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차를 타고 시골길로 향하던 어느 날이었다. 창문을 내리고 쌩쌩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며 "좋다. 소풍 가는 것 같아" 말했을 때, 엄마는 내게 답했다. "소윤아, 인생 자체가 소풍이야. 엄마도 너도 이 세상에 소풍 왔다가 가는 거야." 그렇다. 인생은 소풍이다. 이 문장 아래에는 이 소풍이 끝날 무렵, 참 좋은 소풍이었노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좋은 인생이었다는 뜻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 어머니의 말처럼 인생은 아주 긴 소풍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여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은 낯선 곳을 향해 떠나는 일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지도를 본다. 어느 도시로 갈 것인지, 어떤 길을 거칠 것인지, 위험한 것은 없는지, 그곳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지도에 길이 그려져 있다면, 우리는 안심한다. 길이 있다는 것은 그곳에 나보다 앞서 누군가가 걸어갔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인생에서도 지도를 찾는 모양이다. 길이 그려져 있는 지도를 손에 쥐면 안심한다. 누군가가 길을 걷고, 이 길이 정답입니다. 이 길대로 걷는다면 당신도 성공이라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외치면, 그 길을 따라간다. 누군가가 미리 그려놓은 그 길이 절대 틀리지 않을 거라 믿으면서.
인생은 여행이다. 그러나 인생의 지도는 여행의 지도와 다르다. 인생에서 펼쳐 든 지도에는 끝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길이 끊기고 이정표가 사라진 자리를 마주한다. 지도에 물음표만 그려져 있을 뿐, 무엇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영역. 이 영역 앞에서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의 지도를 찾는다. 누군가는 이 미지의 영역을 다녀오지 않았을까 기대하면서. 나 대신 위험한 것을 먼저 겪어보지 않았을까 희망하면서.
그러나 15세기 유럽의 어떤 지도 제작자들은, 그 미지의 영역에 무언가를 그렸다. 오늘은 그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다.
15세기와 16세기, 유럽의 항해사들은 새로운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망망대해를 향해 힘차게 나아갔지만, 그들이 손에 쥔 지도에는 빈 공간이 많았다. 가본 적 없는 바다, 들어본 적도 없는 대륙, 누구도 살아 돌아온 적 없는 영역. 경험한 것보다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훨씬 많았다. 그들이 마주하는 세계의 대부분이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지도 제작자들은 그 빈자리에 무엇이라도 그려야 했다. 빈 종이는 항해사를 더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공백이 아니던가. 길이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자리에 용을 그렸다.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또 다른 두려움을 그렸다. 뱀의 몸에 날개가 달린 거대한 짐승. 거센 파도 사이로 솟구치는 바다 괴물. 어떤 지도에는 입을 벌린 거대한 뱀이 그려졌고, 어떤 지도에는 배를 통째로 삼키는 괴물이 그려졌다. 괴물의 생김새 눈에 그려볼수록 괴물의 존재는 두렵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그 두려움은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나은 두려움이었다. 16세기 초에 만들어진 작은 구리 지구본 (사람들이 헌트-레녹스 지구본이라 부르는) 의 동쪽 아시아 해안에는 라틴어로 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마치 지구본에 문신을 하듯 새겨넣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April 25, 2026
여기에 용이 있다
지도가 끝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남의 정답을 베껴 넣는가 아니면 우리만의 용을 그리는가?
01
빈 여백의 종이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그리는가. 혹은 누군가를 모방하고 있는가.
부모님과 차를 타고 시골길로 향하던 어느 날이었다. 창문을 내리고 쌩쌩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며 "좋다. 소풍 가는 것 같아" 말했을 때, 엄마는 내게 답했다. "소윤아, 인생 자체가 소풍이야. 엄마도 너도 이 세상에 소풍 왔다가 가는 거야." 그렇다. 인생은 소풍이다. 이 문장 아래에는 이 소풍이 끝날 무렵, 참 좋은 소풍이었노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좋은 인생이었다는 뜻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 어머니의 말처럼 인생은 아주 긴 소풍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여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은 낯선 곳을 향해 떠나는 일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지도를 본다. 어느 도시로 갈 것인지, 어떤 길을 거칠 것인지, 위험한 것은 없는지, 그곳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지도에 길이 그려져 있다면, 우리는 안심한다. 길이 있다는 것은 그곳에 나보다 앞서 누군가가 걸어갔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인생에서도 지도를 찾는 모양이다. 길이 그려져 있는 지도를 손에 쥐면 안심한다. 누군가가 길을 걷고, 이 길이 정답입니다. 이 길대로 걷는다면 당신도 성공이라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외치면, 그 길을 따라간다. 누군가가 미리 그려놓은 그 길이 절대 틀리지 않을 거라 믿으면서.
인생은 여행이다. 그러나 인생의 지도는 여행의 지도와 다르다. 인생에서 펼쳐 든 지도에는 끝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길이 끊기고 이정표가 사라진 자리를 마주한다. 지도에 물음표만 그려져 있을 뿐, 무엇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영역. 이 영역 앞에서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의 지도를 찾는다. 누군가는 이 미지의 영역을 다녀오지 않았을까 기대하면서. 나 대신 위험한 것을 먼저 겪어보지 않았을까 희망하면서.
그러나 15세기 유럽의 어떤 지도 제작자들은, 그 미지의 영역에 무언가를 그렸다. 오늘은 그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다.
