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주름이 생기지 않는다. 체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앉고 일어설 때 몸이 삐그덕거리지 않는다. 노화로 인한 죽음과 멀어진다.
그래서 수많은 인간이 수천 년간 영원한 젊음을 꿈꾸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는 영원한 젊음을 실제로 선물 받은 여자가 있다. 부러운가? 당신도 그런 축복을 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내가 지금부터 그 선물이 그녀의 삶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나는 이 이야기가 끝날 무렵, 당신이 여전히 그녀를 부러워할지 궁금하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이오카스테.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아내가 된 여자의 이야기를.
이오카스테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녀의 목걸이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녀가 받은 선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목걸이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르모니아라는 여신이 있다. 하르모니아는 전쟁의 신 아레스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하르모니아는 테바이의 왕 카드모스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 결혼을 기념하며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선물을 만들었다. 황금 목걸이였다. 헤파이스토스는 하르모니아에게 이 목걸이를 선물하며 말했다.
"이 목걸이를 하고 있으면 영원한 아름다움과 영원한 젊음이 너에게 주어질 거란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며 이상한 점을 느꼈는가? 만약 당신이 그리스로마 신화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어린 시절 그리스로마 신화 만화책을 읽었다면 당신은 생각했을 것이다. '헤파이스토스가 하르모니아에게 왜 그런 좋은 선물을 주었을까.' 왜 그런가? 헤파이스토스가 아프로디테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정리해 보자면, 아내가 다른 남성과 바람을 피워 낳은 딸의 결혼식에 선물을 보낸 것이다. 그러니까 하르모니아에게 주어진 목걸이는 배신당한 남편이 만든 선물이다. 그러므로 축복의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저주가 심어져 있을 것이다. 이 목걸이를 가진 자에게는 불행이 따라다녔다. 영원한 젊음과 영원한 아름다움이라는 축복 뒤에는 늘 불행과 불운이 따랐다.
April 11, 2026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우리가 축복이라고 부르는 것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
01
영원히 늙지 않는다면, 영원히 아름다울 수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축복이라고 부를 것인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주름이 생기지 않는다. 체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앉고 일어설 때 몸이 삐그덕거리지 않는다. 노화로 인한 죽음과 멀어진다.
그래서 수많은 인간이 수천 년간 영원한 젊음을 꿈꾸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는 영원한 젊음을 실제로 선물 받은 여자가 있다. 부러운가? 당신도 그런 축복을 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내가 지금부터 그 선물이 그녀의 삶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나는 이 이야기가 끝날 무렵, 당신이 여전히 그녀를 부러워할지 궁금하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이오카스테.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아내가 된 여자의 이야기를.
이오카스테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녀의 목걸이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녀가 받은 선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목걸이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르모니아라는 여신이 있다. 하르모니아는 전쟁의 신 아레스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하르모니아는 테바이의 왕 카드모스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 결혼을 기념하며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선물을 만들었다. 황금 목걸이였다. 헤파이스토스는 하르모니아에게 이 목걸이를 선물하며 말했다.
"이 목걸이를 하고 있으면 영원한 아름다움과 영원한 젊음이 너에게 주어질 거란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며 이상한 점을 느꼈는가? 만약 당신이 그리스로마 신화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어린 시절 그리스로마 신화 만화책을 읽었다면 당신은 생각했을 것이다. '헤파이스토스가 하르모니아에게 왜 그런 좋은 선물을 주었을까.' 왜 그런가? 헤파이스토스가 아프로디테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정리해 보자면, 아내가 다른 남성과 바람을 피워 낳은 딸의 결혼식에 선물을 보낸 것이다. 그러니까 하르모니아에게 주어진 목걸이는 배신당한 남편이 만든 선물이다. 그러므로 축복의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저주가 심어져 있을 것이다. 이 목걸이를 가진 자에게는 불행이 따라다녔다. 영원한 젊음과 영원한 아름다움이라는 축복 뒤에는 늘 불행과 불운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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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11, 2026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우리가 축복이라고 부르는 것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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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늙지 않는다면, 영원히 아름다울 수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축복이라고 부를 것인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주름이 생기지 않는다. 체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앉고 일어설 때 몸이 삐그덕거리지 않는다. 노화로 인한 죽음과 멀어진다.
