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의 부재를 느껴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지금 느끼는 어떤 감정을 위한 단어가 없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가슴 한가운데 무언가가 일렁이지만,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슬픔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조용하고 그리움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짙으며 후회라고 부르기에는 사실 후련에 가깝기도 한 그런 감정. 이런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정정되어야 할 것이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아니라, 표현할 단어가 아직 없는 감정이라고.
표현할 단어가 없다면, 그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보통, 언어가 세상에 이름을 붙인다고 생각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해 단어를 붙이는 라벨링 작업처럼. 존재하는 대상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를 깊이 들여다보면, 정반대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존재하는 감정에 단어가 붙는 것이 아니라, 단어가 있음으로 인해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어떤 단어들은, 단어를 가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주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단어가 없는 감정은 미처 발견되지 않은 감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영국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 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한데, 비트겐슈타인이 가리킨 지점도 내 손끝이 향하는 지점과 동일할 것이다. 사람은 가진 언어만큼 세계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가진 언어만큼만 세계를 살아간다. 가지고 있는 언어가 빈약하다면, 마음 안에 분명히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어도 그것을 이름으로 붙잡지 못해, 감정들이 흩어진 세계. 그야말로 희미해진 세계를 살아간다.
더 많은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더 넓은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각 나라마다 구사하는 언어가 조금씩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실제로 세상에는 특정 언어에서만 존재하는 단어들이 있다. 다른 언어로는 번역되지 않는 단어. 그 단어를 가진 사람들만이 그 감정을, 무게를, 단어가 불러오는 풍경을 정확히 느낄 수 있다. 오늘 나는 깜빡이는 커서 앞에 그런 단어 두 개를 채우며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한국어에만 존재하는 '한'과 포르투갈어에만 존재하는 'saudade'. 이 두 단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자기만의 단어를 갖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한(恨)
May 9, 2026
자기만의 사전
가슴 한가운데 이름 없이 일렁이는 감정을, 우리는 어떤 단어로 자기만의 사전에 적어 넣을 수 있는가?
01
당신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의 부재를 느껴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지금 느끼는 어떤 감정을 위한 단어가 없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가슴 한가운데 무언가가 일렁이지만,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슬픔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조용하고 그리움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짙으며 후회라고 부르기에는 사실 후련에 가깝기도 한 그런 감정. 이런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정정되어야 할 것이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아니라, 표현할 단어가 아직 없는 감정이라고.
표현할 단어가 없다면, 그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보통, 언어가 세상에 이름을 붙인다고 생각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해 단어를 붙이는 라벨링 작업처럼. 존재하는 대상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를 깊이 들여다보면, 정반대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존재하는 감정에 단어가 붙는 것이 아니라, 단어가 있음으로 인해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어떤 단어들은, 단어를 가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주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단어가 없는 감정은 미처 발견되지 않은 감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영국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 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한데, 비트겐슈타인이 가리킨 지점도 내 손끝이 향하는 지점과 동일할 것이다. 사람은 가진 언어만큼 세계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가진 언어만큼만 세계를 살아간다. 가지고 있는 언어가 빈약하다면, 마음 안에 분명히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어도 그것을 이름으로 붙잡지 못해, 감정들이 흩어진 세계. 그야말로 희미해진 세계를 살아간다.
더 많은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더 넓은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각 나라마다 구사하는 언어가 조금씩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실제로 세상에는 특정 언어에서만 존재하는 단어들이 있다. 다른 언어로는 번역되지 않는 단어. 그 단어를 가진 사람들만이 그 감정을, 무게를, 단어가 불러오는 풍경을 정확히 느낄 수 있다. 오늘 나는 깜빡이는 커서 앞에 그런 단어 두 개를 채우며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한국어에만 존재하는 '한'과 포르투갈어에만 존재하는 'saudade'. 이 두 단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자기만의 단어를 갖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한(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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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9, 2026
자기만의 사전
가슴 한가운데 이름 없이 일렁이는 감정을, 우리는 어떤 단어로 자기만의 사전에 적어 넣을 수 있는가?
After Soyoon
당신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의 부재를 느껴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지금 느끼는 어떤 감정을 위한 단어가 없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가슴 한가운데 무언가가 일렁이지만,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슬픔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조용하고 그리움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짙으며 후회라고 부르기에는 사실 후련에 가깝기도 한 그런 감정. 이런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정정되어야 할 것이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아니라, 표현할 단어가 아직 없는 감정이라고.
표현할 단어가 없다면, 그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보통, 언어가 세상에 이름을 붙인다고 생각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해 단어를 붙이는 라벨링 작업처럼. 존재하는 대상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를 깊이 들여다보면, 정반대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존재하는 감정에 단어가 붙는 것이 아니라, 단어가 있음으로 인해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어떤 단어들은, 단어를 가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주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단어가 없는 감정은 미처 발견되지 않은 감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영국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 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한데, 비트겐슈타인이 가리킨 지점도 내 손끝이 향하는 지점과 동일할 것이다. 사람은 가진 언어만큼 세계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가진 언어만큼만 세계를 살아간다. 가지고 있는 언어가 빈약하다면, 마음 안에 분명히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어도 그것을 이름으로 붙잡지 못해, 감정들이 흩어진 세계. 그야말로 희미해진 세계를 살아간다.
더 많은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더 넓은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각 나라마다 구사하는 언어가 조금씩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실제로 세상에는 특정 언어에서만 존재하는 단어들이 있다. 다른 언어로는 번역되지 않는 단어. 그 단어를 가진 사람들만이 그 감정을, 무게를, 단어가 불러오는 풍경을 정확히 느낄 수 있다. 오늘 나는 깜빡이는 커서 앞에 그런 단어 두 개를 채우며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한국어에만 존재하는 '한'과 포르투갈어에만 존재하는 'saudade'. 이 두 단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자기만의 단어를 갖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한(恨)
한국어에는 한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를 영어로 옮기려는 시도들은 많았으나, 모두 실패해 왔다. resentment는 분노에 가깝고 grief는 슬픔에 가까우며 sorrow는 비탄에 가깝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unresolved emotion이라고 풀어 썼고, 어떤 번역자는 deep-seated regret이라고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번역도, 한국 사람이 한이라는 단어 앞에 섰을 때 가슴 안에 차오르는 그 풍경을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한은 무엇일까. 한은 슬픔이 아니다. 슬픔보다 오래된 것이다. 한은 분노가 아니다. 분노보다 깊은 것이다. 한은 후회가 아니다. 후회보다 뾰족한 것이다. 한은 슬프지만 분노에 닿아 있고, 분노하지만 체념에 닿아 있으며, 체념하지만 끝내 무언가를 놓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체념 속에서 많은 것을 내려두었지만 기어코 놓지 않은 그 마지막 한 가닥이 한의 본질일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끝내 놓지 않는 어떤 지점에 한이 서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여기서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오래 거주한 한국인을 일컫는다) 한이 맺힌다고 말한다. 맺힌다. 눈물이 맺히고 한이 맺히는 이 표현, 영어로는 맺히다라는 동사조차 정확히 옮길 단어가 없다. 국립 국어사전에서는 맺히다를 '마음속에 잊히지 않는 응어리가 되어 남아 있다.'로 정의한다. 마음속에 잊히지 않는 응어리로 남는다는 것은, 맺힌다는 것이 결국 마음속에 무언가가 단단하게 자리를 잡는다는 뜻일 것이다.
