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인들의 결혼식 사회를 연달아 맡으면서 사전 미팅을 했다. 혼인서약서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한 신부가 말했다. "언니, 요즘은 GPT로 혼인서약서 쓰는 사람들도 많대요."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대표적인 웨딩 카페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다. "혼인서약서 못 쓰겠는 분들 챗GPT 적극 추천드려요." 댓글에는 "저도 썼는데 너무 잘 나와요", "ㅋㅋㅋㅋ저도 도움 많이 받았어요, 축사도 잘 써주더라고요"라는 반응이 달려 있었다.
나는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혼인서약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적인 언어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남은 삶 전부를 걸고 건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을, 두 사람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계가 대신 쓰고 있다.
나는 이 현상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마음은 가득한데 첫 문장이 나오지 않는 그 막막함을 나 역시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AI가 그 빈자리를 능숙하게 채워준다. 채워주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따로 있다. 채워진 그 자리에, 나는 없다.
AI가 쓴 혼인서약서는 완벽하다. 문법적으로 흠이 없고, 감정의 결이 세밀하며, 적절한 곳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그 안에는 첫 데이트 날, 카페에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마셨음에도 심장이 두근대던 기억이 없다. 싸우고 나서 말없이 멀찍이 걷다가 조용히 손을 잡으며 화해하던 골목이 없다. "사랑해"와 "미안해" 두 단어를 함께 말하는 것이 유난히 버겁던 밤, 결국 울어버린 밤이 없다.
인공지능에게 구조는 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인공지능에게 형식은 있다. 그러나 존재가 없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말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를 열렬히 사랑해 온 나는, 이 문장을 처음 본 순간부터 명쾌하게 이해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명징하게 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존재 없는 언어는 빈집이다. 벽도 있고 지붕도 있고 창문도 있다. 누가 보아도 훌륭한 집이겠으나, 문을 열면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빈집.
March 31, 2026
인공지능은 말하지 않는다
AI가 완벽하게 발화하는 시대에, 우리는 정말로 ‘살아 있는 언어’를 말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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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지인들의 결혼식 사회를 연달아 맡으면서 사전 미팅을 했다. 혼인서약서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한 신부가 말했다. "언니, 요즘은 GPT로 혼인서약서 쓰는 사람들도 많대요."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대표적인 웨딩 카페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다. "혼인서약서 못 쓰겠는 분들 챗GPT 적극 추천드려요." 댓글에는 "저도 썼는데 너무 잘 나와요", "ㅋㅋㅋㅋ저도 도움 많이 받았어요, 축사도 잘 써주더라고요"라는 반응이 달려 있었다.
나는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혼인서약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적인 언어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남은 삶 전부를 걸고 건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을, 두 사람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계가 대신 쓰고 있다.
나는 이 현상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마음은 가득한데 첫 문장이 나오지 않는 그 막막함을 나 역시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AI가 그 빈자리를 능숙하게 채워준다. 채워주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따로 있다. 채워진 그 자리에, 나는 없다.
AI가 쓴 혼인서약서는 완벽하다. 문법적으로 흠이 없고, 감정의 결이 세밀하며, 적절한 곳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그 안에는 첫 데이트 날, 카페에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마셨음에도 심장이 두근대던 기억이 없다. 싸우고 나서 말없이 멀찍이 걷다가 조용히 손을 잡으며 화해하던 골목이 없다. "사랑해"와 "미안해" 두 단어를 함께 말하는 것이 유난히 버겁던 밤, 결국 울어버린 밤이 없다.
인공지능에게 구조는 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인공지능에게 형식은 있다. 그러나 존재가 없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말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를 열렬히 사랑해 온 나는, 이 문장을 처음 본 순간부터 명쾌하게 이해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명징하게 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존재 없는 언어는 빈집이다. 벽도 있고 지붕도 있고 창문도 있다. 누가 보아도 훌륭한 집이겠으나, 문을 열면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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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31, 2026
인공지능은 말하지 않는다
AI가 완벽하게 발화하는 시대에, 우리는 정말로 ‘살아 있는 언어’를 말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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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지인들의 결혼식 사회를 연달아 맡으면서 사전 미팅을 했다. 혼인서약서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한 신부가 말했다. "언니, 요즘은 GPT로 혼인서약서 쓰는 사람들도 많대요."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대표적인 웨딩 카페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다. "혼인서약서 못 쓰겠는 분들 챗GPT 적극 추천드려요." 댓글에는 "저도 썼는데 너무 잘 나와요", "ㅋㅋㅋㅋ저도 도움 많이 받았어요, 축사도 잘 써주더라고요"라는 반응이 달려 있었다.