그래서 수많은 인간이 수천 년간 영원한 젊음을 꿈꾸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는 영원한 젊음을 실제로 선물 받은 여자가 있다. 부러운가? 당신도 그런 축복을 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내가 지금부터 그 선물이 그녀의 삶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나는 이 이야기가 끝날 무렵, 당신이 여전히 그녀를 부러워할지 궁금하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이오카스테.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아내가 된 여자의 이야기를.
이오카스테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녀의 목걸이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녀가 받은 선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목걸이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르모니아라는 여신이 있다. 하르모니아는 전쟁의 신 아레스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하르모니아는 테바이의 왕 카드모스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 결혼을 기념하며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선물을 만들었다. 황금 목걸이였다. 헤파이스토스는 하르모니아에게 이 목걸이를 선물하며 말했다.
"이 목걸이를 하고 있으면 영원한 아름다움과 영원한 젊음이 너에게 주어질 거란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며 이상한 점을 느꼈는가? 만약 당신이 그리스로마 신화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어린 시절 그리스로마 신화 만화책을 읽었다면 당신은 생각했을 것이다. '헤파이스토스가 하르모니아에게 왜 그런 좋은 선물을 주었을까.' 왜 그런가? 헤파이스토스가 아프로디테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정리해 보자면, 아내가 다른 남성과 바람을 피워 낳은 딸의 결혼식에 선물을 보낸 것이다. 그러니까 하르모니아에게 주어진 목걸이는 배신당한 남편이 만든 선물이다. 그러므로 축복의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저주가 심어져 있을 것이다. 이 목걸이를 가진 자에게는 불행이 따라다녔다. 영원한 젊음과 영원한 아름다움이라는 축복 뒤에는 늘 불행과 불운이 따랐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 대대로 테바이 왕가의 여인들에게 전해졌다. 대대손손. 그리고 마침내, 그 목걸이가 오늘의 주인공 이오카스테의 목에 걸렸다.
이오카스테는 테바이의 왕비였다. 그녀의 남편은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였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는 아들의 탄생을 기념하며 신탁을 받았다. 그런데 신탁의 내용이 몹시 흉흉했다. "이 아이가 자라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자를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라이오스는 아이의 발목을 꿰뚫어 묶은 채 산에 버렸다. 그리고 당연히 아이가 죽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마침, 그 산을 지나고 있던 코린토스의 왕이 발이 잔뜩 부은 채 버려져 있는 아이를 발견한다. 마침, 아이가 없어 고민하던 코린토스의 왕은 그 아이를 자신의 양아들 삼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아이를 빤히 쳐다보고는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부은 발을 가졌군, 그래 너의 이름은 오이디푸스다.'(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의 뜻이 '부은 발'이다)
그렇다. 이 아이가 바로,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다. 오이디푸스의 생애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이야기해 보자. 오이디푸스는 커서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다. 자신의 양부모님이 친부모님인 줄 알았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기 위해 왕국을 떠나는 과정에서 진짜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만나 죽인다. 그리고 테바이로 와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영웅이 되어,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했다.
여기까지가 대부분의 사람이 아는 이야기다. 오이디푸스의 비극. 운명을 피하려 할수록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비극. 하지만 나는 이 비극 속에서 다른 곳을 본다. 나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읽을 때 늘 궁금했다. '왜 오이디푸스는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어떻게 자신의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는가'. 당신이 나의 글을 집중해서 읽었다면, 이제 당신은 나의 질문에 답해줄 수 있다.
그렇다. 이오카스테의 목에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한 젊음을 주는 목걸이. 이오카스테는 이 목걸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히 늙지 않았다. 아들을 산에 버릴 때도, 아들을 산에 버린 지 수십 년이 흐른 뒤에도. 그래서 자기 아들이 어엿한 청년이 되고 영웅이 되어 자신 앞에 다시 섰을 때도. 이오카스테는 늘 젊었고, 늘 아름다웠다. 그렇게 이오카스테는 자기 아들인 오이디푸스와 결혼했다.
