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심어두었지만, 싹이 보이지 않고 시작했지만, 결과는 보이지 않으며 매일 들여다보아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시간. 우리는 그런 시간을 정체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이 시간을 허송세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정체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뒤처졌다는 느낌까지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자라는 것을 좋아한다. 매출이 자라고, 팔로워가 자라고, 계좌 잔고가 자라고, 스펙이 자라는 것. 자라는 것을 좋아하는 세상 속에서 자라지 않는 시간은 의심받는다. 다른 사람이 의심하기도 전에 나 스스로가 먼저 의심한다. 멈춘 게 아닐까. 잘못된 게 아닐까.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않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자리로 옮긴다. 새로 심고, 새로 시작하고, 새로 시도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옮겨 심은 자리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자라지 않는 시간이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그럼, 역시나 다시 옮긴다. 자라지 않는 시간을 의심하는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렇게 평생을 자라는 것만 쫓았으나 정작 삶에 자라난 것은 없는 삶은 황폐하다.
그래서 오늘은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의 이면에 있는 어떤 자람의 시간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모죽의 4년간의 여정으로 떠나보자.
대나무 중에는 모죽(毛竹) 이라는 종의 대나무가 있다. 대나무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품종으로 손꼽히는 모죽의 씨앗을 심은 자리에는 4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땅 위에서 그렇다. 비옥한 토양에 모죽의 씨앗을 심고 매일 물을 주어도 싹이 트지 않는다. 한 달이 가도 여전히 그대로다. 일 년이 가도 여전히 변화가 없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흙은 4년 전 모습 그대로다. 보이는 것이 없으니, 모죽을 심은 이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씨가 죽었나. 흙이 잘못됐나. 이렇게 매일 모죽을 돌보는 내가, 헛수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4년이 지나고 5년째가 되는 어느 봄, 모죽은 갑자기 솟아오른다. 변화가 없었던 지난날들은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는 듯 하루에 70cm씩 자라난다. 변화와 성장에 아주 오래 갈증을 느꼈던 것 마냥 쉬지 않고 매일 같이 자라난다. 그렇게 6주가 지나면, 25미터라는 거대한 높이의 대나무가 된다. 무려 아파트 10층의 높이의 나무가 6주 만에 자라난 것이다. 심지어 한두 그루가 아니다. 한 자리에 심은 모죽들은 같은 시기에 같은 속도로 솟아오른다. 마치 그 침묵의 4년 동안 서로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4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던 땅에서 솟아오른 한 무리의 나무들. 단 6주만의 일이다.
May 2, 2026
모죽의 4년
보이지 않는 시간이 허송세월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무엇을 향해 뿌리내리고 있는가?
01
자라지 않는 시간이 있다. 식물에게도, 사람에게도.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무언가를 심어두었지만, 싹이 보이지 않고 시작했지만, 결과는 보이지 않으며 매일 들여다보아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시간. 우리는 그런 시간을 정체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이 시간을 허송세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정체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뒤처졌다는 느낌까지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자라는 것을 좋아한다. 매출이 자라고, 팔로워가 자라고, 계좌 잔고가 자라고, 스펙이 자라는 것. 자라는 것을 좋아하는 세상 속에서 자라지 않는 시간은 의심받는다. 다른 사람이 의심하기도 전에 나 스스로가 먼저 의심한다. 멈춘 게 아닐까. 잘못된 게 아닐까.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않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자리로 옮긴다. 새로 심고, 새로 시작하고, 새로 시도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옮겨 심은 자리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자라지 않는 시간이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그럼, 역시나 다시 옮긴다. 자라지 않는 시간을 의심하는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렇게 평생을 자라는 것만 쫓았으나 정작 삶에 자라난 것은 없는 삶은 황폐하다.
그래서 오늘은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의 이면에 있는 어떤 자람의 시간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모죽의 4년간의 여정으로 떠나보자.
대나무 중에는 모죽(毛竹) 이라는 종의 대나무가 있다. 대나무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품종으로 손꼽히는 모죽의 씨앗을 심은 자리에는 4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땅 위에서 그렇다. 비옥한 토양에 모죽의 씨앗을 심고 매일 물을 주어도 싹이 트지 않는다. 한 달이 가도 여전히 그대로다. 일 년이 가도 여전히 변화가 없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흙은 4년 전 모습 그대로다. 보이는 것이 없으니, 모죽을 심은 이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씨가 죽었나. 흙이 잘못됐나. 이렇게 매일 모죽을 돌보는 내가, 헛수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4년이 지나고 5년째가 되는 어느 봄, 모죽은 갑자기 솟아오른다. 변화가 없었던 지난날들은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는 듯 하루에 70cm씩 자라난다. 변화와 성장에 아주 오래 갈증을 느꼈던 것 마냥 쉬지 않고 매일 같이 자라난다. 그렇게 6주가 지나면, 25미터라는 거대한 높이의 대나무가 된다. 무려 아파트 10층의 높이의 나무가 6주 만에 자라난 것이다. 심지어 한두 그루가 아니다. 한 자리에 심은 모죽들은 같은 시기에 같은 속도로 솟아오른다. 마치 그 침묵의 4년 동안 서로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4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던 땅에서 솟아오른 한 무리의 나무들. 단 6주만의 일이다.
02
Spread 01 / 01
May 2, 2026
모죽의 4년
보이지 않는 시간이 허송세월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무엇을 향해 뿌리내리고 있는가?