15세기와 16세기, 유럽의 항해사들은 새로운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망망대해를 향해 힘차게 나아갔지만, 그들이 손에 쥔 지도에는 빈 공간이 많았다. 가본 적 없는 바다, 들어본 적도 없는 대륙, 누구도 살아 돌아온 적 없는 영역. 경험한 것보다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훨씬 많았다. 그들이 마주하는 세계의 대부분이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지도 제작자들은 그 빈자리에 무엇이라도 그려야 했다. 빈 종이는 항해사를 더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공백이 아니던가. 길이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자리에 용을 그렸다.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또 다른 두려움을 그렸다. 뱀의 몸에 날개가 달린 거대한 짐승. 거센 파도 사이로 솟구치는 바다 괴물. 어떤 지도에는 입을 벌린 거대한 뱀이 그려졌고, 어떤 지도에는 배를 통째로 삼키는 괴물이 그려졌다. 괴물의 생김새 눈에 그려볼수록 괴물의 존재는 두렵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그 두려움은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나은 두려움이었다. 16세기 초에 만들어진 작은 구리 지구본 (사람들이 헌트-레녹스 지구본이라 부르는) 의 동쪽 아시아 해안에는 라틴어로 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마치 지구본에 문신을 하듯 새겨넣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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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5, 2026
여기에 용이 있다
지도가 끝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남의 정답을 베껴 넣는가 아니면 우리만의 용을 그리는가?
After Soyoon
빈 여백의 종이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그리는가. 혹은 누군가를 모방하고 있는가.
부모님과 차를 타고 시골길로 향하던 어느 날이었다. 창문을 내리고 쌩쌩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며 "좋다. 소풍 가는 것 같아" 말했을 때, 엄마는 내게 답했다. "소윤아, 인생 자체가 소풍이야. 엄마도 너도 이 세상에 소풍 왔다가 가는 거야." 그렇다. 인생은 소풍이다. 이 문장 아래에는 이 소풍이 끝날 무렵, 참 좋은 소풍이었노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좋은 인생이었다는 뜻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 어머니의 말처럼 인생은 아주 긴 소풍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여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은 낯선 곳을 향해 떠나는 일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지도를 본다. 어느 도시로 갈 것인지, 어떤 길을 거칠 것인지, 위험한 것은 없는지, 그곳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지도에 길이 그려져 있다면, 우리는 안심한다. 길이 있다는 것은 그곳에 나보다 앞서 누군가가 걸어갔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인생에서도 지도를 찾는 모양이다. 길이 그려져 있는 지도를 손에 쥐면 안심한다. 누군가가 길을 걷고, 이 길이 정답입니다. 이 길대로 걷는다면 당신도 성공이라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외치면, 그 길을 따라간다. 누군가가 미리 그려놓은 그 길이 절대 틀리지 않을 거라 믿으면서.
인생은 여행이다. 그러나 인생의 지도는 여행의 지도와 다르다. 인생에서 펼쳐 든 지도에는 끝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길이 끊기고 이정표가 사라진 자리를 마주한다. 지도에 물음표만 그려져 있을 뿐, 무엇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영역. 이 영역 앞에서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의 지도를 찾는다. 누군가는 이 미지의 영역을 다녀오지 않았을까 기대하면서. 나 대신 위험한 것을 먼저 겪어보지 않았을까 희망하면서.
그러나 15세기 유럽의 어떤 지도 제작자들은, 그 미지의 영역에 무언가를 그렸다. 오늘은 그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다.
15세기와 16세기, 유럽의 항해사들은 새로운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망망대해를 향해 힘차게 나아갔지만, 그들이 손에 쥔 지도에는 빈 공간이 많았다. 가본 적 없는 바다, 들어본 적도 없는 대륙, 누구도 살아 돌아온 적 없는 영역. 경험한 것보다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훨씬 많았다. 그들이 마주하는 세계의 대부분이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지도 제작자들은 그 빈자리에 무엇이라도 그려야 했다. 빈 종이는 항해사를 더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공백이 아니던가. 길이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자리에 용을 그렸다.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또 다른 두려움을 그렸다. 뱀의 몸에 날개가 달린 거대한 짐승. 거센 파도 사이로 솟구치는 바다 괴물. 어떤 지도에는 입을 벌린 거대한 뱀이 그려졌고, 어떤 지도에는 배를 통째로 삼키는 괴물이 그려졌다. 괴물의 생김새 눈에 그려볼수록 괴물의 존재는 두렵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그 두려움은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나은 두려움이었다. 16세기 초에 만들어진 작은 구리 지구본 (사람들이 헌트-레녹스 지구본이라 부르는) 의 동쪽 아시아 해안에는 라틴어로 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마치 지구본에 문신을 하듯 새겨넣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Hic sunt dracones.여기에 용이 있다.The Hunt–Lenox Globe, c. 1510. New York Public Library.
나는 그들이 왜 지도에 용을 그렸을지 상상해 본다. 용을 그리는 행위의 이면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용이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믿었을까.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잊고자 했을까. 사실, 그곳에 상상의 동물인 용은 없지 않은가. 그저 가보지 못한 바다와 발견한 적 없는 대륙이 있을 뿐인 그곳에 왜. 왜 그들은 용을 그렸을까. 지도를 들여다보며 곱씹어볼수록 나는 한 가지의 생각에 도달한다. 어쩌면 용을 그린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일'일 수 있겠구나. 우리가 경험한 세계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정확하게 구분 짓는 일이구나.
지도의 가장자리, 미지의 영역에 용을 그리는 일. 존재하지 않은 것을 그려내는 그 일은 거짓을 말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말하는 일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세계입니다. 나는 그 너머는 모릅니다. 다만,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정직하게 나의 무지, 우리의 무지를 고백하는 일. 그리고 그 무지와 미지 앞에 경고를 덧붙이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지 앞에 항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지의 고백은 앎의 윤곽이 선명한 자의 특권이다.
정말 무지한 사람은 누구인가? 빈 종이를 그대로 두지 못하는 사람이다. 미지를 견디지 못하고 무지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남이 그려준 정답을 그대로 베껴 그 영역을 채워놓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자신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미지'가 아니라, 미지를 '미지로 둘 줄 모르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영영 알지 못한다. 그러고는 미지의 영역에 용을 그리는 사람을 향해 비웃음을 보내곤 한다. 나는 그곳에 채울 것이 있어. 나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 오만하게 착각하면서.