이오카스테는 거울을 봐도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에게 인생은 영원히 주어지는 것이었으며, 그녀에게 아름다움은 영원히 잃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늘 똑같이 아름다웠다. 그런 그녀에게는 아들을 버린 것이 어제 같았을 것이다. 산에 버린 아기가 자라 성인이 되어 돌아올 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오카스테의 몸에는 그 시간의 흔적이 없었다. 그러니 눈앞에 서 있는 이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 자기 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영원한 젊음이 그녀에게서 빼앗아 간 것은 주름이 아니었다. 시간의 감각이었다. 만약 그녀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늙었다면 그녀는 알아보았을 것이다. 과거의 자신만큼 아름다운 그 청년을. 자신의 몸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과 세월이 빚어낸 주름들이,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단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목걸이가 그 단서를 지웠다. 축복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 눈을 가리는 축복을 축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나의 질문이다.
물론, 영원한 젊음은 축복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바로 그 축복이, 아들과 결혼하는 비극을 만들었다. 늙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을 잃었다. 시간을 잃었기 때문에, 아들을 잃었다. 그녀가 차고 있었던 목걸이는 축복이 아니었다.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였을 뿐.
모두가 오이디푸스 비극에서 오이디푸스만을 바라볼 때, 나는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그의 어머니이자 그의 아내 이오카스테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목걸이가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였음을 깨달았다.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 이 구조는 신화에만 있는가? 그렇지 않다.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는 내 삶에도 있었다. 그리고 아마, 당신의 삶에도 있을 것이다.
내 삶에는 어떻게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있었을까. 잠깐, 나의 이야기를 하겠다. 나는 목소리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나는 강철 같은 체력과 강철 같은 성대 그리고 강철 같은 멘탈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의 성대는 18시간을 진행해도 끄떡없었다. 나는 쉽게 소진되지 않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성대가 잘 나오지 않는 나 자신, 체력이 소진된 나 자신에게 '나약하게 굴지 말라'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멘탈이 있었다. 그것은 분명 축복이었다. 아니, 축복처럼 보였다. 이 축복 속에서 나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목소리가 잘 나왔기 때문에, 나는 목에 커다란 멍울이 잡혀도 멈추지 않았다. 피곤하고 졸려도 잠을 자지 않았다. 잠은 죽어서나 자는 거라며 아낄 수 있는 것 중에는 늘 잠을 아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했다. 목이 쉬어도, 몸이 피곤해도, "괜찮아, 더 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다. 축복이 나를 과신하게 만들었고, 과신이 나를 멈추지 못하게 했고, 멈추지 못한 끝에 내 몸은 멈출 수 없는 것을 키워냈다.
그렇게 나는 서른이라는 나이에 암에 걸렸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되돌아보면, 축복의 모양을 한 것이 나를 가장 위험한 비극으로 끌고 간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오카스테의 목걸이처럼 말이다.
이야기를 이렇게 끝낸다면, 너무 서글프고 무섭지 않은가. 그렇다면 안심하기를 바란다. 이 이야기에는 반대편이 있다. 나의 이야기에는 늘 끝과 끝이 공존한다.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가 있다면, 저주의 모양을 한 축복도 있다.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이제부터는 저주의 모양을 한 축복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이 이야기는 암으로부터 시작한다. 나의 암은 분명 저주였다. 나는 암으로 인해 갑상선을 잃었다. 수술 후유증으로 성대 마비가 오면서 목소리를 잃었다. 검사를 받고 치료를 받고 수술을 받고 회복을 하느라 2025년을 통째로 잃었다. 그리고 앞서 나열한 것들을 잃음으로써 자신을 잃어갔다. 하지만 세상에는 잃음으로써 얻게 되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잃어야만 얻게 되는 것들이 존재한다.
목소리를 잃고서야, 나는 진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말하기의 본질을 깨달은 것이다. 정답이 무너지고서야, 진짜 질문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운명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나서야, 제아무리 운명이라도 절대 앗아갈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히 보았다. 그렇게 나는 저주를 통과하며 저주의 모양을 한 축복들을 하나둘씩 만나고 느끼고 얻기 시작했다.
이오카스테의 목걸이가 시간의 감각을 빼앗고 그녀의 눈을 가렸듯, 축복은 무언가를 가린다. 잘 되고 있을 때, 우리는 보지 못한다.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축복 안에서 우리의 눈은 점점 멀게 된다. 반대로, 저주는 무언가를 드러낸다. 모든 것이 무너질 때, 비로소 무너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처절하게 잃을 때, 그럼에도 잃을 수 없는 것이 보인다. 그렇다, 저주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한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만 가장 투명한 나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축복과 저주를 구분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축복이라고 불렀던 것이 저주였고, 저주라고 불렀던 것이 축복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축복과 저주는 하나의 동전인 앞면과 뒷면과 같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 축복이면서 저주였다. 영원한 젊음이면서 시간의 상실이었다. 이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였다.