After Soyoon
자라지 않는 시간이 있다. 식물에게도, 사람에게도.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무언가를 심어두었지만, 싹이 보이지 않고 시작했지만, 결과는 보이지 않으며 매일 들여다보아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시간. 우리는 그런 시간을 정체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이 시간을 허송세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정체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뒤처졌다는 느낌까지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자라는 것을 좋아한다. 매출이 자라고, 팔로워가 자라고, 계좌 잔고가 자라고, 스펙이 자라는 것. 자라는 것을 좋아하는 세상 속에서 자라지 않는 시간은 의심받는다. 다른 사람이 의심하기도 전에 나 스스로가 먼저 의심한다. 멈춘 게 아닐까. 잘못된 게 아닐까.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않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자리로 옮긴다. 새로 심고, 새로 시작하고, 새로 시도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옮겨 심은 자리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자라지 않는 시간이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그럼, 역시나 다시 옮긴다. 자라지 않는 시간을 의심하는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렇게 평생을 자라는 것만 쫓았으나 정작 삶에 자라난 것은 없는 삶은 황폐하다.
그래서 오늘은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의 이면에 있는 어떤 자람의 시간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모죽의 4년간의 여정으로 떠나보자.
대나무 중에는 모죽(毛竹) 이라는 종의 대나무가 있다. 대나무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품종으로 손꼽히는 모죽의 씨앗을 심은 자리에는 4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땅 위에서 그렇다. 비옥한 토양에 모죽의 씨앗을 심고 매일 물을 주어도 싹이 트지 않는다. 한 달이 가도 여전히 그대로다. 일 년이 가도 여전히 변화가 없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흙은 4년 전 모습 그대로다. 보이는 것이 없으니, 모죽을 심은 이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씨가 죽었나. 흙이 잘못됐나. 이렇게 매일 모죽을 돌보는 내가, 헛수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4년이 지나고 5년째가 되는 어느 봄, 모죽은 갑자기 솟아오른다. 변화가 없었던 지난날들은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는 듯 하루에 70cm씩 자라난다. 변화와 성장에 아주 오래 갈증을 느꼈던 것 마냥 쉬지 않고 매일 같이 자라난다. 그렇게 6주가 지나면, 25미터라는 거대한 높이의 대나무가 된다. 무려 아파트 10층의 높이의 나무가 6주 만에 자라난 것이다. 심지어 한두 그루가 아니다. 한 자리에 심은 모죽들은 같은 시기에 같은 속도로 솟아오른다. 마치 그 침묵의 4년 동안 서로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4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던 땅에서 솟아오른 한 무리의 나무들. 단 6주만의 일이다.
그렇다면, 4년 동안 모죽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모죽은 땅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땅 밖에서가 아니라 땅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넓히고 있었다. 하나의 모죽은 한 그루의 키만큼 자라기 위한 뿌리만 내리지 않는다. 하나의 모죽은 한 그루 이상의 나무로 자라기 위해 뿌리 내린다. 더 깊고 더 넓게. 그렇게 모죽의 뿌리는 수십 미터까지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러다 보면 옆에 심어진 다른 모죽의 뿌리를 만난다. 더 넓게 뻗어가다 보면 더 멀리 있던 또 다른 모죽의 뿌리와도 만난다. 그렇게 모죽의 뿌리들은 서로 연결된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그러니까 모죽의 4년은 자라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연결되고 있었던 시간이다. 그 모든 일들이 땅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을 뿐.
모죽이 땅 안에서 연결되는 시간을 보낸 덕분에 모죽들은 한 그루씩 솟아오르지 않는다. 뿌리가 이미 하나로 연결된 그들은 일제히 솟아난다. 그러니까 6주의 도약은, 4년간 침묵의 연결이 만들어낸 '함께 솟아나는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뿌리로 연결된 모죽들은 4년 동안 서로의 양분을 공유한다. 햇볕을 더 많이 받은 자리의 모죽이 만든 양분이, 뿌리를 타고 그늘진 자리의 모죽에게도 흘러간다. 비옥한 흙에 자리 잡은 모죽의 영양분도, 척박한 흙에 자리 잡은 모죽에게 흐른다. 한 그루의 모죽이 자라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빨아들인 크고 작은 영양분들은 그렇게 모든 모죽의 것이 된다. 이것이 모죽이 25미터까지 솟아오를 수 있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한 그루의 양분만으로는 25미터의 거대한 길이로 자라날 수 없고, 그 길이를 지탱할 수도 없다. 수십 그루가 4년 동안 함께 양분을 쌓고 공유했기 때문에 하늘을 향해 밀어 올리듯 25미터를 성장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모죽의 도약은 혼자만의 도약이 아니다. 4년간의 침묵 속에서 고요히 만들어낸 연결망 전체가, 한꺼번에 하늘로 향하는 일.
나는 한때, 내 시간이 흩어진 조각 같다고 생각했다. 파편으로 조각난 삶. 누군가 내 이력을 본다면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고등학생 때 나는 디자인과 미술을 전공했다. 나의 또래 친구들이 국, 수, 사, 과, 영을 배울 때 나는 소묘, 포토샵, 프리미어프로, 일러스트레이터, 애프터 이펙트를 배웠다. 나의 학교 친구들이 미대에 진학할 때 나는 광고와 홍보를 전공하는 사회과학계열의 대학의 학생으로 입학했다. 광고와 홍보를 전공했으나, 사회에 나와서는 줄곧 마이크 앞에 섰다. 성우로, MC로, 스피치 코치로. 이따금 크고 작은 사업을 했고, 유튜브 방송을 하기도 했다. 나의 첫 번째 유튜브는 대학생 때 만들었던 채널이었다. '키윤의 잡화점'이라는 이름의 채널이었는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보고 영감받아 만든 채널이었다. 나미야 잡화점처럼 사람들의 고민을 편지로 받아 답하는 콘텐츠였다.(손 편지가 아니라 이메일로 받았을 뿐) 결과는 실패였다.
키윤의 잡화점이 왜 실패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내가 사람들의 고민에 답을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처럼, 누군가의 편지에 내가 답을 건네는 콘텐츠의 한계는 명확했다. 나의 답이 그 사람의 답이 아닐 수 있으므로. 나의 지도가 그 사람의 지도가 아닐 수 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의 나의 지도는 지금에 비하자면, 아기자기하게 느껴질 만큼 한없이 작고 단편적이었기에 실패했으리라.