한 번 흐른 슬픔이 다시 돌아와 같은 자리에 또 한 번 흐르면 맺히기 시작한다. 또 슬픔이 흐르고 그 자리로 돌아오면 잊히지 않는 슬픔은 조금씩 자리를 잡는다. 나무의 굳은살인 옹이처럼. 그렇게 우리의 마음에 자국이 남는다.
영어에 맺힘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는 이유는, 아마도 영어를 쓰는 세계관 안에서는 슬픔이 흘러간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슬픔이 흘러간다고 믿는 언어 속에 사는 이들은 모든 슬픔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슬픔은 흐르지 않고 한 자리에서 깊은 자국을 만든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한이라는 단어의 깊이다. 한을 가진 언어를 쓰는 사람은 슬픔에는 흐르는 슬픔도 있지만, 결코 흐르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한국의 시와 노래와 소설과 영화에는 한이 흐른다. 정확히는 한이 맺혀 있다. 그렇게 한은 김소월의 시에 맺혀 있고 한강의 소설에 맺혀 있으며 이창동의 영화에 맺혀 있다. '한 사람의 가슴에 맺힌 무언가를 밖으로 끄집어내 보여 주는 일.' 이것이 한국 예술의 오랜 화두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한 맺힌 서사를 이해하는 민족이며, 한 사람의 가슴에 맺혀서 영원히 흐르지 않는 슬픔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한이라는 단어를 가진 사람들. 그래서 우리의 세계 속에는 한이 살아 있다.
반면 한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어쩌면 흐르지 않는 슬픔을 영영 경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도 흐르지 않고 고이는 슬픔, 맺히는 슬픔을 경험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을 명명하지 못할 것이다. 명명되지 못한 감정은 풍경 속에 흩어진다. 이름이 없는 감정은 희미하게 사라진다. 마음속에 옹이처럼 남는 슬픔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한이라는 단어에 기대어 평생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다. 그 단어가 우리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정확히 대변해 주기 때문이다.
한이 한국어 안에서 한 민족의 슬픔을 정확히 가리키듯이, 다른 언어에도 그 언어의 사람들만이 정확히 느끼는 단어가 있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 포르투갈로 가 보자. 그곳에 한과 마주 세울 만한 단어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Saudade
지구 반대편, 포르투갈에는 saudade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 역시 어떤 언어로도 정확히 번역되지 않는다. longing은 너무 가볍고, nostalgia는 너무 회고적이며 yearning은 너무 동적으로 느껴진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saudade를 자기 민족의 영혼의 단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12년 포르투갈의 작가 아우브리 벨 (Aubrey Bell)은 saudade를 이렇게 풀었다.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그것은 지나가 버린 것일 수도 있고,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일 수도 있다."
이 문장을 보면 단순히 '그리움'이라는 단어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saudade라는 단어가 불러오는 마음속의 풍경은 이 다음 뜻에 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말하는 saudade에는 그리움으로 인한 슬픔만이 있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saudade는 오히려 간직하는 일에 가깝다. 내 곁에서 떠나보낸 사람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이미 사라진 어느 찰나의 빛을. 내 삶에서 이미 떠나 버린 그것이 나의 마음속에서 천천히 익어 가도록 품고 있는 일.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saudade는 슬픔의 모양으로 시작했지만, 그 슬픔을 오래 품으면서 그 형태는 조금씩 변한다. 모나고 차가웠던 슬픔은 그렇게 부드럽고 따뜻한 감정으로 남는다. 그래서 포르투갈 사람들은 saudade를 슬픔과 기쁨이 함께 머무른 자리라고 부른다. 내가 이 단어를 좋아하게 된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슬픔과 기쁨이 함께 머무르는 감정에 대한 단어가 있다니, 참 부러울 지경이다.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음악 장르라고 부르는 파두(fado) 는 saudade의 음악이라고 불린다. 파두를 들으면 슬픔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슬픔은 무겁게 가라앉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를 침잠하게 하는, 슬픔에 기어코 잠식되게 하는 그런 슬픔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가 부엌 창가에 앉아 따뜻한 티를 마시는데, 따뜻한 티가 목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 누군가가 떠오르는 느낌. 그리고 그 사람과 그 시절을 떠올리자 콧노래가 흥얼거려지기도 하는, 그런 슬픔이다. 슬픔이라는 그릇에 따뜻함이라는 물이 가득 차 있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어떤 도시를 떠올림과 동시에, 내가 언젠가 그곳에서 분명히 살았던 것 같은 감각이 밀려오는 순간. 바로 이것이 saudade의 풍경일 것이다.
saudade는 부재의 감정을 넘어선 현존의 감정이다. 떠난 것이 떠나며 증발되는 것이 아니라, 떠남으로써 자기 안에 다른 형태로 남아 있는 일. 포르투갈 사람들은 Tenho saudades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고 했다. 직역하면 '나는 saudades를 가지고 있다' 는 뜻이다.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평범한 인사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saudade 단어를 곱씹어 보면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 자체를 내 마음에 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내게서 떠나도 그 그리움이 내 안에 영영 머물고 있는 것. 잘 가요. 잊지 않을게요. 그 이상의 언어. 당신은 떠나지만,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내 안에 다른 형태로 남을 거예요. 그리고 새로운 형태로 자라나 나의 기쁨이 될 거예요. 라고 말하는 듯한 언어에 나는 깊이 매료된다.
saudade가 없는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 그리움은 슬픔에서 그친다. 부재의 대상을 떠올리면 슬퍼지는 것. 그렇게 그리움이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다. 그리움은 부재의 감정이라고 믿는 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포르투갈 사람들은 saudade라는 단어로 그리움 안에 머무는 기쁨을, 그리움 안에서 새로이 태어난 기쁨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슬픔과 기쁨이 함께 공존하는 그 자리에서.