나의 암도 그랬다. 나의 암은 저주였고 동시에 축복이었다. 저주가 축복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하나였다. 다만 내가 암이라는 동전을 한쪽 면으로만 보고 있었을 뿐이다. 이것을 깨달은 순간,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일어나는 모든 일에 양면이 있다는 것을. 잃는 것 안에 얻는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무너지는 것 안에 세워지는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양면을 동시에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이 입체가 된다는 것을. 나는 깨달은 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할 무렵 나는 당신이 글을 끝까지 읽었을 때 여전히 이오카스테를 부러워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어떤가? 당신은 여전히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가 부러운가? 당신의 삶에도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있기를 바라는가?
우리의 삶에 두르고 있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 무엇인가? 지금 축복이라고 믿고 있는 무언가는 무엇인가? 물론, 나는 당신이 지금 잘 되고 있다고, 다행이라고,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그 무언가가 혹은 그 모든 것들이 진심으로 축복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이 그 축복들을 한 번쯤은 들여다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가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신의 눈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가? 이오카스테의 목걸이가 시간의 감각을 빼앗았듯이, 당신의 축복이 당신으로부터 빼앗고 있는 것은 없는가.
그리고 반대로, 만약 당신이 저주받았다고 느끼는 무언가가 있다면. 잃어버리고, 무너지고, 빼앗긴 것 앞에 당신이 주저앉아있다면, 나는 진심으로 당신이 그 저주를 천천히 들여다보기를 바란다. 내가 암이라는 심연을 뚫어지게 보았듯이 말이다. 그럼, 그 심연이 당신을 바라볼 것이다. 당신의 저주가 당신에게 응답할 것이다. 그럼, 당신은 축복 속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을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오직 저주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지금 느끼게 될 것이다.
축복과 저주는 같은 목걸이의 양면이다. 한쪽만 바라보고 산다면, 우리는 반쪽짜리 삶을 산다. 만약 내가 온전한 삶을 살고 싶다면 목걸이의 양면을 모두 볼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은 해석한 만큼만 살아지고, 세상은 보는 만큼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쉽게 축배를 들지 않는다. 그리고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쉬이 비탄에 잠기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것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글의 끝에서 나는 당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건네고 싶다.
지금, 당신이 축복이라 부르는 것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당신이 저주라 부르는 것의 반대편에는 또 무엇이 있는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 대대로 테바이 왕가의 여인들에게 전해졌다. 대대손손. 그리고 마침내, 그 목걸이가 오늘의 주인공 이오카스테의 목에 걸렸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 대대로 테바이 왕가의 여인들에게 전해졌다. 대대손손. 그리고 마침내, 그 목걸이가 오늘의 주인공 이오카스테의 목에 걸렸다.
이오카스테는 테바이의 왕비였다. 그녀의 남편은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였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는 아들의 탄생을 기념하며 신탁을 받았다. 그런데 신탁의 내용이 몹시 흉흉했다. "이 아이가 자라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자를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라이오스는 아이의 발목을 꿰뚫어 묶은 채 산에 버렸다. 그리고 당연히 아이가 죽었으리라 믿었다.
이오카스테는 테바이의 왕비였다. 그녀의 남편은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였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는 아들의 탄생을 기념하며 신탁을 받았다. 그런데 신탁의 내용이 몹시 흉흉했다. "이 아이가 자라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자를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라이오스는 아이의 발목을 꿰뚫어 묶은 채 산에 버렸다. 그리고 당연히 아이가 죽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마침, 그 산을 지나고 있던 코린토스의 왕이 발이 잔뜩 부은 채 버려져 있는 아이를 발견한다. 마침, 아이가 없어 고민하던 코린토스의 왕은 그 아이를 자신의 양아들 삼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아이를 빤히 쳐다보고는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부은 발을 가졌군, 그래 너의 이름은 오이디푸스다.'(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의 뜻이 '부은 발'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마침, 그 산을 지나고 있던 코린토스의 왕이 발이 잔뜩 부은 채 버려져 있는 아이를 발견한다. 마침, 아이가 없어 고민하던 코린토스의 왕은 그 아이를 자신의 양아들 삼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아이를 빤히 쳐다보고는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부은 발을 가졌군, 그래 너의 이름은 오이디푸스다.'(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의 뜻이 '부은 발'이다)
그렇다. 이 아이가 바로,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다. 오이디푸스의 생애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이야기해 보자. 오이디푸스는 커서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다. 자신의 양부모님이 친부모님인 줄 알았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기 위해 왕국을 떠나는 과정에서 진짜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만나 죽인다. 그리고 테바이로 와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영웅이 되어,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했다.