그러나 그 시간이 가르쳐준 것이 분명 있었다. 나는 어쩌면 그때부터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던 것 같다. 나의 답이 타인의 답이 아닐 수 있으며, 답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답을 알려주는 콘텐츠와는 점차 멀어졌다. 콘텐츠를 보고 듣는 이들과 함께 질문을 하게 하는 콘텐츠, 질문 속에서 각자의 답을 찾을 수 있는 콘텐츠만이 내 관심을 끌었다. 그렇게 나는 시간이 흘러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팟캐스트 명은 〈길 위에서 묻다〉. 길 위에서 묻는다는 팟캐스트의 이름처럼 모든 에피소드를 길 위에서 녹음했다. 도시의 골목에서, 새가 지저귀는 숲길에서, 파도가 은은하게 철썩이는 바다에서. 누군가의 인생 한 자락을 담은 그 길 위에서 나는 마이크를 들고 묻고 또 물었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며 길 위에서 묻다의 프로그램 소개를 다시 살펴본다. 과거의 내가 적어둔 문장이 눈에 띈다.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세요. 그러면 언젠가 어느 날에, 그 질문의 해답 속에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
돌이켜보면 나의 지난 시간은 이력서에 적기에는 참으로 어수선한 시간들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시절들의 나는 '한 우물을 파라'는 말 앞에서 늘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여러 우물 사이를 오가며 어느 우물에서도 깊이 닿지 못한 사람같이 느껴지는 날들이 몹시 괴로웠다.
그러나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한자리에서 만났다. After Soyoon이라는 자리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며 키워왔던 경험과 감각이 After Soyoon의 시각적인 톤을 만들었다. After Soyoon의 아트 이미지는 점묘화 기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건 점묘화가 After Soyoon의 철학을 가장 잘 반영하는 기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고, 면을 이루어 마침내 그림을 완성하는 것. 기법에 대한 이해도가 나의 메시지를 관통하는 아트 스타일로 이어진 것이다. 나는 해당 작업을 AI툴을 이용해 진행하고 있는데, 나의 프롬프트는 꽤나 정교하게 이루어져있다. 디자인과 미술 기법에 대한 이해도가 있기 때문이다. OpenAI 공동 창립자였던 안드레이 카파시(Andrej Karpathy)는 최근 자신의 X에 내가 자주 인용하는 문장이 있다며 해당 문장을 공유했다.
'생각은 외주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이해는 외주를 줄 수 없다(You can outsource your thinking, but you cannot outsource your understanding).'
그렇다. 내가 치열하게 디자인을 공부하고 경험했던 3년의 시간은 디자인과 미술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광고와 홍보를 전공했던 4년의 시간. 이 시간들은 After Soyoon의 메시지 구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내가 하고싶은 이 수많은 말들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한 줄짜리 카피라이팅으로 구현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한 줄로 사람을 멈춰 세우는 일, 핵심을 정확히 꿰뚫는 일. 이 또한 광고를 공부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이해하지 못했을 영역이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마이크를 쥐고 수만 명 앞에 섰던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그 속에서 말의 호흡이 주는 힘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호흡이 있는 글을 써 내려가지 못했을 것이다. 수천 명을 가르쳤던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결국 질문만이 유효한 배움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정답을 가르치는 오만한 사람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각 영역을 온몸으로 이해해 온 모든 시간들은 사라진 시간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서로의 뿌리를 향해 자라고 있던 시간이었다. 마치 각각의 토양에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있던 모죽처럼.
나는 After Soyoon을 통해 모죽으로 재탄생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줄곧 모죽이었다. 손에 붓을 쥐었을 때도, 마이크를 쥐었을 때도 나는 모죽이었으며, 잡화점의 주인이었을 때도, 길 위에서 묻는 방랑자였을 때도 나는 모죽이었다. 나는 늘 같은 자리를 향해 자라고 있었다. 질문이라는 하늘을 향해. 내게 정답은 천장처럼 느껴졌고, 질문은 하늘처럼 느껴졌다. 나는 천장이 있는 식물원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서있는 자리는 언제나 정답보다 질문을 사랑하는 자리였고, 답을 가진 사람보다 답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자리였다.
우리는 어쩌면 줄곧 한 자리를 향해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줄곧 각자만의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모죽일 수는 있겠으나, 그 모든 모죽이 같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하늘을 향해 높게 자라난다. 우리가 하나의 모죽을 향해 흩어져 뿌리를 내리는 모죽이라는 사실. 이 사실을 어떤 사람은 일찍 알아채고 어떤 사람은 아주 뒤늦게 알아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자신에게도 사실은 하늘이 있었으며, 자신이 그 하늘을 향해 드높게 자라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영영 알지 못하기도 한다.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자신만의 하늘을 알고 있는가.