한과 saudade는 같은 슬픔인가, 다른 슬픔인가. 피상적으로 보면, 두 단어는 비슷하게 느껴진다. 둘 다 흐르지 않고 머무는 슬픔이고, 둘 다 영혼의 단어로 불리며, 둘 다 다른 언어로는 쉽게 번역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단어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 단어를 해부하듯이 살펴보자.
한은 놓지 않는 슬픔이다. 잃어버린 것을 끝내 놓지 않고, 그 자리에 옹이가 되어 머무는 단단함. 그러므로 한의 본질은 맺힘이고, 맺힘의 본질은 지속에 있을 것이다. 지속된 것만이 맺혀 있을 수 있다. saudade는 함께 머무는 슬픔이다. 한이 마음에서 놓지 않는 슬픔이라면, saudade는 마음에 들여놓는 슬픔인 것이다. 잃어버린 것을 다른 형태로 내 안에 살아 있게 하는 것. 그 속에서 부드러움으로 재탄생되는 것. 그러므로 saudade의 본질은 현존이고, 현존의 본질은 변환에 있을 것이다. 변환되었기 때문에 현존할 수 있다.
같은 슬픔에 대해 한국어는 단단하게 박힌 옹이로 보고, 포르투갈어는 함께 살아가는 그림자로 본다. 같은 상실에 대하여 한국어는 맺히는 자리로 보고, 포르투갈어는 변환되는 자리로 본다. 이것은 누가 더 옳은가. 어느 쪽이 더 맞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두 언어가 각자 한 감정을 바라보는 다른 도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언어는 단순한 라벨이 아니다. 언어는 세계관이다. 같은 슬픔에 대해 '한'이라는 단어로 슬픔을 해석하는 사람과 'saudade'라는 단어로 슬픔을 해석하는 사람은 다른 슬픔을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단어가 우리 마음에 펼쳐지는 풍경을 만든다. 단어가 우리 마음에 감정의 자리를 만든다. 그렇게 단어는 그 사람이 살아갈 세계의 윤곽을 만든다.
한 민족의 단어가 그 민족이 살아갈 세계를 만든다. 이 문장을 적고 나니,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한 민족에게 자기만의 단어가 있었듯, 한 사람에게도 자기만의 단어가 있을 수 있는가.
작년, 나는 암 투병을 하며 참 많은 책을 읽었다. 내가 가는 곳이 어디든 책 한 권 혹은 이북리더기 한 대를 늘 챙겨서 다니곤 했는데, 늘 책을 품고 다니는 내게 지인들은 물었다. "요즘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던 책이 뭐였어?" 그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답하곤 했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평론가의 저서,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책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문단이 있다.
"나는 해석자다. 해석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해석은 기술이기 때문에 비평은 직업이 될 수 있다. (...) 해석자는 이미 완성돼 있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끌어내면서 전달한다. 그러므로 해석은 일종의 창조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지만, 잠재적 유에서 현실적 유를, 감각적 유에서 논리적 유를 창조해낼 수는 있다. 원칙적으로 해석은 무한할 수 있지만, 모든 해석이 평등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 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있다. (...) 그런 의미에서 해석은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다. 작품을 '까는' 것이 아니라 '낳는' 일이다. 해석은 인식의 산파술이다."
이 문단을 읽었을 때, 나는 겨우 한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책을 덮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언가가 맞춰지는 감각에 집중하기 위해 가만히, 고요하게, 멍하니.
내 마음에는 그 전까지 이름 없이 떠도는, 그래서 이따금씩 찾아오지만 명명할 수 없어 흩어지고야 마는 어떤 자리가 있었다. 나는 정답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정답이 없다는 것만이 내가 유일하게 믿는 정답이었다. 나는 침묵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들은 늘 분명하게 존재했다. 그 말들이 내 안의 침묵을 계속해서 깨뜨렸다. 나는 누군가의 인생에 답을 주는 일은 오만하다고 느꼈고, 동시에 누군가의 인생을 향해 말을 거는 일을 멈추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답도 아니고 침묵도 아닌, 그 사이의 자리. 그 자리가 무엇인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단을 만났을 때, 마침내 그 자리에 이름이 생긴 것이다. 해석자.
해석자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침묵하지도 않는다. 해석자는 작품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끌어내는 사람이다. 그것은 정답을 만드는 일도, 정답을 가르치는 일도, 누군가의 정답을 베끼는 일도 아니다. 해석자로 산다는 것은 이미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일. 잠재적 유를 현실적 유로, 감각적 유를 논리적 유로 길어 올리는 일이었다.
해석자. 이 한 단어가 내 안에 박힌 순간부터, 나는 해석자로 살겠노라 다짐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일평생 해석자로 살아왔으나, 그간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다가 이제서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으니 해석자로 살겠다고 다짐한 것에 가깝다. 그때부터 나는 암 투병을 하며 겪는 모든 상황들을 새로이 해석하기 시작했다. 잠재적 유에서 현실적인 유를 창조하며, 감각적 유에서 논리적인 유를 창조해 내며.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 잉태하고 있는 것들을 끌어내 나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며 방향을 묻는 친구들에게도 더 이상 답을 주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친구의 내면 안에 이미 있는 것을 함께 끌어내고자 했다. 그야말로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해석자로 살며, 암 투병을 하는 과정에서 맞이하게 된 크고 작은 슬픔과 고통들을 크고 작은 기쁨과 환희로 치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After Soyoon일 것이다.
만약, 해석자라는 단어가 내 삶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자리를 영영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정답을 주는 사람과 침묵하는 사람 사이를 평생 헤매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명명하지 못한 채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한 단어가 한 사람의 자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의 문단을 읽으며 강렬하게 깨달았다.
4화 아티클 〈운명의 멱살을 움켜쥐며〉에 작성해 두었던 글을 재인용해 본다. "읽는다는 것은, 이름 없이 떠돌던 감각에 언어가 붙는 일이다." 그러므로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얻는 일이 아니다. 내 안에 이미 존재했지만,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던 것에 이름을 붙여 주는 일이다. 나와 같은 상황을, 나보다 먼저 마주했던 누군가가 길어 올린 단어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나를 도달시키는 일. 그 일이 바로 읽기일 것이다.