나는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혼인서약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적인 언어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남은 삶 전부를 걸고 건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을, 두 사람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계가 대신 쓰고 있다.
나는 이 현상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마음은 가득한데 첫 문장이 나오지 않는 그 막막함을 나 역시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AI가 그 빈자리를 능숙하게 채워준다. 채워주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따로 있다. 채워진 그 자리에, 나는 없다.
AI가 쓴 혼인서약서는 완벽하다. 문법적으로 흠이 없고, 감정의 결이 세밀하며, 적절한 곳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그 안에는 첫 데이트 날, 카페에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마셨음에도 심장이 두근대던 기억이 없다. 싸우고 나서 말없이 멀찍이 걷다가 조용히 손을 잡으며 화해하던 골목이 없다. "사랑해"와 "미안해" 두 단어를 함께 말하는 것이 유난히 버겁던 밤, 결국 울어버린 밤이 없다.
인공지능에게 구조는 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인공지능에게 형식은 있다. 그러나 존재가 없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말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를 열렬히 사랑해 온 나는, 이 문장을 처음 본 순간부터 명쾌하게 이해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명징하게 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존재 없는 언어는 빈집이다. 벽도 있고 지붕도 있고 창문도 있다. 누가 보아도 훌륭한 집이겠으나, 문을 열면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빈집.
그렇다, AI의 언어는 빈집이다.
아름답지만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집. 완벽하지만 삶의 냄새가 나지 않는 집. 나는 이것을 '발화'라고 부른다. 단어와 문장을 배열해 출력하는 행위. AI는 발화한다. 정교하게, 능숙하게, 때로는 감동적으로. 그러나 발화할 뿐이다.
말하기는 다르다. 말하기는 모델하우스가 아니다. 완벽하나 누구도 살지 않는 빈집이 아니라, 누군가가 실제로 살아온 집이다. 벽에 긁힌 자국이 있고, 부엌에는 어제 저녁의 냄새가 남아 있다. 베란다에 주인이 좋아하는 화분이 추위를 버티며 그 나름의 생을 버텨내고 있다.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살아 있다.
말하기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언어에 담는 행위다.
여기서 하나를 더 들여다보고 싶다. 과연 AI만 발화하고 있는가?
발화는 AI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한때 누구보다 말하기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수천 명 앞에서 몇 시간이고 말할 수 있었고, 그것이 나의 직업이었다. 몇 시간이고 유연히 말하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스피치 컨설팅을 요청해 왔다. 그렇게 시작된 수업에서 대본은 없었다. 나는 첫 수업부터 나의 수업에는 정해진 대본은 없을 거라고 단호히 이야기했다.
대본에 의존하는 말하기는 진짜 말하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발화, 규칙적인 배열과 나열에 불과하다. 덕분에 나의 수업에서는 누구도 외운 문장을 읽지 않았다. 모두 자신의 문장을 말했다. 나의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자신만의 언어로 꺼내게 한다는 것. 그것이 선생으로서 나의 자부심이었다.
암 수술 후 성대 신경 손상으로 인해 목소리를 잃고 난 후, 나는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나는 "말하기"를 가르치면서도, 정작 말하기의 가장 깊은 층을 모르고 있었다. 성대가 제 몫을 다 해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말하기란 입 밖으로 꺼내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잘 꺼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잃게 되자, 꺼내는 도구가 사라지자, 비로소 보였다. 말하기의 본질은 꺼내는 기술이 아니었다.