당신의 흩어진 모죽들은 어떤 자리를 향해 자라고 있는가.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언젠가 어느 날, 자신의 하늘을 향해 솟아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반면, 이 질문이 없다면 4년의 침묵은 견디기 어렵다. 땅 위에 아무런 결실도 나타나지 않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각자가 어떤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는 모죽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바야흐로, AI의 시대가 왔다. 이제 뉴스를 틀지 않아도,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어도 AI를 써봤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쉽게 듣는다. 카페에 가면 AI로 작업하는 사람들도 정말 흔히 보인다. AI를 정의할 수 있는 말은 많겠으나, 지금 떠오르는 말은 AI가 가장 빠른 학습자라는 것이다. AI는 어제 모르던 것을 오늘 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릴 수 없던 그림을 오늘은 잘 그려낸다. 어제는 없었던 기능들이 오늘은 방대하게 추가되어 사용할 수 있다. 실제로 AI가 성장하는 속도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AI와 인간의 시간은 매우 상대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다. 나의 시간으로는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AI의 시간은 한 달은 지난 것처럼. AI 앞에서 우리의 빠름은 모두 무력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AI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다. AI에게는 자신만의 하늘이 없다. AI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답을 준다. 같은 하늘을 보여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롬프트에 의해 출력되는 하늘의 값이 같다고도 할 수 있겠다. 프롬프트가 달라지면 답도 달라지지만, 그것은 AI의 하늘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묻는 사람의 하늘이 잠시 투영된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가지고 있으나 AI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그것이 인간의 재능이자 무기가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재능은 자라고 싶은 하늘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AI는 자라고 싶은 하늘이 없으며, 결과물이 보이지 않는 4년의 침묵을 견딜 수도 없다. 김애란 소설가는 한 인터뷰에서 'AI에게는 망설임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 AI에게는 망설임이 없으며, 기다림도 없다. 그러므로 침묵을 견디며 다양한 방향으로 뿌리를 뻗어본 적도 없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인간은 본래 세계를 누비는 존재로 태어났으나 정해진 자리를 고집하기 시작하며 병들기 시작했다고.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농업혁명을 인류 최대의 사기극으로 꼽는 것도 비슷한 의견이리라 짐작한다. 세상에 넓게 뿌리내리고 각자의 하늘을 향해 드높게 솟아나야 했던 인간은 여러 번의 혁명 이후 한없이 좁은 화분에 갇혔다. 그렇게 좁은 영역에서 깊게 뿌리는 내리는 전문성의 시대에는 한 우물을 깊이 파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AI는 한 우물의 끝까지 1분 만에 도달하는 시대가 왔다. AI가 발전함에 따라 한 우물의 끝에 도달하는 시간이 1초로 줄어들 것이다. 이런 시대에서 전문성만으로 승부를 보고자 하는 인간의 자리가 남아 있을까?
나는 조심스레 어떠한 직군이든 자신의 전문성만을 과신하는 사람들은 대체 될 것이라 예측해 본다. 우리는 이제 화분을 버려야 한다. 좁고 깊게 뿌리 내리던 습관의 자리에 본래 인간의 역할을 채워야 한다. 모죽처럼 드넓게 뿌리 내리는 일. 자기만의 하늘을 향해 있는 힘껏 솟아오르는 일.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없어도 침묵의 시간 속에서 더 넓게 연결되며 자신만의 관점을 공고히 다지는 일. 그것이 이 시대에 인간에게 남은 자리일 것이다.
AI에게 생각은 외주를 줄 수 있지만, 이해는 외주를 줄 수 없다. 이 문장에 나는 하나의 문장을 덧붙이고 싶다.
"하늘을 향해 뿌리를 뻗던 나의 경험도, 외주를 줄 수 없다."
4년의 침묵 속에서 내가 직접 길러낸 자리. 경험. 시간. 그런 것들은 결코 외주를 줄 수도 대체를 시킬 수도 없는 것들이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심어두고 기다리고 있는가. 1년이 가도, 2년이 가도 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그 자리. 어쩌면 당신은 그 자리를 허송세월이라고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죽은 알려준다. 자라지 않는 시간이 없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당신만의 하늘을 향해 자라는 시간이라는 것을. 그러니 나는 당신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당부하고 싶다. 4년의 침묵을 두려워하지 말 것. 보이지 않는 그 시간이 사실은, 당신이 자라고 있는 시간이다. 땅 위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은 것이 아니다. 땅속에서 보내는 4년이 끝나는 어느 봄, 당신은 당신만의 하늘을 향해 솟아오를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솟아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4년 동안 모죽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모죽은 땅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땅 밖에서가 아니라 땅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넓히고 있었다. 하나의 모죽은 한 그루의 키만큼 자라기 위한 뿌리만 내리지 않는다. 하나의 모죽은 한 그루 이상의 나무로 자라기 위해 뿌리 내린다. 더 깊고 더 넓게. 그렇게 모죽의 뿌리는 수십 미터까지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러다 보면 옆에 심어진 다른 모죽의 뿌리를 만난다. 더 넓게 뻗어가다 보면 더 멀리 있던 또 다른 모죽의 뿌리와도 만난다. 그렇게 모죽의 뿌리들은 서로 연결된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그러니까 모죽의 4년은 자라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연결되고 있었던 시간이다. 그 모든 일들이 땅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을 뿐.
그렇다면, 4년 동안 모죽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모죽은 땅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땅 밖에서가 아니라 땅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넓히고 있었다. 하나의 모죽은 한 그루의 키만큼 자라기 위한 뿌리만 내리지 않는다. 하나의 모죽은 한 그루 이상의 나무로 자라기 위해 뿌리 내린다. 더 깊고 더 넓게. 그렇게 모죽의 뿌리는 수십 미터까지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러다 보면 옆에 심어진 다른 모죽의 뿌리를 만난다. 더 넓게 뻗어가다 보면 더 멀리 있던 또 다른 모죽의 뿌리와도 만난다. 그렇게 모죽의 뿌리들은 서로 연결된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그러니까 모죽의 4년은 자라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연결되고 있었던 시간이다. 그 모든 일들이 땅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을 뿐.