미지의 영역에 용을 그리는 사람은 형체를 부여함으로써 '이곳에서부터 미지의 세계가 시작됩니다.'라는 경계를 새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경계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모름과 앎의 경계가 분명하게 구분 지어졌을 때, 그때부터 모름을 넘어서 앎을 향한 새로운 항해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빈 종이는 누구도 초대하지 못한다. 거짓으로 채워진 자리는 잘못된 항로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그려진 한 마리의 용은 항해의 시작점이 된다.
용이 그려진 그 자리에 미지의 세계가 있다. 그 미지는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이것을 직시하게 될 때, 비로소 새로운 항해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단지 아주 먼 옛날 항해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인생이 각자의 여행이듯, 우리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듯 삶을 살아내고 있지 않은가. 살면서 우리는 반드시, 나의 바다에 더 이상 길이 없는, 지도가 끝이 나는 지점에 도착한다. 누구도 다녀온 적 없고, 오직 나만이 도착한 자리.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나 혼자 놓여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자리. 지도가 끝이 난 그 자리에서,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나는 이 자리에 무엇을 그릴 것인가.
서른 살, 활짝 피어날 줄 알았던 30대의 시작에서 나는 암 판정을 받았다. 암과 더불어 맞이한 것들은 들어본 적도 없는 단어들,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시간들, 상상도 못 했던 고통들이었다. 단테의 신곡 <지옥>의 지옥문에 이런 문장이 적혀있다고 하지 않은가. "여기에 들어오는 자여,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내게 쏟아지는 그 모든 단어와 시간들과 고통들이 내가 걷게 될 이곳이 지옥임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곳은 지옥이 아닐 거라고, 희망을 품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안 좋은 소식들만 들려왔다.
일반 환자들 수준의 암이 아니다. 대수술이라고 생각하자. 암이 너무 크다. 전이도 심하다. 성대 신경까지 침범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예후가 좋지 않을 것이다. 등등 지금 다시 적으면서도 그때 내게 펼쳐졌던 지옥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말들과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렇다. 그때 내가 맞이한 모든 상황과 경험들은 그야말로 성난 파도와 같았고, 암흑으로 둘러싸인 대지와 같았다. 내가 평생 펼쳐두고 의지했던 내 인생의 지도가 끝나는 지점이 바로 그 지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꿈꿔온 나의 서른은 인생의 지도가 가장 또렷해야 할 나이였다. 해야 할 것이 명확하고, 갖춰야 할 것이 명확하고, 가진 것도 명확한 그런 나이였다. 일을 하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차를 타고, 집을 사고. 모두가 각자의 지도를 쥐고 잘 살아가는 것 같은데, 왜 나의 지도만 이렇게 끝이 났을까. 왜 내 지도에는 모든 길이 끊긴 걸까. 왜 나만 이 지옥문 앞에 떨어졌을까. 익숙한 이정표는 모두 사라지고, 나는 나의 천국들도 잊은 채, 내 앞에 펼쳐진 미지의 세계만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낮에는 그럭저럭 버텨냈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내 마음에도 어둠이 일렁였다. 그러면 나는 휴대폰을 쥐고 검색을 시작했다. 갑상선암 생존율. 갑상선 전절제 후기. 림프 전이 회복기. 수술 후 흉터 사진. 성대 신경 침범 사례 및 회복 사례. 수많은 사람의 후기를 보았다. 내 휴대폰 화면에는 누군가가 미리 그려둔 지도들이 가득했다.
어떤 사람은 1년 만에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너무 피곤해 직장에서 해고되었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평생 호르몬제를 먹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불쌍하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수술 후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말했으나 또 어떤 사람은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카페 후기, 블로그 글, 유튜브 영상. 나는 모든 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지도를 샅샅이 뒤졌다.
내가 다른 이들의 지도를 그렇게 열심히 찾은 이유는 그 지도들을 손에 쥐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도 견뎠으니 나도 견딜 수 있을 거야. 이 사람의 결과가 좋았으니 나도 좋을 거야. 하는 생각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 지도들은 나의 지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몸과 나의 몸은 달랐고, 그들이 통과한 시간과 내가 통과해야 할 시간이 달랐다. 결국 내가 모두 직접 경험해서 깨달을 수밖에 없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미지의 영역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검색을 멈췄다. 다른 이들의 지도를 나의 지도로 착각하는 일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는 용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니, 용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적었다. 목소리가 돌아올지, 돌아오지 않을지 나는 모른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지, 서지 못할지 나는 모른다. 평생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어야 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나는 모른다. 5년 후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미지의 영역에 분명하게 용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떤 용에게는 두려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어떤 용에게는 멸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으며, 어떤 용은 슬픔이라고 불렀다.
미지의 영역에 용을 그리고 그 용에게 이름 붙이고 나니, 오히려 모든 게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옥의 형태가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마이크를 쥐고 해왔던 일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었다면, 이제는 '슬픔을 덜어내는 일'을 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가 예전처럼 나오지 못한다면, 예전처럼 쾌활하고 명랑하고 강하게 진행하지 못한다면, 내 목소리의 밀도가 밖을 향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이제 안으로 향해야겠구나. 넓어지지 못한다면 깊어지리라. 밝은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둠을 감싸리라. 이런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끝이 나는 지점이 말 그대로 새로운 시작이 되는 지점이 되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지도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면. 그래서 지난날의 내가 그러했듯 남의 지도가 나의 지도가 되기를 간절히 원할수록 희망을 잃게 되고 지옥을 서성이는 것 같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지도의 가장자리에서 끝나는 지점을 만났다는 것은 길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지점은 당신이 알고 있었던 세계의 끝에 불과하다. 그리고 당신이 무지와 미지의 세계를 향해 한 발을 내디딘다면, 그 세계는 끝나는 지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지점이 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평생 빌려온 지도를 손에 쥐고 살아간다. 사실, 사회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주었다. 남의 지도를 빌리며 사는 게 가장 좋은 항해라고. 그게 가장 안전한 방식의 여행이라고. 그렇게 우리는 부모님이 그려준 지도. 학교가 그려준 지도. 사회가 그려준 지도. 남에게 빌린 지도를 쥐고 산다.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집을 가지고, 좋은 부모가 되는 길. 그 길은 너무나 안정적이고 모두가 추구하는 길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내 지도에도 있는 나의 길. 내가 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착각하며 따라간다.