그렇다. 이 아이가 바로,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다. 오이디푸스의 생애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이야기해 보자. 오이디푸스는 커서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다. 자신의 양부모님이 친부모님인 줄 알았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기 위해 왕국을 떠나는 과정에서 진짜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만나 죽인다. 그리고 테바이로 와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영웅이 되어,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했다.
여기까지가 대부분의 사람이 아는 이야기다. 오이디푸스의 비극. 운명을 피하려 할수록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비극. 하지만 나는 이 비극 속에서 다른 곳을 본다. 같은 이야기 속에서 다른 이를 본다. 이오카스테를. 나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읽을 때 늘 궁금했다. '왜 오이디푸스는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어떻게 자신의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는가'. 당신이 나의 글을 집중해서 읽었다면, 이제 당신은 나의 질문에 답해줄 수 있다.
여기까지가 대부분의 사람이 아는 이야기다. 오이디푸스의 비극. 운명을 피하려 할수록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비극. 하지만 나는 이 비극 속에서 다른 곳을 본다. 같은 이야기 속에서 다른 이를 본다. 이오카스테를. 나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읽을 때 늘 궁금했다. '왜 오이디푸스는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어떻게 자신의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는가'. 당신이 나의 글을 집중해서 읽었다면, 이제 당신은 나의 질문에 답해줄 수 있다.
그렇다. 이오카스테의 목에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한 젊음을 주는 목걸이. 이오카스테는 이 목걸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히 늙지 않았다. 아들을 산에 버릴 때도, 아들을 산에 버린 지 수십 년이 흐른 뒤에도. 그래서 자기 아들이 어엿한 청년이 되고 영웅이 되어 자신 앞에 다시 섰을 때도. 이오카스테는 늘 젊었고, 늘 아름다웠다. 그렇게 이오카스테는 자기 아들인 오이디푸스와 결혼했다.
그렇다. 이오카스테의 목에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한 젊음을 주는 목걸이. 이오카스테는 이 목걸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히 늙지 않았다. 아들을 산에 버릴 때도, 아들을 산에 버린 지 수십 년이 흐른 뒤에도. 그래서 자기 아들이 어엿한 청년이 되고 영웅이 되어 자신 앞에 다시 섰을 때도. 이오카스테는 늘 젊었고, 늘 아름다웠다. 그렇게 이오카스테는 자기 아들인 오이디푸스와 결혼했다.
이오카스테는 거울을 봐도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에게 인생은 영원히 주어지는 것이었으며, 그녀에게 아름다움은 영원히 잃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늘 똑같이 아름다웠다. 그런 그녀에게는 아들을 버린 것이 어제 같았을 것이다. 산에 버린 아기가 자라 성인이 되어 돌아올 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오카스테의 몸에는 그 시간의 흔적이 없었다. 그러니 눈앞에 서 있는 이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 자기 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이오카스테는 거울을 봐도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에게 인생은 영원히 주어지는 것이었으며, 그녀에게 아름다움은 영원히 잃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늘 똑같이 아름다웠다. 그런 그녀에게는 아들을 버린 것이 어제 같았을 것이다. 산에 버린 아기가 자라 성인이 되어 돌아올 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오카스테의 몸에는 그 시간의 흔적이 없었다. 그러니 눈앞에 서 있는 이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 자기 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영원한 젊음이 그녀에게서 빼앗아 간 것은 주름이 아니었다. 시간의 감각이었다. 만약 그녀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늙었다면 그녀는 알아보았을 것이다. 과거의 자신만큼 아름다운 그 청년을. 자신의 몸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과 세월이 빚어낸 주름들이,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단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목걸이가 그 단서를 지웠다. 축복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 눈을 가리는 축복을 축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나의 질문이다.