모죽이 땅 안에서 연결되는 시간을 보낸 덕분에 모죽들은 한 그루씩 솟아오르지 않는다. 뿌리가 이미 하나로 연결된 그들은 일제히 솟아난다. 그러니까 6주의 도약은, 4년간 침묵의 연결이 만들어낸 '함께 솟아나는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뿌리로 연결된 모죽들은 4년 동안 서로의 양분을 공유한다. 햇볕을 더 많이 받은 자리의 모죽이 만든 양분이, 뿌리를 타고 그늘진 자리의 모죽에게도 흘러간다. 비옥한 흙에 자리 잡은 모죽의 영양분도, 척박한 흙에 자리 잡은 모죽에게 흐른다. 한 그루의 모죽이 자라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빨아들인 크고 작은 영양분들은 그렇게 모든 모죽의 것이 된다. 이것이 모죽이 25미터까지 솟아오를 수 있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모죽이 땅 안에서 연결되는 시간을 보낸 덕분에 모죽들은 한 그루씩 솟아오르지 않는다. 뿌리가 이미 하나로 연결된 그들은 일제히 솟아난다. 그러니까 6주의 도약은, 4년간 침묵의 연결이 만들어낸 '함께 솟아나는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뿌리로 연결된 모죽들은 4년 동안 서로의 양분을 공유한다. 햇볕을 더 많이 받은 자리의 모죽이 만든 양분이, 뿌리를 타고 그늘진 자리의 모죽에게도 흘러간다. 비옥한 흙에 자리 잡은 모죽의 영양분도, 척박한 흙에 자리 잡은 모죽에게 흐른다. 한 그루의 모죽이 자라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빨아들인 크고 작은 영양분들은 그렇게 모든 모죽의 것이 된다. 이것이 모죽이 25미터까지 솟아오를 수 있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한 그루의 양분만으로는 25미터의 거대한 길이로 자라날 수 없고, 그 길이를 지탱할 수도 없다. 수십 그루가 4년 동안 함께 양분을 쌓고 공유했기 때문에 하늘을 향해 밀어 올리듯 25미터를 성장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모죽의 도약은 혼자만의 도약이 아니다. 함께 축적한 뿌리가 만들어낸 도약이다. 4년간의 침묵 속에서 고요히 만들어낸 연결망 전체가, 한꺼번에 하늘로 향하는 일. 흩어져있던 모죽들이 하나가 되어 도약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 그루의 양분만으로는 25미터의 거대한 길이로 자라날 수 없고, 그 길이를 지탱할 수도 없다. 수십 그루가 4년 동안 함께 양분을 쌓고 공유했기 때문에 하늘을 향해 밀어 올리듯 25미터를 성장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모죽의 도약은 혼자만의 도약이 아니다. 함께 축적한 뿌리가 만들어낸 도약이다. 4년간의 침묵 속에서 고요히 만들어낸 연결망 전체가, 한꺼번에 하늘로 향하는 일. 흩어져있던 모죽들이 하나가 되어 도약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한때, 내 시간이 흩어진 조각 같다고 생각했다. 파편으로 조각난 삶. 누군가 내 이력을 본다면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때, 내 시간이 흩어진 조각 같다고 생각했다. 파편으로 조각난 삶. 누군가 내 이력을 본다면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고등학생 때 나는 디자인과 미술을 전공했다. 나의 또래 친구들이 국, 수, 사, 과, 영을 배울 때 나는 소묘, 포토샵, 프리미어프로, 일러스트레이터, 애프터 이펙트를 배웠다. 나의 학교 친구들이 미대에 진학할 때 나는 광고와 홍보를 전공하는 사회과학계열의 대학의 학생으로 입학했다. 광고와 홍보를 전공했으나, 사회에 나와서는 줄곧 마이크 앞에 섰다. 성우로, MC로, 스피치 코치로. 이따금 크고 작은 사업을 했고, 유튜브 방송을 하기도 했다. 나의 첫 번째 유튜브는 대학생 때 만들었던 채널이었다. '키윤의 잡화점'이라는 이름의 채널이었는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보고 영감받아 만든 채널이었다. 나미야 잡화점처럼 사람들의 고민을 편지로 받아 답하는 콘텐츠였다.(손 편지가 아니라 이메일로 받았을 뿐) 결과는 실패였다.
고등학생 때 나는 디자인과 미술을 전공했다. 나의 또래 친구들이 국, 수, 사, 과, 영을 배울 때 나는 소묘, 포토샵, 프리미어프로, 일러스트레이터, 애프터 이펙트를 배웠다. 나의 학교 친구들이 미대에 진학할 때 나는 광고와 홍보를 전공하는 사회과학계열의 대학의 학생으로 입학했다. 광고와 홍보를 전공했으나, 사회에 나와서는 줄곧 마이크 앞에 섰다. 성우로, MC로, 스피치 코치로. 이따금 크고 작은 사업을 했고, 유튜브 방송을 하기도 했다. 나의 첫 번째 유튜브는 대학생 때 만들었던 채널이었다. '키윤의 잡화점'이라는 이름의 채널이었는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보고 영감받아 만든 채널이었다. 나미야 잡화점처럼 사람들의 고민을 편지로 받아 답하는 콘텐츠였다.(손 편지가 아니라 이메일로 받았을 뿐) 결과는 실패였다.
키윤의 잡화점이 왜 실패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내가 사람들의 고민에 답을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처럼, 누군가의 편지에 내가 답을 건네는 콘텐츠의 한계는 명확했다. 나의 답이 그 사람의 답이 아닐 수 있으므로. 나의 지도가 그 사람의 지도가 아닐 수 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의 나의 지도는 지금에 비하자면, 아기자기하게 느껴질 만큼 한없이 작고 단편적이었기에 실패했으리라.
키윤의 잡화점이 왜 실패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내가 사람들의 고민에 답을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처럼, 누군가의 편지에 내가 답을 건네는 콘텐츠의 한계는 명확했다. 나의 답이 그 사람의 답이 아닐 수 있으므로. 나의 지도가 그 사람의 지도가 아닐 수 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의 나의 지도는 지금에 비하자면, 아기자기하게 느껴질 만큼 한없이 작고 단편적이었기에 실패했으리라.
그러나 그 시간이 가르쳐준 것이 분명 있었다. 나는 어쩌면 그때부터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던 것 같다. 나의 답이 타인의 답이 아닐 수 있으며, 답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답을 알려주는 콘텐츠와는 점차 멀어졌다. 콘텐츠를 보고 듣는 이들과 함께 질문을 하게 하는 콘텐츠, 질문 속에서 각자의 답을 찾을 수 있는 콘텐츠만이 내 관심을 끌었다. 그렇게 나는 시간이 흘러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팟캐스트 명은 〈길 위에서 묻다〉. 길 위에서 묻는다는 팟캐스트의 이름처럼 모든 에피소드를 길 위에서 녹음했다. 도시의 골목에서, 새가 지저귀는 숲길에서, 파도가 은은하게 철썩이는 바다에서. 누군가의 인생 한 자락을 담은 그 길 위에서 나는 마이크를 들고 묻고 또 물었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며 길 위에서 묻다의 프로그램 소개를 다시 살펴본다. 과거의 내가 적어둔 문장이 눈에 띈다.