그러나 빌려온 지도는 끝내 자신의 지도가 되지 못한다. 지도는 누군가가 걸어간 길의 기록에 불과하며, 그 길은 그 사람의 두 발이 축적한 발자국일 뿐이다. 다른 이가 걸어간 길이 나의 길일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의 발자국과 내 발자국은 맞지 않는다. 그 길이 누구에게는 정답이었을지 모르겠으나,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흔적일 뿐이다. 물론, 빌려온 지도가 통하는 길들이 분명 있다. 다른 사람의 길과 나의 길이 우연히 맞았던, 지나치게 많이 맞았던 순간도 존재한다. 그런 길에서 우리는 그 길이 자신의 길인지 다른 이의 길인지 의심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지도가 끝나는 지점이 분명 우리에게 온다.
사랑이 떠난다. 병이 찾아온다. 회사가 사라진다. 정답이라 믿었던 것이 오답이 되는 순간은 모두에게 주어진다. 그제야 우리는 알게 된다. 이 지도는 내 것이 아니었구나. 끝에 서 보아야, 비로소 자기 손에 들린 것이 나의 지도였는지, 남의 지도였는지, 혹은 지도조차 아닌 무언가였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지도의 끝지점을 맞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앞서 내가 말한 비유처럼 사실은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지옥에 들어선 것과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는 황급히 다른 이의 발자국을 찾는다.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또 빌려 올 수 있는 다른 이의 지도는 없는지 황급하게 찾는 것이다. 다른 이의 지도를 손에 쥐면 다시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채워진 자리는, 끝나는 지점을 유예시킬 뿐이다. 다른 이의 지도가 나의 지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중세의 지도 제작자들이 그린 용은 두려움의 표시로만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두려움의 용들은 시간이 흐르며, 다음 항해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기에 용이 있다"라고 적어둔 자리는 후대 항해사들의 목적지가 되었다. 그들이 그곳에 도착하면 용은 지워졌다. 그리고 도착하지 못한 지점에 새로운 용이 그려졌다. 그렇게 조금씩 용이었던 것들은 해안선이 되었다. 용이었던 것들은 새로운 섬이 되었다. 용이었던 것들은 새로운 바다와 대륙이 되었다.
나의 용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 글을 쓰며 내가 이름 붙인 용들을 떠올려본다.성대 신경을 최대한 살려두었으니, 목소리가 돌아올지 모릅니다. 이 용이 그려진 지도를 향해 나는 일 년간의 항해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작은 소리를 내보던 시간. 가장 옅은 소리로 '음' 소리를 내며 허밍 하던 시간. 하나. 둘. 셋. 한글과 숫자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옹알이하듯 정성스레 음을 뱉던 시간. 어떤 날은 소리가 나고 어떤 날은 나지 않았다. 어떤 날은 희망이 나를 반겼고 어떤 날은 절망이 나를 덮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항해는 중단되지 않았다. 아니, 중단할 수 없었다. 그 시간들은 내가 직접 개척해야만 하는 나의 미지의 세계였다. 내가 경험해야만 용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다시 그려낼 수 있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을 때, 성대마비라고 이름 지었던 용 한 마리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오늘도 나는 '목소리가 잘 안 나오네. 3시간 이상 말하는 건 어려운 것 같네….'라고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일 아침 발성 연습과 재활 훈련을 시작할 것이다. 더 단단해진 목소리라는 새로운 대륙을 찾을 때까지 항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나의 지도는 지금도 날마다 새로이 그려지는 중이다. 고백하자면, 어떤 자리에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용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어떤 자리에는 용의 형체는 희미해지고 해안선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 섬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후의 삶이 어떤 것일지, 나는 여전히 모른다. 내일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는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끝의 자리에 용을 그리는 일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도는 끝나는 지점을 새로운 시작의 지점으로 만들 때,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의 지도는 지금, 어디까지 그려져 있는가. 당신의 지도 가장자리에는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 혹은 어떤 말이 적혀 있는가. 그 그림은 누군가에게 빌려온 정답인가, 아니면 당신만의 용인가.
이 글은 당신의 지도를 확장시켜줄 수 없다. 누구도 당신의 지도를 대신 확장해 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적으며 아주 간절히 소망한다. 이 글이 부디, 당신의 지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당신이 용을 그릴 수 있는 용기가 되기를. 당신이 지도의 끝을, 지도가 새로이 확장되는 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기를.
Hic sunt dracones.여기에 용이 있다.
Hic sunt dracones.여기에 용이 있다.
The Hunt–Lenox Globe, c. 1510. New York Public Library.
The Hunt–Lenox Globe, c. 1510. New York Public Library.
나는 그들이 왜 지도에 용을 그렸을지 상상해 본다. 용을 그리는 행위의 이면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용이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믿었을까.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잊고자 했을까. 사실, 그곳에 상상의 동물인 용은 없지 않은가. 그저 가보지 못한 바다와 발견한 적 없는 대륙이 있을 뿐인 그곳에 왜. 왜 그들은 용을 그렸을까. 지도를 들여다보며 곱씹어볼수록 나는 한 가지의 생각에 도달한다. 어쩌면 용을 그린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일'일 수 있겠구나. 우리가 경험한 세계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정확하게 구분 짓는 일이구나.
나는 그들이 왜 지도에 용을 그렸을지 상상해 본다. 용을 그리는 행위의 이면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용이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믿었을까.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잊고자 했을까. 사실, 그곳에 상상의 동물인 용은 없지 않은가. 그저 가보지 못한 바다와 발견한 적 없는 대륙이 있을 뿐인 그곳에 왜. 왜 그들은 용을 그렸을까. 지도를 들여다보며 곱씹어볼수록 나는 한 가지의 생각에 도달한다. 어쩌면 용을 그린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일'일 수 있겠구나. 우리가 경험한 세계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정확하게 구분 짓는 일이구나.