읽기가 남이 길어 올린 단어를 나의 자리에 가져오는 일이라면, 쓰기는 그보다 더 특별한 일이다. 아직 누구도 길어 올리지 않은 단어를 내가 처음 길어 올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After Soyoon을 시작한 이후, 나는 매주 한 편의 긴 글과 수십 편의 짧은 글들을 쓴다. 글을 쓰는 행위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일이 수도 없이 반복되고, 엄지손톱을 깨물던 어린 시절의 습관이 다시 재현되는 일임을 깨닫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쓴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단어로 나를 설명하고, 상황을 설명하고, 삶을 설명하는 일을 연습하기 위함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특히 해석자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늘 '빈 여백의 자리에 처음으로 이름 붙이는 일'을 매번 해내야만 한다. 이 일을 매주 혹은 매일 해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 고통을 통과한 자리에서는, 늘 환희가 찾아왔다.
5화의 아티클을 쓸 때 나는 '끝에 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언어의 한계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담지 못했다. 끝은 너무 평면적이었고, 경계는 너무 차갑게 느껴졌으며 변두리는 어딘가 촌스럽게 느껴졌다. 끝과 관련된 모든 단어를 탐색하다가, 한 단어를 길어 올렸다.
"가장자리". 이제 다음 순서는 이 가장자리에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또 하나의 문장을 길어 올렸다.
"가장자리에서 용을 그리는 일"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Hic sunt dracones"가 파편의 조각으로 내 머릿속을 떠다니다가,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마친 것이다. 내가 보았던 "Hic sunt dracones"는 본래 경고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으나, 나는 이것을 모름의 경계로 해석하고자 했다. 그렇게 모름을 모른다고 인정함으로써 앎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나의 고유한 해석이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잠재적 유를 현실적 유로 길어 올린 끝에 나온 글이 "여기에 용이 있다" 글의 전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든 헌트 레녹스 지구본을 보고 "Hic sunt dracones"를 발견할 수는 있겠으나, 나와 같은 해석은 하지 못하리라. 이 해석은 나의 고유한 해석이라고 자부할 때, 글을 쓰던 고통은 환희로 변환된다.
After Soyoon에는 토대가 되는 몇 개의 문장이 있다.
끝에 서야 비로소 보인다.
정답 이후의 질문.
해석이 삶을 결정한다.
이 문장들은 모두 내가 흘러가는 고통에 형태를 주는 일, 쓰기를 통해 유에서 유로 창조해 낸 문장들이다. 그런 측면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받아 적는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쓰는 행위가 정말 중요한 이유는 우리 내면에 이름 없이 떠돌던 감각을 처음으로 태어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A.F.T.E.R 프레임에서 T에 해당하는 TEXT는 읽기와 쓰기를 의미한다. 읽기로 나를 대변할 언어를 발견하고, 쓰기로 세상에 없던 단어를 길어 올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책을 읽으며 내가 줄곧 느꼈지만 이름 붙이지 못했던 자리를 발견하고, 자기 자신의 글을 쓰며 누구도 아직 명명하지 못한 새로운 자리를 길어 올린다. 이 두 가지 작업이 한 사람의 평생에 걸쳐 진행되면, 그 사람의 삶은 '자기만의 사전'을 획득하게 된다.
그 사전 안의 단어들은 어떤 외국어로도, 심지어 모국어로도 쉽게 번역되지 않을 것이다. 그 단어들은 그 사람의 세계 안에서만 정확한 자리를 갖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만의 단어를 가진다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는 일일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에게 한이 있고 포르투갈 사람에게 saudade가 있듯, 한 사람에게도 자기만의 한이 있고 자기만의 saudade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한 단어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문장일 수도 있고, 한 단락일 수도 있으며, 책 한 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자기만의 단어를 가지고 있는가, 자신의 내면에 펼쳐지는 풍경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자기만의 언어를 가졌는가. 이것이 한 사람이 얼마나 선명한 자기 세계를 가졌는가를 가르는 기준이다.
당신은 자기만의 단어를 가지고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쉬이 번역되지 않는 그 단어를.
당신의 가슴 한가운데서 일렁이지만, 그 어떤 사전에도 정확히 등재되어 있지 않은 그 자리.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려 해도 쉽게 번역이 되지 않는 그 자리. 그것을 명명할 자기만의 단어를 가지고 있는가.
만약 아직 그 단어를 가지지 못했다면, 두 가지 일을 시작함으로써 당신은 자기만의 단어를 가질 수 있다. 읽는 일과 쓰는 일. 좋은 글을 읽으며 자기 안에 떠돌던 감각에 이름 붙일 수 있는 단어를 찾고, 나만의 글을 쓰며(그것이 이 아티클처럼 11000자에 달하는 긴 글이 아니라, 아주 짧은 일기여도 괜찮다.) 아직 누구도 명명하지 못한 단어에 처음으로 이름 붙이는 일을 시작해보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 그의 말을 나의 언어로 재해석하자면, 해석이 삶을 결정한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가진 만큼 세계를 살아낼 수 있고, 해석하는 만큼 삶을 다채롭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세계의 크기를 결정하는 일은 결국 어떤 언어를 발견해 나의 것으로 만드는가. 그리고 나의 심연에서 어떤 언어를 길어 올리는가에 달려있다. 한 사람의 평생은 어쩌면 자기만의 사전을 천천히 써 내려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긴 글의 끝에서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사전에는, 어떤 단어가 적혀가고 있는가.
참고 자료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Aubrey F. G. Bell, In Portugal, John Lane, 191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논리-철학 논고』, 1922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맺히다"
한국어에는 한이라는 단어가 있다.
한국어에는 한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를 영어로 옮기려는 시도들은 많았으나, 모두 실패해 왔다. resentment는 분노에 가깝고 grief는 슬픔에 가까우며 sorrow는 비탄에 가깝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unresolved emotion이라고 풀어 썼고, 어떤 번역자는 deep-seated regret이라고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번역도, 한국 사람이 한이라는 단어 앞에 섰을 때 가슴 안에 차오르는 그 풍경을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단어를 영어로 옮기려는 시도들은 많았으나, 모두 실패해 왔다. resentment는 분노에 가깝고 grief는 슬픔에 가까우며 sorrow는 비탄에 가깝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unresolved emotion이라고 풀어 썼고, 어떤 번역자는 deep-seated regret이라고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번역도, 한국 사람이 한이라는 단어 앞에 섰을 때 가슴 안에 차오르는 그 풍경을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한은 무엇일까. 한은 슬픔이 아니다. 슬픔보다 오래된 것이다. 한은 분노가 아니다. 분노보다 깊은 것이다. 한은 후회가 아니다. 후회보다 뾰족한 것이다. 한은 슬프지만 분노에 닿아 있고, 분노하지만 체념에 닿아 있으며, 체념하지만 끝내 무언가를 놓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체념 속에서 많은 것을 내려두었지만 기어코 놓지 않은 그 마지막 한 가닥이 한의 본질일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끝내 놓지 않는 어떤 지점에 한이 서려 있다.