그러나 그 시간이 가르쳐준 것이 분명 있었다. 나는 어쩌면 그때부터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던 것 같다. 나의 답이 타인의 답이 아닐 수 있으며, 답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답을 알려주는 콘텐츠와는 점차 멀어졌다. 콘텐츠를 보고 듣는 이들과 함께 질문을 하게 하는 콘텐츠, 질문 속에서 각자의 답을 찾을 수 있는 콘텐츠만이 내 관심을 끌었다. 그렇게 나는 시간이 흘러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팟캐스트 명은 〈길 위에서 묻다〉. 길 위에서 묻는다는 팟캐스트의 이름처럼 모든 에피소드를 길 위에서 녹음했다. 도시의 골목에서, 새가 지저귀는 숲길에서, 파도가 은은하게 철썩이는 바다에서. 누군가의 인생 한 자락을 담은 그 길 위에서 나는 마이크를 들고 묻고 또 물었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며 길 위에서 묻다의 프로그램 소개를 다시 살펴본다. 과거의 내가 적어둔 문장이 눈에 띈다.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세요. 그러면 언젠가 어느 날에, 그 질문의 해답 속에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세요. 그러면 언젠가 어느 날에, 그 질문의 해답 속에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
돌이켜보면 나의 지난 시간은 이력서에 적기에는 참으로 어수선한 시간들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시절들의 나는 '한 우물을 파라'는 말 앞에서 늘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여러 우물 사이를 오가며 어느 우물에서도 깊이 닿지 못한 사람같이 느껴지는 날들이 몹시 괴로웠다.
돌이켜보면 나의 지난 시간은 이력서에 적기에는 참으로 어수선한 시간들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시절들의 나는 '한 우물을 파라'는 말 앞에서 늘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여러 우물 사이를 오가며 어느 우물에서도 깊이 닿지 못한 사람같이 느껴지는 날들이 몹시 괴로웠다.
그러나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한자리에서 만났다. After Soyoon이라는 자리에서.
그러나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한자리에서 만났다. After Soyoon이라는 자리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며 키워왔던 경험과 감각이 After Soyoon의 시각적인 톤을 만들었다. After Soyoon의 아트 이미지는 점묘화 기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건 점묘화가 After Soyoon의 철학을 가장 잘 반영하는 기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고, 면을 이루어 마침내 그림을 완성하는 것. 기법에 대한 이해도가 나의 메시지를 관통하는 아트 스타일로 이어진 것이다. 나는 해당 작업을 AI툴을 이용해 진행하고 있는데, 나의 프롬프트는 꽤나 정교하게 이루어져있다. 디자인과 미술 기법에 대한 이해도가 있기 때문이다. OpenAI 공동 창립자였던 안드레이 카파시(Andrej Karpathy)는 최근 자신의 X에 내가 자주 인용하는 문장이 있다며 해당 문장을 공유했다.
디자인을 전공하며 키워왔던 경험과 감각이 After Soyoon의 시각적인 톤을 만들었다. After Soyoon의 아트 이미지는 점묘화 기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건 점묘화가 After Soyoon의 철학을 가장 잘 반영하는 기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고, 면을 이루어 마침내 그림을 완성하는 것. 기법에 대한 이해도가 나의 메시지를 관통하는 아트 스타일로 이어진 것이다. 나는 해당 작업을 AI툴을 이용해 진행하고 있는데, 나의 프롬프트는 꽤나 정교하게 이루어져있다. 디자인과 미술 기법에 대한 이해도가 있기 때문이다. OpenAI 공동 창립자였던 안드레이 카파시(Andrej Karpathy)는 최근 자신의 X에 내가 자주 인용하는 문장이 있다며 해당 문장을 공유했다.
'생각은 외주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이해는 외주를 줄 수 없다(You can outsource your thinking, but you cannot outsource your understanding).'
'생각은 외주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이해는 외주를 줄 수 없다(You can outsource your thinking, but you cannot outsource your understanding).'
그렇다. 내가 치열하게 디자인을 공부하고 경험했던 3년의 시간은 디자인과 미술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광고와 홍보를 전공했던 4년의 시간. 이 시간들은 After Soyoon의 메시지 구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내가 하고싶은 이 수많은 말들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한 줄짜리 카피라이팅으로 구현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한 줄로 사람을 멈춰 세우는 일, 핵심을 정확히 꿰뚫는 일. 이 또한 광고를 공부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이해하지 못했을 영역이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마이크를 쥐고 수만 명 앞에 섰던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그 속에서 말의 호흡이 주는 힘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호흡이 있는 글을 써 내려가지 못했을 것이다. 수천 명을 가르쳤던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결국 질문만이 유효한 배움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정답을 가르치는 오만한 사람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치열하게 디자인을 공부하고 경험했던 3년의 시간은 디자인과 미술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광고와 홍보를 전공했던 4년의 시간. 이 시간들은 After Soyoon의 메시지 구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내가 하고싶은 이 수많은 말들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한 줄짜리 카피라이팅으로 구현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한 줄로 사람을 멈춰 세우는 일, 핵심을 정확히 꿰뚫는 일. 이 또한 광고를 공부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이해하지 못했을 영역이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마이크를 쥐고 수만 명 앞에 섰던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그 속에서 말의 호흡이 주는 힘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호흡이 있는 글을 써 내려가지 못했을 것이다. 수천 명을 가르쳤던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결국 질문만이 유효한 배움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정답을 가르치는 오만한 사람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각 영역을 온몸으로 이해해 온 모든 시간들은 사라진 시간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서로의 뿌리를 향해 자라고 있던 시간이었다. 마치 각각의 토양에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있던 모죽처럼.
