony No. 9 in D Minor, Op. 125, Molto vivace (Second Movement). The Juilliard Manuscript Collection.
Ludwig van Beethoven, Symphony No. 9 in D Minor, Op. 125, Molto vivace (Second Movement). The Juilliard Manuscript Collection.
초연 날, 베토벤은 지휘자 옆에 서서 악보를 넘겼다. 자신이 직접 지휘할 수 없었으므로. 연주가 끝났고, 청중은 환호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알아채지 못했다. 들리지 않았으므로. 옆에 있던 솔리스트가 그의 소매를 잡아 청중석 쪽으로 그의 몸을 돌려주었다. 그제야 베토벤은 보았다. 사람들이 일어서서 손뼉을 치고 손수건을 흔들고 있는 것을. 자신이 듣지 못한 채로 만들어 낸 소리가 빚어낸 풍경을. 그는 똑똑히 보았다.
초연 날, 베토벤은 지휘자 옆에 서서 악보를 넘겼다. 자신이 직접 지휘할 수 없었으므로. 연주가 끝났고, 청중은 환호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알아채지 못했다. 들리지 않았으므로. 옆에 있던 솔리스트가 그의 소매를 잡아 청중석 쪽으로 그의 몸을 돌려주었다. 그제야 베토벤은 보았다. 사람들이 일어서서 손뼉을 치고 손수건을 흔들고 있는 것을. 자신이 듣지 못한 채로 만들어 낸 소리가 빚어낸 풍경을. 그는 똑똑히 보았다.
"운명의 멱살을 움켜쥐겠다." 그는 정말로 운명의 멱살을 잡았다. 들리지 않는 귀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을 썼다. 지금 귀가 들리는 그 누구도, 베토벤만큼 위대한 교향곡을 쓰지 못한다. 운명의 멱살을 움켜쥔 끝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을 작곡한 베토벤의 이야기는 단순히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이야기는 하나의 증거다. 심연의 바닥에서 운명의 멱살을 움켜쥐면, 정답 그 이상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증거.
"운명의 멱살을 움켜쥐겠다." 그는 정말로 운명의 멱살을 잡았다. 들리지 않는 귀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을 썼다. 지금 귀가 들리는 그 누구도, 베토벤만큼 위대한 교향곡을 쓰지 못한다. 운명의 멱살을 움켜쥔 끝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을 작곡한 베토벤의 이야기는 단순히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이야기는 하나의 증거다. 심연의 바닥에서 운명의 멱살을 움켜쥐면, 정답 그 이상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증거.
나에게도 그런 문장이 있다. 수술 후, 죽음을 가까이한 병실에서 내게 찾아온 문장이. "삶은 죽음이 초대한 파티다. 파티의 룰은 단 하나, 이 파티를 만끽하는 것." 나는 암 환자들의 신음으로 가득한 병동에서 이 문장을 온몸으로 느꼈다. 삶은 하나의 파티에 불과하며, 파티는 내가 연 것이 아니라 죽음이 연 것이라는 사실. 그러므로 파티는 언제든 호스트의 마음대로 끝이 날 수 있다는 사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이 순간을 만끽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은 내가 죽음과 동석한 끝에 기록된 문장이다. 누구에게 배운 것도, 어디서 읽은 것도 아닌. 내가 통과한 시간이 빚어낸 나의 문장.
나에게도 그런 문장이 있다. 수술 후, 죽음을 가까이한 병실에서 내게 찾아온 문장이. "삶은 죽음이 초대한 파티다. 파티의 룰은 단 하나, 이 파티를 만끽하는 것." 나는 암 환자들의 신음으로 가득한 병동에서 이 문장을 온몸으로 느꼈다. 삶은 하나의 파티에 불과하며, 파티는 내가 연 것이 아니라 죽음이 연 것이라는 사실. 그러므로 파티는 언제든 호스트의 마음대로 끝이 날 수 있다는 사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이 순간을 만끽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은 내가 죽음과 동석한 끝에 기록된 문장이다. 누구에게 배운 것도, 어디서 읽은 것도 아닌. 내가 통과한 시간이 빚어낸 나의 문장.
당신에게도 그런 문장이 있을 것이다.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했을 뿐. 나는 당신이 통과한 시간 안에 당신만을 위한 문장이, 이미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당신에게도 그런 문장이 있을 것이다.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했을 뿐. 나는 당신이 통과한 시간 안에 당신만을 위한 문장이, 이미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베토벤의 이야기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오래 곱씹었다. 역사 속의 인물들을 관찰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러자 하나의 패턴이 보였다. 정답이 사라진 자리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낸 사람들은, 서로 시대도 분야도 전부 달랐지만, 예외 없이 같은 과정을 통과하고 있었다.
나는 베토벤의 이야기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오래 곱씹었다. 역사 속의 인물들을 관찰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러자 하나의 패턴이 보였다. 정답이 사라진 자리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낸 사람들은, 서로 시대도 분야도 전부 달랐지만, 예외 없이 같은 과정을 통과하고 있었다.