지도의 가장자리, 미지의 영역에 용을 그리는 일. 존재하지 않은 것을 그려내는 그 일은 거짓을 말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말하는 일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세계입니다. 나는 그 너머는 모릅니다. 다만,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정직하게 나의 무지, 우리의 무지를 고백하는 일. 그리고 그 무지와 미지 앞에 경고를 덧붙이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지 앞에 항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지의 고백은 앎의 윤곽이 선명한 자의 특권이다.
지도의 가장자리, 미지의 영역에 용을 그리는 일. 존재하지 않은 것을 그려내는 그 일은 거짓을 말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말하는 일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세계입니다. 나는 그 너머는 모릅니다. 다만,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정직하게 나의 무지, 우리의 무지를 고백하는 일. 그리고 그 무지와 미지 앞에 경고를 덧붙이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지 앞에 항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지의 고백은 앎의 윤곽이 선명한 자의 특권이다.
정말 무지한 사람은 누구인가? 빈 종이를 그대로 두지 못하는 사람이다. 미지를 견디지 못하고 무지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남이 그려준 정답을 그대로 베껴 그 영역을 채워놓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자신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미지'가 아니라, 미지를 '미지로 둘 줄 모르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영영 알지 못한다. 그러고는 미지의 영역에 용을 그리는 사람을 향해 비웃음을 보내곤 한다. 나는 그곳에 채울 것이 있어. 나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 오만하게 착각하면서.
정말 무지한 사람은 누구인가? 빈 종이를 그대로 두지 못하는 사람이다. 미지를 견디지 못하고 무지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남이 그려준 정답을 그대로 베껴 그 영역을 채워놓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자신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미지'가 아니라, 미지를 '미지로 둘 줄 모르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영영 알지 못한다. 그러고는 미지의 영역에 용을 그리는 사람을 향해 비웃음을 보내곤 한다. 나는 그곳에 채울 것이 있어. 나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 오만하게 착각하면서.
미지의 영역에 용을 그리는 사람은 형체를 부여함으로써 '이곳에서부터 미지의 세계가 시작됩니다.'라는 경계를 새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경계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모름과 앎의 경계가 분명하게 구분 지어졌을 때, 그때부터 모름을 넘어서 앎을 향한 새로운 항해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빈 종이는 누구도 초대하지 못한다. 거짓으로 채워진 자리는 잘못된 항로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그려진 한 마리의 용은 항해의 시작점이 된다.
미지의 영역에 용을 그리는 사람은 형체를 부여함으로써 '이곳에서부터 미지의 세계가 시작됩니다.'라는 경계를 새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경계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모름과 앎의 경계가 분명하게 구분 지어졌을 때, 그때부터 모름을 넘어서 앎을 향한 새로운 항해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빈 종이는 누구도 초대하지 못한다. 거짓으로 채워진 자리는 잘못된 항로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그려진 한 마리의 용은 항해의 시작점이 된다.
용이 그려진 그 자리에 미지의 세계가 있다. 그 미지는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이것을 직시하게 될 때, 비로소 새로운 항해가 시작된다.
용이 그려진 그 자리에 미지의 세계가 있다. 그 미지는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이것을 직시하게 될 때, 비로소 새로운 항해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단지 아주 먼 옛날 항해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인생이 각자의 여행이듯, 우리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듯 삶을 살아내고 있지 않은가. 살면서 우리는 반드시, 나의 바다에 더 이상 길이 없는, 지도가 끝이 나는 지점에 도착한다. 누구도 다녀온 적 없고, 오직 나만이 도착한 자리.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나 혼자 놓여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자리. 지도가 끝이 난 그 자리에서,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단지 아주 먼 옛날 항해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인생이 각자의 여행이듯, 우리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듯 삶을 살아내고 있지 않은가. 살면서 우리는 반드시, 나의 바다에 더 이상 길이 없는, 지도가 끝이 나는 지점에 도착한다. 누구도 다녀온 적 없고, 오직 나만이 도착한 자리.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나 혼자 놓여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자리. 지도가 끝이 난 그 자리에서,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나는 이 자리에 무엇을 그릴 것인가.
나는 이 자리에 무엇을 그릴 것인가.
서른 살, 활짝 피어날 줄 알았던 30대의 시작에서 나는 암 판정을 받았다. 암과 더불어 맞이한 것들은 들어본 적도 없는 단어들,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시간들, 상상도 못 했던 고통들이었다. 단테의 신곡 <지옥>의 지옥문에 이런 문장이 적혀있다고 하지 않은가. "여기에 들어오는 자여,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내게 쏟아지는 그 모든 단어와 시간들과 고통들이 내가 걷게 될 이곳이 지옥임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곳은 지옥이 아닐 거라고, 희망을 품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안 좋은 소식들만 들려왔다.
서른 살, 활짝 피어날 줄 알았던 30대의 시작에서 나는 암 판정을 받았다. 암과 더불어 맞이한 것들은 들어본 적도 없는 단어들,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시간들, 상상도 못 했던 고통들이었다. 단테의 신곡 <지옥>의 지옥문에 이런 문장이 적혀있다고 하지 않은가. "여기에 들어오는 자여,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내게 쏟아지는 그 모든 단어와 시간들과 고통들이 내가 걷게 될 이곳이 지옥임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곳은 지옥이 아닐 거라고, 희망을 품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안 좋은 소식들만 들려왔다.