돌이켜보면 내가 각 영역을 온몸으로 이해해 온 모든 시간들은 사라진 시간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서로의 뿌리를 향해 자라고 있던 시간이었다. 마치 각각의 토양에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있던 모죽처럼.
나는 After Soyoon을 통해 모죽으로 재탄생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줄곧 모죽이었다. 손에 붓을 쥐었을 때도, 마이크를 쥐었을 때도 나는 모죽이었으며, 잡화점의 주인이었을 때도, 길 위에서 묻는 방랑자였을 때도 나는 모죽이었다. 나는 늘 같은 자리를 향해 자라고 있었다. 질문이라는 하늘을 향해. 내게 정답은 천장처럼 느껴졌고, 질문은 하늘처럼 느껴졌다. 나는 천장이 있는 식물원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서있는 자리는 언제나 정답보다 질문을 사랑하는 자리였고, 답을 가진 사람보다 답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자리였다.
나는 After Soyoon을 통해 모죽으로 재탄생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줄곧 모죽이었다. 손에 붓을 쥐었을 때도, 마이크를 쥐었을 때도 나는 모죽이었으며, 잡화점의 주인이었을 때도, 길 위에서 묻는 방랑자였을 때도 나는 모죽이었다. 나는 늘 같은 자리를 향해 자라고 있었다. 질문이라는 하늘을 향해. 내게 정답은 천장처럼 느껴졌고, 질문은 하늘처럼 느껴졌다. 나는 천장이 있는 식물원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서있는 자리는 언제나 정답보다 질문을 사랑하는 자리였고, 답을 가진 사람보다 답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자리였다.
우리는 어쩌면 줄곧 한 자리를 향해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줄곧 각자만의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모죽일 수는 있겠으나, 그 모든 모죽이 같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하늘을 향해 높게 자라난다. 우리가 하나의 모죽을 향해 흩어져 뿌리를 내리는 모죽이라는 사실. 이 사실을 어떤 사람은 일찍 알아채고 어떤 사람은 아주 뒤늦게 알아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자신에게도 사실은 하늘이 있었으며, 자신이 그 하늘을 향해 드높게 자라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영영 알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쩌면 줄곧 한 자리를 향해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줄곧 각자만의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모죽일 수는 있겠으나, 그 모든 모죽이 같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하늘을 향해 높게 자라난다. 우리가 하나의 모죽을 향해 흩어져 뿌리를 내리는 모죽이라는 사실. 이 사실을 어떤 사람은 일찍 알아채고 어떤 사람은 아주 뒤늦게 알아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자신에게도 사실은 하늘이 있었으며, 자신이 그 하늘을 향해 드높게 자라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영영 알지 못하기도 한다.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자신만의 하늘을 알고 있는가.당신의 흩어진 모죽들은 어떤 자리를 향해 자라고 있는가.
당신은 자신만의 하늘을 알고 있는가.당신의 흩어진 모죽들은 어떤 자리를 향해 자라고 있는가.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언젠가 어느 날, 자신의 하늘을 향해 솟아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반면, 이 질문이 없다면 4년의 침묵은 견디기 어렵다. 땅 위에 아무런 결실도 나타나지 않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각자가 어떤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는 모죽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언젠가 어느 날, 자신의 하늘을 향해 솟아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반면, 이 질문이 없다면 4년의 침묵은 견디기 어렵다. 땅 위에 아무런 결실도 나타나지 않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각자가 어떤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는 모죽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바야흐로, AI의 시대가 왔다. 이제 뉴스를 틀지 않아도,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어도 AI를 써봤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쉽게 듣는다. 카페에 가면 AI로 작업하는 사람들도 정말 흔히 보인다. AI를 정의할 수 있는 말은 많겠으나, 지금 떠오르는 말은 AI가 가장 빠른 학습자라는 것이다. AI는 어제 모르던 것을 오늘 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릴 수 없던 그림을 오늘은 잘 그려낸다. 어제는 없었던 기능들이 오늘은 방대하게 추가되어 사용할 수 있다. 실제로 AI가 성장하는 속도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AI와 인간의 시간은 매우 상대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다. 나의 시간으로는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AI의 시간은 한 달은 지난 것처럼. AI 앞에서 우리의 빠름은 모두 무력해지고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AI의 시대가 왔다. 이제 뉴스를 틀지 않아도,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어도 AI를 써봤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쉽게 듣는다. 카페에 가면 AI로 작업하는 사람들도 정말 흔히 보인다. AI를 정의할 수 있는 말은 많겠으나, 지금 떠오르는 말은 AI가 가장 빠른 학습자라는 것이다. AI는 어제 모르던 것을 오늘 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릴 수 없던 그림을 오늘은 잘 그려낸다. 어제는 없었던 기능들이 오늘은 방대하게 추가되어 사용할 수 있다. 실제로 AI가 성장하는 속도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AI와 인간의 시간은 매우 상대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다. 나의 시간으로는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AI의 시간은 한 달은 지난 것처럼. AI 앞에서 우리의 빠름은 모두 무력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AI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다. AI에게는 자신만의 하늘이 없다. AI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답을 준다. 같은 하늘을 보여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롬프트에 의해 출력되는 하늘의 값이 같다고도 할 수 있겠다. 프롬프트가 달라지면 답도 달라지지만, 그것은 AI의 하늘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묻는 사람의 하늘이 잠시 투영된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가지고 있으나 AI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그것이 인간의 재능이자 무기가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재능은 자라고 싶은 하늘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AI는 자라고 싶은 하늘이 없으며, 결과물이 보이지 않는 4년의 침묵을 견딜 수도 없다. 김애란 소설가는 한 인터뷰에서 'AI에게는 망설임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 AI에게는 망설임이 없으며, 기다림도 없다. 그러므로 침묵을 견디며 다양한 방향으로 뿌리를 뻗어본 적도 없다.