한은 무엇일까. 한은 슬픔이 아니다. 슬픔보다 오래된 것이다. 한은 분노가 아니다. 분노보다 깊은 것이다. 한은 후회가 아니다. 후회보다 뾰족한 것이다. 한은 슬프지만 분노에 닿아 있고, 분노하지만 체념에 닿아 있으며, 체념하지만 끝내 무언가를 놓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체념 속에서 많은 것을 내려두었지만 기어코 놓지 않은 그 마지막 한 가닥이 한의 본질일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끝내 놓지 않는 어떤 지점에 한이 서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여기서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오래 거주한 한국인을 일컫는다) 한이 맺힌다고 말한다. 맺힌다. 눈물이 맺히고 한이 맺히는 이 표현, 영어로는 맺히다라는 동사조차 정확히 옮길 단어가 없다. 국립 국어사전에서는 맺히다를 '마음속에 잊히지 않는 응어리가 되어 남아 있다.'로 정의한다. 마음속에 잊히지 않는 응어리로 남는다는 것은, 맺힌다는 것이 결국 마음속에 무언가가 단단하게 자리를 잡는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여기서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오래 거주한 한국인을 일컫는다) 한이 맺힌다고 말한다. 맺힌다. 눈물이 맺히고 한이 맺히는 이 표현, 영어로는 맺히다라는 동사조차 정확히 옮길 단어가 없다. 국립 국어사전에서는 맺히다를 '마음속에 잊히지 않는 응어리가 되어 남아 있다.'로 정의한다. 마음속에 잊히지 않는 응어리로 남는다는 것은, 맺힌다는 것이 결국 마음속에 무언가가 단단하게 자리를 잡는다는 뜻일 것이다.
한 번 흐른 슬픔이 다시 돌아와 같은 자리에 또 한 번 흐르면 맺히기 시작한다. 또 슬픔이 흐르고 그 자리로 돌아오면 잊히지 않는 슬픔은 조금씩 자리를 잡는다. 나무의 굳은살인 옹이처럼. 그렇게 우리의 마음에 자국이 남는다.
한 번 흐른 슬픔이 다시 돌아와 같은 자리에 또 한 번 흐르면 맺히기 시작한다. 또 슬픔이 흐르고 그 자리로 돌아오면 잊히지 않는 슬픔은 조금씩 자리를 잡는다. 나무의 굳은살인 옹이처럼. 그렇게 우리의 마음에 자국이 남는다.
영어에 맺힘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는 이유는, 아마도 영어를 쓰는 세계관 안에서는 슬픔이 흘러간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슬픔이 흘러간다고 믿는 언어 속에 사는 이들은 모든 슬픔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슬픔은 흐르지 않고 한 자리에서 깊은 자국을 만든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한이라는 단어의 깊이다. 한을 가진 언어를 쓰는 사람은 슬픔에는 흐르는 슬픔도 있지만, 결코 흐르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영어에 맺힘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는 이유는, 아마도 영어를 쓰는 세계관 안에서는 슬픔이 흘러간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슬픔이 흘러간다고 믿는 언어 속에 사는 이들은 모든 슬픔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슬픔은 흐르지 않고 한 자리에서 깊은 자국을 만든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한이라는 단어의 깊이다. 한을 가진 언어를 쓰는 사람은 슬픔에는 흐르는 슬픔도 있지만, 결코 흐르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한국의 시와 노래와 소설과 영화에는 한이 흐른다. 정확히는 한이 맺혀 있다. 그렇게 한은 김소월의 시에 맺혀 있고 한강의 소설에 맺혀 있으며 이창동의 영화에 맺혀 있다. '한 사람의 가슴에 맺힌 무언가를 밖으로 끄집어내 보여 주는 일.' 이것이 한국 예술의 오랜 화두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의 시와 노래와 소설과 영화에는 한이 흐른다. 정확히는 한이 맺혀 있다. 그렇게 한은 김소월의 시에 맺혀 있고 한강의 소설에 맺혀 있으며 이창동의 영화에 맺혀 있다. '한 사람의 가슴에 맺힌 무언가를 밖으로 끄집어내 보여 주는 일.' 이것이 한국 예술의 오랜 화두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한 맺힌 서사를 이해하는 민족이며, 한 사람의 가슴에 맺혀서 영원히 흐르지 않는 슬픔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한이라는 단어를 가진 사람들. 그래서 우리의 세계 속에는 한이 살아 있다.
우리는 한 맺힌 서사를 이해하는 민족이며, 한 사람의 가슴에 맺혀서 영원히 흐르지 않는 슬픔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한이라는 단어를 가진 사람들. 그래서 우리의 세계 속에는 한이 살아 있다.
반면 한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어쩌면 흐르지 않는 슬픔을 영영 경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도 흐르지 않고 고이는 슬픔, 맺히는 슬픔을 경험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을 명명하지 못할 것이다. 명명되지 못한 감정은 풍경 속에 흩어진다. 이름이 없는 감정은 희미하게 사라진다. 마음속에 옹이처럼 남는 슬픔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한이라는 단어에 기대어 평생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다. 그 단어가 우리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정확히 대변해 주기 때문이다.
반면 한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어쩌면 흐르지 않는 슬픔을 영영 경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도 흐르지 않고 고이는 슬픔, 맺히는 슬픔을 경험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을 명명하지 못할 것이다. 명명되지 못한 감정은 풍경 속에 흩어진다. 이름이 없는 감정은 희미하게 사라진다. 마음속에 옹이처럼 남는 슬픔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한이라는 단어에 기대어 평생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다. 그 단어가 우리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정확히 대변해 주기 때문이다.
한이 한국어 안에서 한 민족의 슬픔을 정확히 가리키듯이, 다른 언어에도 그 언어의 사람들만이 정확히 느끼는 단어가 있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 포르투갈로 가 보자. 그곳에 한과 마주 세울 만한 단어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한이 한국어 안에서 한 민족의 슬픔을 정확히 가리키듯이, 다른 언어에도 그 언어의 사람들만이 정확히 느끼는 단어가 있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 포르투갈로 가 보자. 그곳에 한과 마주 세울 만한 단어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Saudade
Saudade
지구 반대편, 포르투갈에는 saudade라는 단어가 있다.