일반 환자들 수준의 암이 아니다. 대수술이라고 생각하자. 암이 너무 크다. 전이도 심하다. 성대 신경까지 침범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예후가 좋지 않을 것이다. 등등 지금 다시 적으면서도 그때 내게 펼쳐졌던 지옥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말들과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렇다. 그때 내가 맞이한 모든 상황과 경험들은 그야말로 성난 파도와 같았고, 암흑으로 둘러싸인 대지와 같았다. 내가 평생 펼쳐두고 의지했던 내 인생의 지도가 끝나는 지점이 바로 그 지점이었다.
일반 환자들 수준의 암이 아니다. 대수술이라고 생각하자. 암이 너무 크다. 전이도 심하다. 성대 신경까지 침범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예후가 좋지 않을 것이다. 등등 지금 다시 적으면서도 그때 내게 펼쳐졌던 지옥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말들과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렇다. 그때 내가 맞이한 모든 상황과 경험들은 그야말로 성난 파도와 같았고, 암흑으로 둘러싸인 대지와 같았다. 내가 평생 펼쳐두고 의지했던 내 인생의 지도가 끝나는 지점이 바로 그 지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꿈꿔온 나의 서른은 인생의 지도가 가장 또렷해야 할 나이였다. 해야 할 것이 명확하고, 갖춰야 할 것이 명확하고, 가진 것도 명확한 그런 나이였다. 일을 하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차를 타고, 집을 사고. 모두가 각자의 지도를 쥐고 잘 살아가는 것 같은데, 왜 나의 지도만 이렇게 끝이 났을까. 왜 내 지도에는 모든 길이 끊긴 걸까. 왜 나만 이 지옥문 앞에 떨어졌을까. 익숙한 이정표는 모두 사라지고, 나는 나의 천국들도 잊은 채, 내 앞에 펼쳐진 미지의 세계만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꿈꿔온 나의 서른은 인생의 지도가 가장 또렷해야 할 나이였다. 해야 할 것이 명확하고, 갖춰야 할 것이 명확하고, 가진 것도 명확한 그런 나이였다. 일을 하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차를 타고, 집을 사고. 모두가 각자의 지도를 쥐고 잘 살아가는 것 같은데, 왜 나의 지도만 이렇게 끝이 났을까. 왜 내 지도에는 모든 길이 끊긴 걸까. 왜 나만 이 지옥문 앞에 떨어졌을까. 익숙한 이정표는 모두 사라지고, 나는 나의 천국들도 잊은 채, 내 앞에 펼쳐진 미지의 세계만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낮에는 그럭저럭 버텨냈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내 마음에도 어둠이 일렁였다. 그러면 나는 휴대폰을 쥐고 검색을 시작했다. 갑상선암 생존율. 갑상선 전절제 후기. 림프 전이 회복기. 수술 후 흉터 사진. 성대 신경 침범 사례 및 회복 사례. 수많은 사람의 후기를 보았다. 내 휴대폰 화면에는 누군가가 미리 그려둔 지도들이 가득했다.
낮에는 그럭저럭 버텨냈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내 마음에도 어둠이 일렁였다. 그러면 나는 휴대폰을 쥐고 검색을 시작했다. 갑상선암 생존율. 갑상선 전절제 후기. 림프 전이 회복기. 수술 후 흉터 사진. 성대 신경 침범 사례 및 회복 사례. 수많은 사람의 후기를 보았다. 내 휴대폰 화면에는 누군가가 미리 그려둔 지도들이 가득했다.
어떤 사람은 1년 만에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너무 피곤해 직장에서 해고되었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평생 호르몬제를 먹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불쌍하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수술 후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말했으나 또 어떤 사람은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카페 후기, 블로그 글, 유튜브 영상. 나는 모든 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지도를 샅샅이 뒤졌다.
어떤 사람은 1년 만에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너무 피곤해 직장에서 해고되었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평생 호르몬제를 먹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불쌍하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수술 후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말했으나 또 어떤 사람은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카페 후기, 블로그 글, 유튜브 영상. 나는 모든 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지도를 샅샅이 뒤졌다.
내가 다른 이들의 지도를 그렇게 열심히 찾은 이유는 그 지도들을 손에 쥐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도 견뎠으니 나도 견딜 수 있을 거야. 이 사람의 결과가 좋았으니 나도 좋을 거야. 하는 생각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 지도들은 나의 지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몸과 나의 몸은 달랐고, 그들이 통과한 시간과 내가 통과해야 할 시간이 달랐다. 결국 내가 모두 직접 경험해서 깨달을 수밖에 없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미지의 영역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검색을 멈췄다. 다른 이들의 지도를 나의 지도로 착각하는 일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는 용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니, 용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내가 다른 이들의 지도를 그렇게 열심히 찾은 이유는 그 지도들을 손에 쥐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도 견뎠으니 나도 견딜 수 있을 거야. 이 사람의 결과가 좋았으니 나도 좋을 거야. 하는 생각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 지도들은 나의 지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몸과 나의 몸은 달랐고, 그들이 통과한 시간과 내가 통과해야 할 시간이 달랐다. 결국 내가 모두 직접 경험해서 깨달을 수밖에 없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미지의 영역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검색을 멈췄다. 다른 이들의 지도를 나의 지도로 착각하는 일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는 용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니, 용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적었다. 목소리가 돌아올지, 돌아오지 않을지 나는 모른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지, 서지 못할지 나는 모른다. 평생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어야 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나는 모른다. 5년 후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미지의 영역에 분명하게 용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떤 용에게는 두려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어떤 용에게는 멸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으며, 어떤 용은 슬픔이라고 불렀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적었다. 목소리가 돌아올지, 돌아오지 않을지 나는 모른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지, 서지 못할지 나는 모른다. 평생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어야 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나는 모른다. 5년 후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미지의 영역에 분명하게 용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떤 용에게는 두려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어떤 용에게는 멸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으며, 어떤 용은 슬픔이라고 불렀다.