나는 이 과정에 이름을 붙였다.
나는 이 과정에 이름을 붙였다.
끝에 서는 것. Abyss. 기존의 해석이 깨지는 것. Fracture. 읽고 쓰는 것. Text. 반대편을 발견하는 것. Encounter. 자기 언어로 다시 쓰는 것. Rewrite.
끝에 서는 것. Abyss. 기존의 해석이 깨지는 것. Fracture. 읽고 쓰는 것. Text. 반대편을 발견하는 것. Encounter. 자기 언어로 다시 쓰는 것. Rewrite.
A.F.T.E.R.
A.F.T.E.R.
After the answer. 정답이 사라진 지점이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걸어가는 과정에는 A.F.T.E.R이 있다. 내가 만난 사람들. 내가 읽은 책 속의 인물들. 위대한 역사 속의 인물들. 정답 이후에 자신만의 길을 찾아낸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 과정을 밟고 있었다. 베토벤이 그랬다. 나도 그랬다.
After the answer. 정답이 사라진 지점이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걸어가는 과정에는 A.F.T.E.R이 있다. 내가 만난 사람들. 내가 읽은 책 속의 인물들. 위대한 역사 속의 인물들. 정답 이후에 자신만의 길을 찾아낸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 과정을 밟고 있었다. 베토벤이 그랬다. 나도 그랬다.
A.F.T.E.R는 지도가 아니다. 순서대로 밟아야 하는 단계도 아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끝에 섰을 때 그 자리에서 일어난 일을, 통과한 후에 돌아보며 붙인 프레임일 뿐이다. 삶을 해석하는 도구로서 내 삶에, 이 글을 읽는 타인의 삶에 좋은 도구로 쓰이기를 원하며 정돈해 둔 것일 뿐이다. 우리는 평생 크고 작은 심연을 마주하며 이 프레임을 반드시 지나치지만, 살아내는 동안에는 자신이 이 과정 안에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 어쩌면 평생을 모르고 살 수도 있다.
A.F.T.E.R는 지도가 아니다. 순서대로 밟아야 하는 단계도 아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끝에 섰을 때 그 자리에서 일어난 일을, 통과한 후에 돌아보며 붙인 프레임일 뿐이다. 삶을 해석하는 도구로서 내 삶에, 이 글을 읽는 타인의 삶에 좋은 도구로 쓰이기를 원하며 정돈해 둔 것일 뿐이다. 우리는 평생 크고 작은 심연을 마주하며 이 프레임을 반드시 지나치지만, 살아내는 동안에는 자신이 이 과정 안에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 어쩌면 평생을 모르고 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쓴다. 지금 자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 모르는 채로 그 자리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리의 이름이라도 건네주기 위해. 만약 내가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 모를 만큼 커다란 운명이 나를 덮쳐온다면, 그 때 내가 운명의 멱살을 또 한 번 움켜쥐기를 바라면서.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쓴다. 지금 자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 모르는 채로 그 자리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리의 이름이라도 건네주기 위해. 만약 내가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 모를 만큼 커다란 운명이 나를 덮쳐온다면, 그 때 내가 운명의 멱살을 또 한 번 움켜쥐기를 바라면서.
나는 그 언젠가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의 당신에게 묻겠다.
나는 그 언젠가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의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정답을 맞혔던 순간은 언제인가. 그리고 그 정답은, 당신이 기대했던 것을 주었는가.
당신이 마지막으로 정답을 맞혔던 순간은 언제인가. 그리고 그 정답은, 당신이 기대했던 것을 주었는가.
만약 정답이 당신에게 약속한 것을 주지 못했다면, 당신은 지금 A.F.T.E.R 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베토벤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쓰던 그 순간에는, 자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그 자리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교향곡 9번을 완성한 후였다.
만약 정답이 당신에게 약속한 것을 주지 못했다면, 당신은 지금 A.F.T.E.R 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베토벤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쓰던 그 순간에는, 자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그 자리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교향곡 9번을 완성한 후였다.
이 글의 끝을 당신에게 물었던 첫 질문으로 매듭지으려 한다. 글을 시작하며 나는 당신에게 물었다. 당신이 죽을힘을 다해 도달한 정답이 어느 날 오답이 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만약 당신이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이제 답할 수 있다. 운명의 멱살을 움켜쥐며, A.F.T.E.R로 해석할 것. 그것이 내가 베토벤에게서 배운 답이고, 암이라는 심연을 통과하며 내 몸으로 증명한 답이다.
이 글의 끝을 당신에게 물었던 첫 질문으로 매듭지으려 한다. 글을 시작하며 나는 당신에게 물었다. 당신이 죽을힘을 다해 도달한 정답이 어느 날 오답이 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만약 당신이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이제 답할 수 있다. 운명의 멱살을 움켜쥐며, A.F.T.E.R로 해석할 것. 그것이 내가 베토벤에게서 배운 답이고, 암이라는 심연을 통과하며 내 몸으로 증명한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