그러나 AI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다. AI에게는 자신만의 하늘이 없다. AI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답을 준다. 같은 하늘을 보여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롬프트에 의해 출력되는 하늘의 값이 같다고도 할 수 있겠다. 프롬프트가 달라지면 답도 달라지지만, 그것은 AI의 하늘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묻는 사람의 하늘이 잠시 투영된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가지고 있으나 AI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그것이 인간의 재능이자 무기가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재능은 자라고 싶은 하늘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AI는 자라고 싶은 하늘이 없으며, 결과물이 보이지 않는 4년의 침묵을 견딜 수도 없다. 김애란 소설가는 한 인터뷰에서 'AI에게는 망설임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 AI에게는 망설임이 없으며, 기다림도 없다. 그러므로 침묵을 견디며 다양한 방향으로 뿌리를 뻗어본 적도 없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인간은 본래 세계를 누비는 존재로 태어났으나 정해진 자리를 고집하기 시작하며 병들기 시작했다고.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농업혁명을 인류 최대의 사기극으로 꼽는 것도 비슷한 의견이리라 짐작한다. 세상에 넓게 뿌리내리고 각자의 하늘을 향해 드높게 솟아나야 했던 인간은 여러 번의 혁명 이후 한없이 좁은 화분에 갇혔다. 그렇게 좁은 영역에서 깊게 뿌리는 내리는 전문성의 시대에는 한 우물을 깊이 파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AI는 한 우물의 끝까지 1분 만에 도달하는 시대가 왔다. AI가 발전함에 따라 한 우물의 끝에 도달하는 시간이 1초로 줄어들 것이다. 이런 시대에서 전문성만으로 승부를 보고자 하는 인간의 자리가 남아 있을까?
나는 가끔 생각한다. 인간은 본래 세계를 누비는 존재로 태어났으나 정해진 자리를 고집하기 시작하며 병들기 시작했다고.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농업혁명을 인류 최대의 사기극으로 꼽는 것도 비슷한 의견이리라 짐작한다. 세상에 넓게 뿌리내리고 각자의 하늘을 향해 드높게 솟아나야 했던 인간은 여러 번의 혁명 이후 한없이 좁은 화분에 갇혔다. 그렇게 좁은 영역에서 깊게 뿌리는 내리는 전문성의 시대에는 한 우물을 깊이 파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AI는 한 우물의 끝까지 1분 만에 도달하는 시대가 왔다. AI가 발전함에 따라 한 우물의 끝에 도달하는 시간이 1초로 줄어들 것이다. 이런 시대에서 전문성만으로 승부를 보고자 하는 인간의 자리가 남아 있을까?
나는 조심스레 어떠한 직군이든 자신의 전문성만을 과신하는 사람들은 대체 될 것이라 예측해 본다. 우리는 이제 화분을 버려야 한다. 좁고 깊게 뿌리 내리던 습관의 자리에 본래 인간의 역할을 채워야 한다. 모죽처럼 드넓게 뿌리 내리는 일. 자기만의 하늘을 향해 있는 힘껏 솟아오르는 일.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없어도 침묵의 시간 속에서 더 넓게 연결되며 자신만의 관점을 공고히 다지는 일. 그것이 이 시대에 인간에게 남은 자리일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어떠한 직군이든 자신의 전문성만을 과신하는 사람들은 대체 될 것이라 예측해 본다. 우리는 이제 화분을 버려야 한다. 좁고 깊게 뿌리 내리던 습관의 자리에 본래 인간의 역할을 채워야 한다. 모죽처럼 드넓게 뿌리 내리는 일. 자기만의 하늘을 향해 있는 힘껏 솟아오르는 일.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없어도 침묵의 시간 속에서 더 넓게 연결되며 자신만의 관점을 공고히 다지는 일. 그것이 이 시대에 인간에게 남은 자리일 것이다.
AI에게 생각은 외주를 줄 수 있지만, 이해는 외주를 줄 수 없다. 이 문장에 나는 하나의 문장을 덧붙이고 싶다.
AI에게 생각은 외주를 줄 수 있지만, 이해는 외주를 줄 수 없다. 이 문장에 나는 하나의 문장을 덧붙이고 싶다.
"하늘을 향해 뿌리를 뻗던 나의 경험도, 외주를 줄 수 없다."
"하늘을 향해 뿌리를 뻗던 나의 경험도, 외주를 줄 수 없다."
4년의 침묵 속에서 내가 직접 길러낸 자리. 경험. 시간. 그런 것들은 결코 외주를 줄 수도 대체를 시킬 수도 없는 것들이다.
4년의 침묵 속에서 내가 직접 길러낸 자리. 경험. 시간. 그런 것들은 결코 외주를 줄 수도 대체를 시킬 수도 없는 것들이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심어두고 기다리고 있는가. 1년이 가도, 2년이 가도 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그 자리. 어쩌면 당신은 그 자리를 허송세월이라고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심어두고 기다리고 있는가. 1년이 가도, 2년이 가도 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그 자리. 어쩌면 당신은 그 자리를 허송세월이라고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죽은 알려준다. 자라지 않는 시간이 없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당신만의 하늘을 향해 자라는 시간이라는 것을. 그러니 나는 당신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당부하고 싶다. 4년의 침묵을 두려워하지 말 것. 보이지 않는 그 시간이 사실은, 당신이 자라고 있는 시간이다. 땅 위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은 것이 아니다. 땅속에서 보내는 4년이 끝나는 어느 봄, 당신은 당신만의 하늘을 향해 솟아오를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솟아오를 것이다.
그러나 모죽은 알려준다. 자라지 않는 시간이 없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당신만의 하늘을 향해 자라는 시간이라는 것을. 그러니 나는 당신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당부하고 싶다. 4년의 침묵을 두려워하지 말 것. 보이지 않는 그 시간이 사실은, 당신이 자라고 있는 시간이다. 땅 위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은 것이 아니다. 땅속에서 보내는 4년이 끝나는 어느 봄, 당신은 당신만의 하늘을 향해 솟아오를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솟아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