미지의 영역에 용을 그리고 그 용에게 이름 붙이고 나니, 오히려 모든 게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옥의 형태가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마이크를 쥐고 해왔던 일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었다면, 이제는 '슬픔을 덜어내는 일'을 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가 예전처럼 나오지 못한다면, 예전처럼 쾌활하고 명랑하고 강하게 진행하지 못한다면, 내 목소리의 밀도가 밖을 향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이제 안으로 향해야겠구나. 넓어지지 못한다면 깊어지리라. 밝은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둠을 감싸리라. 이런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끝이 나는 지점이 말 그대로 새로운 시작이 되는 지점이 되었다.
미지의 영역에 용을 그리고 그 용에게 이름 붙이고 나니, 오히려 모든 게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옥의 형태가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마이크를 쥐고 해왔던 일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었다면, 이제는 '슬픔을 덜어내는 일'을 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가 예전처럼 나오지 못한다면, 예전처럼 쾌활하고 명랑하고 강하게 진행하지 못한다면, 내 목소리의 밀도가 밖을 향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이제 안으로 향해야겠구나. 넓어지지 못한다면 깊어지리라. 밝은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둠을 감싸리라. 이런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끝이 나는 지점이 말 그대로 새로운 시작이 되는 지점이 되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지도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면. 그래서 지난날의 내가 그러했듯 남의 지도가 나의 지도가 되기를 간절히 원할수록 희망을 잃게 되고 지옥을 서성이는 것 같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지도의 가장자리에서 끝나는 지점을 만났다는 것은 길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지점은 당신이 알고 있었던 세계의 끝에 불과하다. 그리고 당신이 무지와 미지의 세계를 향해 한 발을 내디딘다면, 그 세계는 끝나는 지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지점이 될 수 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지도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면. 그래서 지난날의 내가 그러했듯 남의 지도가 나의 지도가 되기를 간절히 원할수록 희망을 잃게 되고 지옥을 서성이는 것 같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지도의 가장자리에서 끝나는 지점을 만났다는 것은 길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지점은 당신이 알고 있었던 세계의 끝에 불과하다. 그리고 당신이 무지와 미지의 세계를 향해 한 발을 내디딘다면, 그 세계는 끝나는 지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지점이 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평생 빌려온 지도를 손에 쥐고 살아간다. 사실, 사회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주었다. 남의 지도를 빌리며 사는 게 가장 좋은 항해라고. 그게 가장 안전한 방식의 여행이라고. 그렇게 우리는 부모님이 그려준 지도. 학교가 그려준 지도. 사회가 그려준 지도. 남에게 빌린 지도를 쥐고 산다.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집을 가지고, 좋은 부모가 되는 길. 그 길은 너무나 안정적이고 모두가 추구하는 길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내 지도에도 있는 나의 길. 내가 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착각하며 따라간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평생 빌려온 지도를 손에 쥐고 살아간다. 사실, 사회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주었다. 남의 지도를 빌리며 사는 게 가장 좋은 항해라고. 그게 가장 안전한 방식의 여행이라고. 그렇게 우리는 부모님이 그려준 지도. 학교가 그려준 지도. 사회가 그려준 지도. 남에게 빌린 지도를 쥐고 산다.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집을 가지고, 좋은 부모가 되는 길. 그 길은 너무나 안정적이고 모두가 추구하는 길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내 지도에도 있는 나의 길. 내가 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착각하며 따라간다.
그러나 빌려온 지도는 끝내 자신의 지도가 되지 못한다. 지도는 누군가가 걸어간 길의 기록에 불과하며, 그 길은 그 사람의 두 발이 축적한 발자국일 뿐이다. 다른 이가 걸어간 길이 나의 길일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의 발자국과 내 발자국은 맞지 않는다. 그 길이 누구에게는 정답이었을지 모르겠으나,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흔적일 뿐이다. 물론, 빌려온 지도가 통하는 길들이 분명 있다. 다른 사람의 길과 나의 길이 우연히 맞았던, 지나치게 많이 맞았던 순간도 존재한다. 그런 길에서 우리는 그 길이 자신의 길인지 다른 이의 길인지 의심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지도가 끝나는 지점이 분명 우리에게 온다.
그러나 빌려온 지도는 끝내 자신의 지도가 되지 못한다. 지도는 누군가가 걸어간 길의 기록에 불과하며, 그 길은 그 사람의 두 발이 축적한 발자국일 뿐이다. 다른 이가 걸어간 길이 나의 길일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의 발자국과 내 발자국은 맞지 않는다. 그 길이 누구에게는 정답이었을지 모르겠으나,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흔적일 뿐이다. 물론, 빌려온 지도가 통하는 길들이 분명 있다. 다른 사람의 길과 나의 길이 우연히 맞았던, 지나치게 많이 맞았던 순간도 존재한다. 그런 길에서 우리는 그 길이 자신의 길인지 다른 이의 길인지 의심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지도가 끝나는 지점이 분명 우리에게 온다.
사랑이 떠난다. 병이 찾아온다. 회사가 사라진다. 정답이라 믿었던 것이 오답이 되는 순간은 모두에게 주어진다. 그제야 우리는 알게 된다. 이 지도는 내 것이 아니었구나. 끝에 서 보아야, 비로소 자기 손에 들린 것이 나의 지도였는지, 남의 지도였는지, 혹은 지도조차 아닌 무언가였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 떠난다. 병이 찾아온다. 회사가 사라진다. 정답이라 믿었던 것이 오답이 되는 순간은 모두에게 주어진다. 그제야 우리는 알게 된다. 이 지도는 내 것이 아니었구나. 끝에 서 보아야, 비로소 자기 손에 들린 것이 나의 지도였는지, 남의 지도였는지, 혹은 지도조차 아닌 무언가였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지도의 끝지점을 맞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앞서 내가 말한 비유처럼 사실은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지옥에 들어선 것과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는 황급히 다른 이의 발자국을 찾는다.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또 빌려 올 수 있는 다른 이의 지도는 없는지 황급하게 찾는 것이다. 다른 이의 지도를 손에 쥐면 다시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채워진 자리는, 끝나는 지점을 유예시킬 뿐이다. 다른 이의 지도가 나의 지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물론, 지도의 끝지점을 맞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앞서 내가 말한 비유처럼 사실은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지옥에 들어선 것과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는 황급히 다른 이의 발자국을 찾는다.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또 빌려 올 수 있는 다른 이의 지도는 없는지 황급하게 찾는 것이다. 다른 이의 지도를 손에 쥐면 다시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채워진 자리는, 끝나는 지점을 유예시킬 뿐이다. 다른 이의 지도가 나의 지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중세의 지도 제작자들이 그린 용은 두려움의 표시로만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두려움의 용들은 시간이 흐르며, 다음 항해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기에 용이 있다"라고 적어둔 자리는 후대 항해사들의 목적지가 되었다. 그들이 그곳에 도착하면 용은 지워졌다. 그리고 도착하지 못한 지점에 새로운 용이 그려졌다. 그렇게 조금씩 용이었던 것들은 해안선이 되었다. 용이었던 것들은 새로운 섬이 되었다. 용이었던 것들은 새로운 바다와 대륙이 되었다.