꺼낼 것이 있는가. 그것이 전부였다. 목소리를 잃게 된 나에게 남은 것은 글이었다. 읽는 글과 쓰는 글. 새벽에 겨우 적은 한두 줄의 문장들. 온갖 주삿바늘이 꽂혀 있는 손을 쓸 수 없어 속삭이듯 남긴 음성 기록. 그 기록들은 문법적으로 엉망이었다. 구조도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내가 있었다. 내가 통과하고 있는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성대가 멀쩡하던 시절, 수천 명 앞에서 했던 그 유창한 말들보다, 그 엉성한 몇 줄이 더 깊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안에서 이름 없이 떠돌던 감각에 언어가 붙었다. 혼자서는 끝내 붙잡지 못했을 것을, 누군가의 문장이 대신 붙잡아주었다. 글을 쓸 때마다, 흘러가는 고통에 형태가 생겼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통과하고 있는 것을, 이 고통을 곧 잊게 될 미래의 내가 다시 꺼내 볼 수 있도록, 정확한 형태로 남겨두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이 순간을, 나는 글로 붙잡았다.
AI 시대에 두려운 것은 AI가 아니다.
두려운 것은, 내 언어에 내가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일이다. AI가 거울이 되어 비추는 것은 기술의 위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공허다. "AI가 나를 대체하면 어쩌지."라는 질문 뒤에는, "나는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이 숨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두려움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려움은 초대다. 발화에 머물렀던 자신을 발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말하기로 나아갈 수 있는 초대. 지금까지 내 언어에 내가 없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비로소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를 찾아 나서는 시작.
AI는 앞으로 더 정교하게 발화할 것이다. 그리고 발화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진짜 말하기는 더 희소해질 것이다. 정말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로 말하는 이들은 더 귀해질 것이다. 모든 것을 출력할 수 있는 시대에, 출력이 아닌 것의 가치는 높아진다. 완벽한 빈집을 무한히 지어낼 수 있는 시대에, 누군가가 실제로 살고 있는 집은 더 귀해지기 마련이다.
인공지능은 말하지 않는다. 발화할 뿐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지금, 당신의 언어에는 당신이 살고 있는가.
당신이 매일 하는 말 속에, 당신이 걸어온 시간이 담겨 있는가. 당신이 누군가에게 건네는 위로 속에, 당신이 위로받았던 밤의 온도가 녹아 있는가. 당신이 쓰는 축하의 말 속에, 당신이 진심으로 기뻐했던 순간의 떨림이 들어 있는가.
만약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사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잘 발화하는 법을 배웠을 뿐, 나답게 말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화와 말하기의 차이를 알았다면, 이제부터 말하기를 시작할 수 있다. 읽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통과한 시간을 만나는 일에서. 쓰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내가 통과한 시간에 형태를 주는 일에서. 그렇게 읽고 쓰는 사이에, 발화 속에 묻혀 있던 나만의 언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당신이 살아낸 시간은 이미 충분하다. 다만 아직,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꺼내지 않았을 뿐.
그렇다, AI의 언어는 빈집이다.
그렇다, AI의 언어는 빈집이다.
아름답지만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집. 완벽하지만 삶의 냄새가 나지 않는 집. 나는 이것을 '발화'라고 부른다. 단어와 문장을 배열해 출력하는 행위. AI는 발화한다. 정교하게, 능숙하게, 때로는 감동적으로. 그러나 발화할 뿐이다.
아름답지만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집. 완벽하지만 삶의 냄새가 나지 않는 집. 나는 이것을 '발화'라고 부른다. 단어와 문장을 배열해 출력하는 행위. AI는 발화한다. 정교하게, 능숙하게, 때로는 감동적으로. 그러나 발화할 뿐이다.
말하기는 다르다. 말하기는 모델하우스가 아니다. 완벽하나 누구도 살지 않는 빈집이 아니라, 누군가가 실제로 살아온 집이다. 벽에 긁힌 자국이 있고, 부엌에는 어제 저녁의 냄새가 남아 있다. 베란다에 주인이 좋아하는 화분이 추위를 버티며 그 나름의 생을 버텨내고 있다.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살아 있다.
말하기는 다르다. 말하기는 모델하우스가 아니다. 완벽하나 누구도 살지 않는 빈집이 아니라, 누군가가 실제로 살아온 집이다. 벽에 긁힌 자국이 있고, 부엌에는 어제 저녁의 냄새가 남아 있다. 베란다에 주인이 좋아하는 화분이 추위를 버티며 그 나름의 생을 버텨내고 있다.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살아 있다.
말하기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언어에 담는 행위다.
말하기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언어에 담는 행위다.
여기서 하나를 더 들여다보고 싶다. 과연 AI만 발화하고 있는가?