영원한 젊음이 그녀에게서 빼앗아 간 것은 주름이 아니었다. 시간의 감각이었다. 만약 그녀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늙었다면 그녀는 알아보았을 것이다. 과거의 자신만큼 아름다운 그 청년을. 자신의 몸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과 세월이 빚어낸 주름들이,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단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목걸이가 그 단서를 지웠다. 축복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 눈을 가리는 축복을 축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나의 질문이다.
물론, 영원한 젊음은 축복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바로 그 축복이, 아들과 결혼하는 비극을 만들었다. 늙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을 잃었다. 시간을 잃었기 때문에, 아들을 잃었다. 그녀가 차고 있었던 목걸이는 축복이 아니었다.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였을 뿐.
물론, 영원한 젊음은 축복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바로 그 축복이, 아들과 결혼하는 비극을 만들었다. 늙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을 잃었다. 시간을 잃었기 때문에, 아들을 잃었다. 그녀가 차고 있었던 목걸이는 축복이 아니었다.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였을 뿐.
모두가 오이디푸스 비극에서 오이디푸스만을 바라볼 때, 나는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그의 어머니이자 그의 아내 이오카스테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목걸이가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였음을 깨달았다.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 이 구조는 신화에만 있는가? 그렇지 않다.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는 내 삶에도 있었다. 그리고 아마, 당신의 삶에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오이디푸스 비극에서 오이디푸스만을 바라볼 때, 나는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그의 어머니이자 그의 아내 이오카스테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목걸이가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였음을 깨달았다.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 이 구조는 신화에만 있는가? 그렇지 않다.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는 내 삶에도 있었다. 그리고 아마, 당신의 삶에도 있을 것이다.
내 삶에는 어떻게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있었을까. 잠깐, 나의 이야기를 하겠다. 나는 목소리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나는 강철 같은 체력과 강철 같은 성대 그리고 강철 같은 멘탈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의 성대는 18시간을 진행해도 끄떡없었다. 나는 쉽게 소진되지 않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성대가 잘 나오지 않는 나 자신, 체력이 소진된 나 자신에게 '나약하게 굴지 말라'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멘탈이 있었다. 그것은 분명 축복이었다. 아니, 축복처럼 보였다. 이 축복 속에서 나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내 삶에는 어떻게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있었을까. 잠깐, 나의 이야기를 하겠다. 나는 목소리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나는 강철 같은 체력과 강철 같은 성대 그리고 강철 같은 멘탈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의 성대는 18시간을 진행해도 끄떡없었다. 나는 쉽게 소진되지 않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성대가 잘 나오지 않는 나 자신, 체력이 소진된 나 자신에게 '나약하게 굴지 말라'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멘탈이 있었다. 그것은 분명 축복이었다. 아니, 축복처럼 보였다. 이 축복 속에서 나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목소리가 잘 나왔기 때문에, 나는 목에 커다란 멍울이 잡혀도 멈추지 않았다. 피곤하고 졸려도 잠을 자지 않았다. 잠은 죽어서나 자는 거라며 아낄 수 있는 것 중에는 늘 잠을 아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했다. 목이 쉬어도, 몸이 피곤해도, "괜찮아, 더 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다. 축복이 나를 과신하게 만들었고, 과신이 나를 멈추지 못하게 했고, 멈추지 못한 끝에 내 몸은 멈출 수 없는 것을 키워냈다.
목소리가 잘 나왔기 때문에, 나는 목에 커다란 멍울이 잡혀도 멈추지 않았다. 피곤하고 졸려도 잠을 자지 않았다. 잠은 죽어서나 자는 거라며 아낄 수 있는 것 중에는 늘 잠을 아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했다. 목이 쉬어도, 몸이 피곤해도, "괜찮아, 더 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다. 축복이 나를 과신하게 만들었고, 과신이 나를 멈추지 못하게 했고, 멈추지 못한 끝에 내 몸은 멈출 수 없는 것을 키워냈다.
그렇게 나는 서른이라는 나이에 암에 걸렸다.
그렇게 나는 서른이라는 나이에 암에 걸렸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되돌아보면, 축복의 모양을 한 것이 나를 가장 위험한 비극으로 끌고 간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오카스테의 목걸이처럼 말이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되돌아보면, 축복의 모양을 한 것이 나를 가장 위험한 비극으로 끌고 간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오카스테의 목걸이처럼 말이다.