중세의 지도 제작자들이 그린 용은 두려움의 표시로만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두려움의 용들은 시간이 흐르며, 다음 항해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기에 용이 있다"라고 적어둔 자리는 후대 항해사들의 목적지가 되었다. 그들이 그곳에 도착하면 용은 지워졌다. 그리고 도착하지 못한 지점에 새로운 용이 그려졌다. 그렇게 조금씩 용이었던 것들은 해안선이 되었다. 용이었던 것들은 새로운 섬이 되었다. 용이었던 것들은 새로운 바다와 대륙이 되었다.
나의 용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 글을 쓰며 내가 이름 붙인 용들을 떠올려본다.성대 신경을 최대한 살려두었으니, 목소리가 돌아올지 모릅니다. 이 용이 그려진 지도를 향해 나는 일 년간의 항해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작은 소리를 내보던 시간. 가장 옅은 소리로 '음' 소리를 내며 허밍 하던 시간. 하나. 둘. 셋. 한글과 숫자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옹알이하듯 정성스레 음을 뱉던 시간. 어떤 날은 소리가 나고 어떤 날은 나지 않았다. 어떤 날은 희망이 나를 반겼고 어떤 날은 절망이 나를 덮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항해는 중단되지 않았다. 아니, 중단할 수 없었다. 그 시간들은 내가 직접 개척해야만 하는 나의 미지의 세계였다. 내가 경험해야만 용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다시 그려낼 수 있었다.
나의 용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 글을 쓰며 내가 이름 붙인 용들을 떠올려본다.성대 신경을 최대한 살려두었으니, 목소리가 돌아올지 모릅니다. 이 용이 그려진 지도를 향해 나는 일 년간의 항해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작은 소리를 내보던 시간. 가장 옅은 소리로 '음' 소리를 내며 허밍 하던 시간. 하나. 둘. 셋. 한글과 숫자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옹알이하듯 정성스레 음을 뱉던 시간. 어떤 날은 소리가 나고 어떤 날은 나지 않았다. 어떤 날은 희망이 나를 반겼고 어떤 날은 절망이 나를 덮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항해는 중단되지 않았다. 아니, 중단할 수 없었다. 그 시간들은 내가 직접 개척해야만 하는 나의 미지의 세계였다. 내가 경험해야만 용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다시 그려낼 수 있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을 때, 성대마비라고 이름 지었던 용 한 마리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오늘도 나는 '목소리가 잘 안 나오네. 3시간 이상 말하는 건 어려운 것 같네….'라고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일 아침 발성 연습과 재활 훈련을 시작할 것이다. 더 단단해진 목소리라는 새로운 대륙을 찾을 때까지 항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을 때, 성대마비라고 이름 지었던 용 한 마리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오늘도 나는 '목소리가 잘 안 나오네. 3시간 이상 말하는 건 어려운 것 같네….'라고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일 아침 발성 연습과 재활 훈련을 시작할 것이다. 더 단단해진 목소리라는 새로운 대륙을 찾을 때까지 항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나의 지도는 지금도 날마다 새로이 그려지는 중이다. 고백하자면, 어떤 자리에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용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어떤 자리에는 용의 형체는 희미해지고 해안선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 섬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후의 삶이 어떤 것일지, 나는 여전히 모른다. 내일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는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끝의 자리에 용을 그리는 일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도는 끝나는 지점을 새로운 시작의 지점으로 만들 때,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의 지도는 지금도 날마다 새로이 그려지는 중이다. 고백하자면, 어떤 자리에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용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어떤 자리에는 용의 형체는 희미해지고 해안선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 섬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후의 삶이 어떤 것일지, 나는 여전히 모른다. 내일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는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끝의 자리에 용을 그리는 일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도는 끝나는 지점을 새로운 시작의 지점으로 만들 때,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의 지도는 지금, 어디까지 그려져 있는가. 당신의 지도 가장자리에는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 혹은 어떤 말이 적혀 있는가. 그 그림은 누군가에게 빌려온 정답인가, 아니면 당신만의 용인가.
당신의 지도는 지금, 어디까지 그려져 있는가. 당신의 지도 가장자리에는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 혹은 어떤 말이 적혀 있는가. 그 그림은 누군가에게 빌려온 정답인가, 아니면 당신만의 용인가.
이 글은 당신의 지도를 확장시켜줄 수 없다. 누구도 당신의 지도를 대신 확장해 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적으며 아주 간절히 소망한다. 이 글이 부디, 당신의 지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당신이 용을 그릴 수 있는 용기가 되기를. 당신이 지도의 끝을, 지도가 새로이 확장되는 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기를.
이 글은 당신의 지도를 확장시켜줄 수 없다. 누구도 당신의 지도를 대신 확장해 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적으며 아주 간절히 소망한다. 이 글이 부디, 당신의 지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당신이 용을 그릴 수 있는 용기가 되기를. 당신이 지도의 끝을, 지도가 새로이 확장되는 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