여기서 하나를 더 들여다보고 싶다. 과연 AI만 발화하고 있는가?
발화는 AI만의 문제가 아니다.
발화는 AI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한때 누구보다 말하기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수천 명 앞에서 몇 시간이고 말할 수 있었고, 그것이 나의 직업이었다. 몇 시간이고 유연히 말하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스피치 컨설팅을 요청해 왔다. 그렇게 시작된 수업에서 대본은 없었다. 나는 첫 수업부터 나의 수업에는 정해진 대본은 없을 거라고 단호히 이야기했다.
나는 한때 누구보다 말하기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수천 명 앞에서 몇 시간이고 말할 수 있었고, 그것이 나의 직업이었다. 몇 시간이고 유연히 말하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스피치 컨설팅을 요청해 왔다. 그렇게 시작된 수업에서 대본은 없었다. 나는 첫 수업부터 나의 수업에는 정해진 대본은 없을 거라고 단호히 이야기했다.
대본에 의존하는 말하기는 진짜 말하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발화, 규칙적인 배열과 나열에 불과하다. 덕분에 나의 수업에서는 누구도 외운 문장을 읽지 않았다. 모두 자신의 문장을 말했다. 나의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자신만의 언어로 꺼내게 한다는 것. 그것이 선생으로서 나의 자부심이었다.
대본에 의존하는 말하기는 진짜 말하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발화, 규칙적인 배열과 나열에 불과하다. 덕분에 나의 수업에서는 누구도 외운 문장을 읽지 않았다. 모두 자신의 문장을 말했다. 나의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자신만의 언어로 꺼내게 한다는 것. 그것이 선생으로서 나의 자부심이었다.
암 수술 후 성대 신경 손상으로 인해 목소리를 잃고 난 후, 나는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암 수술 후 성대 신경 손상으로 인해 목소리를 잃고 난 후, 나는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나는 "말하기"를 가르치면서도, 정작 말하기의 가장 깊은 층을 모르고 있었다. 성대가 제 몫을 다 해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말하기란 입 밖으로 꺼내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잘 꺼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잃게 되자, 꺼내는 도구가 사라지자, 비로소 보였다. 말하기의 본질은 꺼내는 기술이 아니었다.
나는 "말하기"를 가르치면서도, 정작 말하기의 가장 깊은 층을 모르고 있었다. 성대가 제 몫을 다 해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말하기란 입 밖으로 꺼내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잘 꺼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잃게 되자, 꺼내는 도구가 사라지자, 비로소 보였다. 말하기의 본질은 꺼내는 기술이 아니었다.
꺼낼 것이 있는가. 그것이 전부였다. 목소리를 잃게 된 나에게 남은 것은 글이었다. 읽는 글과 쓰는 글. 새벽에 겨우 적은 한두 줄의 문장들. 온갖 주삿바늘이 꽂혀 있는 손을 쓸 수 없어 속삭이듯 남긴 음성 기록. 그 기록들은 문법적으로 엉망이었다. 구조도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내가 있었다. 내가 통과하고 있는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성대가 멀쩡하던 시절, 수천 명 앞에서 했던 그 유창한 말들보다, 그 엉성한 몇 줄이 더 깊었다.
꺼낼 것이 있는가. 그것이 전부였다. 목소리를 잃게 된 나에게 남은 것은 글이었다. 읽는 글과 쓰는 글. 새벽에 겨우 적은 한두 줄의 문장들. 온갖 주삿바늘이 꽂혀 있는 손을 쓸 수 없어 속삭이듯 남긴 음성 기록. 그 기록들은 문법적으로 엉망이었다. 구조도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내가 있었다. 내가 통과하고 있는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성대가 멀쩡하던 시절, 수천 명 앞에서 했던 그 유창한 말들보다, 그 엉성한 몇 줄이 더 깊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안에서 이름 없이 떠돌던 감각에 언어가 붙었다. 혼자서는 끝내 붙잡지 못했을 것을, 누군가의 문장이 대신 붙잡아주었다. 글을 쓸 때마다, 흘러가는 고통에 형태가 생겼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통과하고 있는 것을, 이 고통을 곧 잊게 될 미래의 내가 다시 꺼내 볼 수 있도록, 정확한 형태로 남겨두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이 순간을, 나는 글로 붙잡았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안에서 이름 없이 떠돌던 감각에 언어가 붙었다. 혼자서는 끝내 붙잡지 못했을 것을, 누군가의 문장이 대신 붙잡아주었다. 글을 쓸 때마다, 흘러가는 고통에 형태가 생겼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통과하고 있는 것을, 이 고통을 곧 잊게 될 미래의 내가 다시 꺼내 볼 수 있도록, 정확한 형태로 남겨두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이 순간을, 나는 글로 붙잡았다.