이야기를 이렇게 끝낸다면, 너무 서글프고 무섭지 않은가. 그렇다면 안심하기를 바란다. 이 이야기에는 반대편이 있다. 나의 이야기에는 늘 끝과 끝이 공존한다.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가 있다면, 저주의 모양을 한 축복도 있다.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이제부터는 저주의 모양을 한 축복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이야기를 이렇게 끝낸다면, 너무 서글프고 무섭지 않은가. 그렇다면 안심하기를 바란다. 이 이야기에는 반대편이 있다. 나의 이야기에는 늘 끝과 끝이 공존한다.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가 있다면, 저주의 모양을 한 축복도 있다. 축복의 모양을 한 저주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이제부터는 저주의 모양을 한 축복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이 이야기는 암으로부터 시작한다. 나의 암은 분명 저주였다. 나는 암으로 인해 갑상선을 잃었다. 수술 후유증으로 성대 마비가 오면서 목소리를 잃었다. 검사를 받고 치료를 받고 수술을 받고 회복을 하느라 2025년을 통째로 잃었다. 그리고 앞서 나열한 것들을 잃음으로써 자신을 잃어갔다. 하지만 세상에는 잃음으로써 얻게 되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잃어야만 얻게 되는 것들이 존재한다.
이 이야기는 암으로부터 시작한다. 나의 암은 분명 저주였다. 나는 암으로 인해 갑상선을 잃었다. 수술 후유증으로 성대 마비가 오면서 목소리를 잃었다. 검사를 받고 치료를 받고 수술을 받고 회복을 하느라 2025년을 통째로 잃었다. 그리고 앞서 나열한 것들을 잃음으로써 자신을 잃어갔다. 하지만 세상에는 잃음으로써 얻게 되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잃어야만 얻게 되는 것들이 존재한다.
목소리를 잃고서야, 나는 진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말하기의 본질을 깨달은 것이다. 정답이 무너지고서야, 진짜 질문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운명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나서야, 제아무리 운명이라도 절대 앗아갈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히 보았다. 그렇게 나는 저주를 통과하며 저주의 모양을 한 축복들을 하나둘씩 만나고 느끼고 얻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잃고서야, 나는 진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말하기의 본질을 깨달은 것이다. 정답이 무너지고서야, 진짜 질문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운명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나서야, 제아무리 운명이라도 절대 앗아갈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히 보았다. 그렇게 나는 저주를 통과하며 저주의 모양을 한 축복들을 하나둘씩 만나고 느끼고 얻기 시작했다.
이오카스테의 목걸이가 시간의 감각을 빼앗고 그녀의 눈을 가렸듯, 축복은 무언가를 가린다. 잘 되고 있을 때, 우리는 보지 못한다.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축복 안에서 우리의 눈은 점점 멀게 된다. 반대로, 저주는 무언가를 드러낸다. 모든 것이 무너질 때, 비로소 무너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처절하게 잃을 때, 그럼에도 잃을 수 없는 것이 보인다. 그렇다, 저주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한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만 가장 투명한 나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오카스테의 목걸이가 시간의 감각을 빼앗고 그녀의 눈을 가렸듯, 축복은 무언가를 가린다. 잘 되고 있을 때, 우리는 보지 못한다.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축복 안에서 우리의 눈은 점점 멀게 된다. 반대로, 저주는 무언가를 드러낸다. 모든 것이 무너질 때, 비로소 무너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처절하게 잃을 때, 그럼에도 잃을 수 없는 것이 보인다. 그렇다, 저주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한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만 가장 투명한 나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축복과 저주를 구분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축복이라고 불렀던 것이 저주였고, 저주라고 불렀던 것이 축복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축복과 저주는 하나의 동전인 앞면과 뒷면과 같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축복과 저주를 구분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축복이라고 불렀던 것이 저주였고, 저주라고 불렀던 것이 축복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축복과 저주는 하나의 동전인 앞면과 뒷면과 같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 축복이면서 저주였다. 영원한 젊음이면서 시간의 상실이었다. 이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였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 축복이면서 저주였다. 영원한 젊음이면서 시간의 상실이었다. 이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였다.
나의 암도 그랬다. 나의 암은 저주였고 동시에 축복이었다. 저주가 축복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하나였다. 다만 내가 암이라는 동전을 한쪽 면으로만 보고 있었을 뿐이다. 이것을 깨달은 순간,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일어나는 모든 일에 양면이 있다는 것을. 잃는 것 안에 얻는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무너지는 것 안에 세워지는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양면을 동시에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이 입체가 된다는 것을. 나는 깨달은 것이다.