지구 반대편, 포르투갈에는 saudade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 역시 어떤 언어로도 정확히 번역되지 않는다. longing은 너무 가볍고, nostalgia는 너무 회고적이며 yearning은 너무 동적으로 느껴진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saudade를 자기 민족의 영혼의 단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12년 포르투갈의 작가 아우브리 벨 (Aubrey Bell)은 saudade를 이렇게 풀었다.
이 단어 역시 어떤 언어로도 정확히 번역되지 않는다. longing은 너무 가볍고, nostalgia는 너무 회고적이며 yearning은 너무 동적으로 느껴진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saudade를 자기 민족의 영혼의 단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12년 포르투갈의 작가 아우브리 벨 (Aubrey Bell)은 saudade를 이렇게 풀었다.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그것은 지나가 버린 것일 수도 있고,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일 수도 있다."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그것은 지나가 버린 것일 수도 있고,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일 수도 있다."
이 문장을 보면 단순히 '그리움'이라는 단어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saudade라는 단어가 불러오는 마음속의 풍경은 이 다음 뜻에 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말하는 saudade에는 그리움으로 인한 슬픔만이 있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saudade는 오히려 간직하는 일에 가깝다. 내 곁에서 떠나보낸 사람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이미 사라진 어느 찰나의 빛을. 내 삶에서 이미 떠나 버린 그것이 나의 마음속에서 천천히 익어 가도록 품고 있는 일.
이 문장을 보면 단순히 '그리움'이라는 단어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saudade라는 단어가 불러오는 마음속의 풍경은 이 다음 뜻에 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말하는 saudade에는 그리움으로 인한 슬픔만이 있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saudade는 오히려 간직하는 일에 가깝다. 내 곁에서 떠나보낸 사람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이미 사라진 어느 찰나의 빛을. 내 삶에서 이미 떠나 버린 그것이 나의 마음속에서 천천히 익어 가도록 품고 있는 일.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saudade는 슬픔의 모양으로 시작했지만, 그 슬픔을 오래 품으면서 그 형태는 조금씩 변한다. 모나고 차가웠던 슬픔은 그렇게 부드럽고 따뜻한 감정으로 남는다. 그래서 포르투갈 사람들은 saudade를 슬픔과 기쁨이 함께 머무른 자리라고 부른다. 내가 이 단어를 좋아하게 된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슬픔과 기쁨이 함께 머무르는 감정에 대한 단어가 있다니, 참 부러울 지경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saudade는 슬픔의 모양으로 시작했지만, 그 슬픔을 오래 품으면서 그 형태는 조금씩 변한다. 모나고 차가웠던 슬픔은 그렇게 부드럽고 따뜻한 감정으로 남는다. 그래서 포르투갈 사람들은 saudade를 슬픔과 기쁨이 함께 머무른 자리라고 부른다. 내가 이 단어를 좋아하게 된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슬픔과 기쁨이 함께 머무르는 감정에 대한 단어가 있다니, 참 부러울 지경이다.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음악 장르라고 부르는 파두(fado) 는 saudade의 음악이라고 불린다. 파두를 들으면 슬픔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슬픔은 무겁게 가라앉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를 침잠하게 하는, 슬픔에 기어코 잠식되게 하는 그런 슬픔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가 부엌 창가에 앉아 따뜻한 티를 마시는데, 따뜻한 티가 목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 누군가가 떠오르는 느낌. 그리고 그 사람과 그 시절을 떠올리자 콧노래가 흥얼거려지기도 하는, 그런 슬픔이다. 슬픔이라는 그릇에 따뜻함이라는 물이 가득 차 있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어떤 도시를 떠올림과 동시에, 내가 언젠가 그곳에서 분명히 살았던 것 같은 감각이 밀려오는 순간. 바로 이것이 saudade의 풍경일 것이다.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음악 장르라고 부르는 파두(fado) 는 saudade의 음악이라고 불린다. 파두를 들으면 슬픔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슬픔은 무겁게 가라앉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를 침잠하게 하는, 슬픔에 기어코 잠식되게 하는 그런 슬픔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가 부엌 창가에 앉아 따뜻한 티를 마시는데, 따뜻한 티가 목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 누군가가 떠오르는 느낌. 그리고 그 사람과 그 시절을 떠올리자 콧노래가 흥얼거려지기도 하는, 그런 슬픔이다. 슬픔이라는 그릇에 따뜻함이라는 물이 가득 차 있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어떤 도시를 떠올림과 동시에, 내가 언젠가 그곳에서 분명히 살았던 것 같은 감각이 밀려오는 순간. 바로 이것이 saudade의 풍경일 것이다.
saudade는 부재의 감정을 넘어선 현존의 감정이다. 떠난 것이 떠나며 증발되는 것이 아니라, 떠남으로써 자기 안에 다른 형태로 남아 있는 일. 포르투갈 사람들은 Tenho saudades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고 했다. 직역하면 '나는 saudades를 가지고 있다' 는 뜻이다.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평범한 인사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saudade 단어를 곱씹어 보면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 자체를 내 마음에 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saudade는 부재의 감정을 넘어선 현존의 감정이다. 떠난 것이 떠나며 증발되는 것이 아니라, 떠남으로써 자기 안에 다른 형태로 남아 있는 일. 포르투갈 사람들은 Tenho saudades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고 했다. 직역하면 '나는 saudades를 가지고 있다' 는 뜻이다.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평범한 인사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saudade 단어를 곱씹어 보면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 자체를 내 마음에 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내게서 떠나도 그 그리움이 내 안에 영영 머물고 있는 것. 잘 가요. 잊지 않을게요. 그 이상의 언어. 당신은 떠나지만,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내 안에 다른 형태로 남을 거예요. 그리고 새로운 형태로 자라나 나의 기쁨이 될 거예요. 라고 말하는 듯한 언어에 나는 깊이 매료된다.