AI 시대에 두려운 것은 AI가 아니다.
AI 시대에 두려운 것은 AI가 아니다.
두려운 것은, 내 언어에 내가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일이다. AI가 거울이 되어 비추는 것은 기술의 위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공허다. "AI가 나를 대체하면 어쩌지."라는 질문 뒤에는, "나는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이 숨어 있다.
두려운 것은, 내 언어에 내가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일이다. AI가 거울이 되어 비추는 것은 기술의 위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공허다. "AI가 나를 대체하면 어쩌지."라는 질문 뒤에는, "나는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이 숨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두려움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려움은 초대다. 발화에 머물렀던 자신을 발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말하기로 나아갈 수 있는 초대. 지금까지 내 언어에 내가 없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비로소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를 찾아 나서는 시작.
하지만 나는 이 두려움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려움은 초대다. 발화에 머물렀던 자신을 발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말하기로 나아갈 수 있는 초대. 지금까지 내 언어에 내가 없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비로소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를 찾아 나서는 시작.
AI는 앞으로 더 정교하게 발화할 것이다. 그리고 발화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진짜 말하기는 더 희소해질 것이다. 정말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로 말하는 이들은 더 귀해질 것이다. 모든 것을 출력할 수 있는 시대에, 출력이 아닌 것의 가치는 높아진다. 완벽한 빈집을 무한히 지어낼 수 있는 시대에, 누군가가 실제로 살고 있는 집은 더 귀해지기 마련이다.
AI는 앞으로 더 정교하게 발화할 것이다. 그리고 발화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진짜 말하기는 더 희소해질 것이다. 정말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로 말하는 이들은 더 귀해질 것이다. 모든 것을 출력할 수 있는 시대에, 출력이 아닌 것의 가치는 높아진다. 완벽한 빈집을 무한히 지어낼 수 있는 시대에, 누군가가 실제로 살고 있는 집은 더 귀해지기 마련이다.
인공지능은 말하지 않는다. 발화할 뿐이다.
인공지능은 말하지 않는다. 발화할 뿐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지금, 당신의 언어에는 당신이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묻겠다. 지금, 당신의 언어에는 당신이 살고 있는가.
당신이 매일 하는 말 속에, 당신이 걸어온 시간이 담겨 있는가. 당신이 누군가에게 건네는 위로 속에, 당신이 위로받았던 밤의 온도가 녹아 있는가. 당신이 쓰는 축하의 말 속에, 당신이 진심으로 기뻐했던 순간의 떨림이 들어 있는가.
당신이 매일 하는 말 속에, 당신이 걸어온 시간이 담겨 있는가. 당신이 누군가에게 건네는 위로 속에, 당신이 위로받았던 밤의 온도가 녹아 있는가. 당신이 쓰는 축하의 말 속에, 당신이 진심으로 기뻐했던 순간의 떨림이 들어 있는가.
만약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사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잘 발화하는 법을 배웠을 뿐, 나답게 말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사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잘 발화하는 법을 배웠을 뿐, 나답게 말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화와 말하기의 차이를 알았다면, 이제부터 말하기를 시작할 수 있다. 읽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통과한 시간을 만나는 일에서. 쓰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내가 통과한 시간에 형태를 주는 일에서. 그렇게 읽고 쓰는 사이에, 발화 속에 묻혀 있던 나만의 언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발화와 말하기의 차이를 알았다면, 이제부터 말하기를 시작할 수 있다. 읽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통과한 시간을 만나는 일에서. 쓰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내가 통과한 시간에 형태를 주는 일에서. 그렇게 읽고 쓰는 사이에, 발화 속에 묻혀 있던 나만의 언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당신이 살아낸 시간은 이미 충분하다. 다만 아직,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꺼내지 않았을 뿐.
당신이 살아낸 시간은 이미 충분하다. 다만 아직,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꺼내지 않았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