나의 암도 그랬다. 나의 암은 저주였고 동시에 축복이었다. 저주가 축복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하나였다. 다만 내가 암이라는 동전을 한쪽 면으로만 보고 있었을 뿐이다. 이것을 깨달은 순간,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일어나는 모든 일에 양면이 있다는 것을. 잃는 것 안에 얻는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무너지는 것 안에 세워지는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양면을 동시에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이 입체가 된다는 것을. 나는 깨달은 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할 무렵 나는 당신이 글을 끝까지 읽었을 때 여전히 이오카스테를 부러워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시작할 무렵 나는 당신이 글을 끝까지 읽었을 때 여전히 이오카스테를 부러워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어떤가? 당신은 여전히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가 부러운가? 당신의 삶에도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있기를 바라는가?
어떤가? 당신은 여전히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가 부러운가? 당신의 삶에도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있기를 바라는가?
우리의 삶에 두르고 있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 무엇인가? 지금 축복이라고 믿고 있는 무언가는 무엇인가? 물론, 나는 당신이 지금 잘 되고 있다고, 다행이라고,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그 무언가가 혹은 그 모든 것들이 진심으로 축복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이 그 축복들을 한 번쯤은 들여다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가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신의 눈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가? 이오카스테의 목걸이가 시간의 감각을 빼앗았듯이, 당신의 축복이 당신으로부터 빼앗고 있는 것은 없는가.
우리의 삶에 두르고 있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 무엇인가? 지금 축복이라고 믿고 있는 무언가는 무엇인가? 물론, 나는 당신이 지금 잘 되고 있다고, 다행이라고,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그 무언가가 혹은 그 모든 것들이 진심으로 축복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이 그 축복들을 한 번쯤은 들여다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가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신의 눈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가? 이오카스테의 목걸이가 시간의 감각을 빼앗았듯이, 당신의 축복이 당신으로부터 빼앗고 있는 것은 없는가.
그리고 반대로, 만약 당신이 저주받았다고 느끼는 무언가가 있다면. 잃어버리고, 무너지고, 빼앗긴 것 앞에 당신이 주저앉아있다면, 나는 진심으로 당신이 그 저주를 천천히 들여다보기를 바란다. 내가 암이라는 심연을 뚫어지게 보았듯이 말이다. 그럼, 그 심연이 당신을 바라볼 것이다. 당신의 저주가 당신에게 응답할 것이다. 그럼, 당신은 축복 속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을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오직 저주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지금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만약 당신이 저주받았다고 느끼는 무언가가 있다면. 잃어버리고, 무너지고, 빼앗긴 것 앞에 당신이 주저앉아있다면, 나는 진심으로 당신이 그 저주를 천천히 들여다보기를 바란다. 내가 암이라는 심연을 뚫어지게 보았듯이 말이다. 그럼, 그 심연이 당신을 바라볼 것이다. 당신의 저주가 당신에게 응답할 것이다. 그럼, 당신은 축복 속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을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오직 저주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지금 느끼게 될 것이다.
축복과 저주는 같은 목걸이의 양면이다. 한쪽만 바라보고 산다면, 우리는 반쪽짜리 삶을 산다. 만약 내가 온전한 삶을 살고 싶다면 목걸이의 양면을 모두 볼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은 해석한 만큼만 살아지고, 세상은 보는 만큼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축복과 저주는 같은 목걸이의 양면이다. 한쪽만 바라보고 산다면, 우리는 반쪽짜리 삶을 산다. 만약 내가 온전한 삶을 살고 싶다면 목걸이의 양면을 모두 볼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은 해석한 만큼만 살아지고, 세상은 보는 만큼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쉽게 축배를 들지 않는다. 그리고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쉬이 비탄에 잠기지 않는다.
나는 이제,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쉽게 축배를 들지 않는다. 그리고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쉬이 비탄에 잠기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것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글의 끝에서 나는 당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건네고 싶다.
대신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것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글의 끝에서 나는 당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건네고 싶다.
지금, 당신이 축복이라 부르는 것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당신이 저주라 부르는 것의 반대편에는 또 무엇이 있는가.
지금, 당신이 축복이라 부르는 것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당신이 저주라 부르는 것의 반대편에는 또 무엇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