누군가가 내게서 떠나도 그 그리움이 내 안에 영영 머물고 있는 것. 잘 가요. 잊지 않을게요. 그 이상의 언어. 당신은 떠나지만,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내 안에 다른 형태로 남을 거예요. 그리고 새로운 형태로 자라나 나의 기쁨이 될 거예요. 라고 말하는 듯한 언어에 나는 깊이 매료된다.
saudade가 없는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 그리움은 슬픔에서 그친다. 부재의 대상을 떠올리면 슬퍼지는 것. 그렇게 그리움이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다. 그리움은 부재의 감정이라고 믿는 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포르투갈 사람들은 saudade라는 단어로 그리움 안에 머무는 기쁨을, 그리움 안에서 새로이 태어난 기쁨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슬픔과 기쁨이 함께 공존하는 그 자리에서.
saudade가 없는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 그리움은 슬픔에서 그친다. 부재의 대상을 떠올리면 슬퍼지는 것. 그렇게 그리움이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다. 그리움은 부재의 감정이라고 믿는 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포르투갈 사람들은 saudade라는 단어로 그리움 안에 머무는 기쁨을, 그리움 안에서 새로이 태어난 기쁨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슬픔과 기쁨이 함께 공존하는 그 자리에서.
한과 saudade는 같은 슬픔인가, 다른 슬픔인가. 피상적으로 보면, 두 단어는 비슷하게 느껴진다. 둘 다 흐르지 않고 머무는 슬픔이고, 둘 다 영혼의 단어로 불리며, 둘 다 다른 언어로는 쉽게 번역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단어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 단어를 해부하듯이 살펴보자.
한과 saudade는 같은 슬픔인가, 다른 슬픔인가. 피상적으로 보면, 두 단어는 비슷하게 느껴진다. 둘 다 흐르지 않고 머무는 슬픔이고, 둘 다 영혼의 단어로 불리며, 둘 다 다른 언어로는 쉽게 번역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단어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 단어를 해부하듯이 살펴보자.
한은 놓지 않는 슬픔이다. 잃어버린 것을 끝내 놓지 않고, 그 자리에 옹이가 되어 머무는 단단함. 그러므로 한의 본질은 맺힘이고, 맺힘의 본질은 지속에 있을 것이다. 지속된 것만이 맺혀 있을 수 있다. saudade는 함께 머무는 슬픔이다. 한이 마음에서 놓지 않는 슬픔이라면, saudade는 마음에 들여놓는 슬픔인 것이다. 잃어버린 것을 다른 형태로 내 안에 살아 있게 하는 것. 그 속에서 부드러움으로 재탄생되는 것. 그러므로 saudade의 본질은 현존이고, 현존의 본질은 변환에 있을 것이다. 변환되었기 때문에 현존할 수 있다.
한은 놓지 않는 슬픔이다. 잃어버린 것을 끝내 놓지 않고, 그 자리에 옹이가 되어 머무는 단단함. 그러므로 한의 본질은 맺힘이고, 맺힘의 본질은 지속에 있을 것이다. 지속된 것만이 맺혀 있을 수 있다. saudade는 함께 머무는 슬픔이다. 한이 마음에서 놓지 않는 슬픔이라면, saudade는 마음에 들여놓는 슬픔인 것이다. 잃어버린 것을 다른 형태로 내 안에 살아 있게 하는 것. 그 속에서 부드러움으로 재탄생되는 것. 그러므로 saudade의 본질은 현존이고, 현존의 본질은 변환에 있을 것이다. 변환되었기 때문에 현존할 수 있다.
같은 슬픔에 대해 한국어는 단단하게 박힌 옹이로 보고, 포르투갈어는 함께 살아가는 그림자로 본다. 같은 상실에 대하여 한국어는 맺히는 자리로 보고, 포르투갈어는 변환되는 자리로 본다. 이것은 누가 더 옳은가. 어느 쪽이 더 맞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두 언어가 각자 한 감정을 바라보는 다른 도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같은 슬픔에 대해 한국어는 단단하게 박힌 옹이로 보고, 포르투갈어는 함께 살아가는 그림자로 본다. 같은 상실에 대하여 한국어는 맺히는 자리로 보고, 포르투갈어는 변환되는 자리로 본다. 이것은 누가 더 옳은가. 어느 쪽이 더 맞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두 언어가 각자 한 감정을 바라보는 다른 도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언어는 단순한 라벨이 아니다. 언어는 세계관이다. 같은 슬픔에 대해 '한'이라는 단어로 슬픔을 해석하는 사람과 'saudade'라는 단어로 슬픔을 해석하는 사람은 다른 슬픔을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단어가 우리 마음에 펼쳐지는 풍경을 만든다. 단어가 우리 마음에 감정의 자리를 만든다. 그렇게 단어는 그 사람이 살아갈 세계의 윤곽을 만든다.
그러니까 언어는 단순한 라벨이 아니다. 언어는 세계관이다. 같은 슬픔에 대해 '한'이라는 단어로 슬픔을 해석하는 사람과 'saudade'라는 단어로 슬픔을 해석하는 사람은 다른 슬픔을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단어가 우리 마음에 펼쳐지는 풍경을 만든다. 단어가 우리 마음에 감정의 자리를 만든다. 그렇게 단어는 그 사람이 살아갈 세계의 윤곽을 만든다.
한 민족의 단어가 그 민족이 살아갈 세계를 만든다. 이 문장을 적고 나니,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한 민족의 단어가 그 민족이 살아갈 세계를 만든다. 이 문장을 적고 나니,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한 민족에게 자기만의 단어가 있었듯, 한 사람에게도 자기만의 단어가 있을 수 있는가.
한 민족에게 자기만의 단어가 있었듯, 한 사람에게도 자기만의 단어가 있을 수 있는가.
작년, 나는 암 투병을 하며 참 많은 책을 읽었다. 내가 가는 곳이 어디든 책 한 권 혹은 이북리더기 한 대를 늘 챙겨서 다니곤 했는데, 늘 책을 품고 다니는 내게 지인들은 물었다. "요즘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던 책이 뭐였어?" 그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답하곤 했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작년, 나는 암 투병을 하며 참 많은 책을 읽었다. 내가 가는 곳이 어디든 책 한 권 혹은 이북리더기 한 대를 늘 챙겨서 다니곤 했는데, 늘 책을 품고 다니는 내게 지인들은 물었다. "요즘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던 책이 뭐였어?" 그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답하곤 했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평론가의 저서,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책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문단이 있다.
신형철 평론가의 저서,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책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문단이 있다.
"나는 해석자다. 해석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해석은 기술이기 때문에 비평은 직업이 될 수 있다. (...) 해석자는 이미 완성돼 있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끌어내면서 전달한다. 그러므로 해석은 일종의 창조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지만, 잠재적 유에서 현실적 유를, 감각적 유에서 논리적 유를 창조해낼 수는 있다. 원칙적으로 해석은 무한할 수 있지만, 모든 해석이 평등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 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있다. (...) 그런 의미에서 해석은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다. 작품을 '까는' 것이 아니라 '낳는' 일이다. 해석은 인식의 산파술이다."
"나는 해석자다. 해석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해석은 기술이기 때문에 비평은 직업이 될 수 있다. (...) 해석자는 이미 완성돼 있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끌어내면서 전달한다. 그러므로 해석은 일종의 창조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지만, 잠재적 유에서 현실적 유를, 감각적 유에서 논리적 유를 창조해낼 수는 있다. 원칙적으로 해석은 무한할 수 있지만, 모든 해석이 평등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 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있다. (...) 그런 의미에서 해석은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다. 작품을 '까는' 것이 아니라 '낳는' 일이다. 해석은 인식의 산파술이다."
이 문단을 읽었을 때, 나는 겨우 한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책을 덮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언가가 맞춰지는 감각에 집중하기 위해 가만히, 고요하게, 멍하니.
이 문단을 읽었을 때, 나는 겨우 한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책을 덮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언가가 맞춰지는 감각에 집중하기 위해 가만히, 고요하게, 멍하니.
내 마음에는 그 전까지 이름 없이 떠도는, 그래서 이따금씩 찾아오지만 명명할 수 없어 흩어지고야 마는 어떤 자리가 있었다. 나는 정답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정답이 없다는 것만이 내가 유일하게 믿는 정답이었다. 나는 침묵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들은 늘 분명하게 존재했다. 그 말들이 내 안의 침묵을 계속해서 깨뜨렸다. 나는 누군가의 인생에 답을 주는 일은 오만하다고 느꼈고, 동시에 누군가의 인생을 향해 말을 거는 일을 멈추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답도 아니고 침묵도 아닌, 그 사이의 자리. 그 자리가 무엇인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는 그 전까지 이름 없이 떠도는, 그래서 이따금씩 찾아오지만 명명할 수 없어 흩어지고야 마는 어떤 자리가 있었다. 나는 정답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정답이 없다는 것만이 내가 유일하게 믿는 정답이었다. 나는 침묵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들은 늘 분명하게 존재했다. 그 말들이 내 안의 침묵을 계속해서 깨뜨렸다. 나는 누군가의 인생에 답을 주는 일은 오만하다고 느꼈고, 동시에 누군가의 인생을 향해 말을 거는 일을 멈추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답도 아니고 침묵도 아닌, 그 사이의 자리. 그 자리가 무엇인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단을 만났을 때, 마침내 그 자리에 이름이 생긴 것이다. 해석자.
그런데 이 문단을 만났을 때, 마침내 그 자리에 이름이 생긴 것이다. 해석자.
해석자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침묵하지도 않는다. 해석자는 작품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끌어내는 사람이다. 그것은 정답을 만드는 일도, 정답을 가르치는 일도, 누군가의 정답을 베끼는 일도 아니다. 해석자로 산다는 것은 이미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일. 잠재적 유를 현실적 유로, 감각적 유를 논리적 유로 길어 올리는 일이었다.
해석자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침묵하지도 않는다. 해석자는 작품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끌어내는 사람이다. 그것은 정답을 만드는 일도, 정답을 가르치는 일도, 누군가의 정답을 베끼는 일도 아니다. 해석자로 산다는 것은 이미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일. 잠재적 유를 현실적 유로, 감각적 유를 논리적 유로 길어 올리는 일이었다.
해석자. 이 한 단어가 내 안에 박힌 순간부터, 나는 해석자로 살겠노라 다짐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일평생 해석자로 살아왔으나, 그간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다가 이제서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으니 해석자로 살겠다고 다짐한 것에 가깝다. 그때부터 나는 암 투병을 하며 겪는 모든 상황들을 새로이 해석하기 시작했다. 잠재적 유에서 현실적인 유를 창조하며, 감각적 유에서 논리적인 유를 창조해 내며.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 잉태하고 있는 것들을 끌어내 나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석자. 이 한 단어가 내 안에 박힌 순간부터, 나는 해석자로 살겠노라 다짐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일평생 해석자로 살아왔으나, 그간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다가 이제서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으니 해석자로 살겠다고 다짐한 것에 가깝다. 그때부터 나는 암 투병을 하며 겪는 모든 상황들을 새로이 해석하기 시작했다. 잠재적 유에서 현실적인 유를 창조하며, 감각적 유에서 논리적인 유를 창조해 내며.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 잉태하고 있는 것들을 끌어내 나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며 방향을 묻는 친구들에게도 더 이상 답을 주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친구의 내면 안에 이미 있는 것을 함께 끌어내고자 했다. 그야말로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해석자로 살며, 암 투병을 하는 과정에서 맞이하게 된 크고 작은 슬픔과 고통들을 크고 작은 기쁨과 환희로 치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After Soyoon일 것이다.
내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며 방향을 묻는 친구들에게도 더 이상 답을 주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친구의 내면 안에 이미 있는 것을 함께 끌어내고자 했다. 그야말로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해석자로 살며, 암 투병을 하는 과정에서 맞이하게 된 크고 작은 슬픔과 고통들을 크고 작은 기쁨과 환희로 치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After Soyoon일 것이다.
만약, 해석자라는 단어가 내 삶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자리를 영영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정답을 주는 사람과 침묵하는 사람 사이를 평생 헤매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명명하지 못한 채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한 단어가 한 사람의 자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의 문단을 읽으며 강렬하게 깨달았다.
만약, 해석자라는 단어가 내 삶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자리를 영영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정답을 주는 사람과 침묵하는 사람 사이를 평생 헤매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명명하지 못한 채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한 단어가 한 사람의 자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의 문단을 읽으며 강렬하게 깨달았다.
4화 아티클 〈운명의 멱살을 움켜쥐며〉에 작성해 두었던 글을 재인용해 본다. "읽는다는 것은, 이름 없이 떠돌던 감각에 언어가 붙는 일이다." 그러므로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얻는 일이 아니다. 내 안에 이미 존재했지만,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던 것에 이름을 붙여 주는 일이다. 나와 같은 상황을, 나보다 먼저 마주했던 누군가가 길어 올린 단어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나를 도달시키는 일. 그 일이 바로 읽기일 것이다.
4화 아티클 〈운명의 멱살을 움켜쥐며〉에 작성해 두었던 글을 재인용해 본다. "읽는다는 것은, 이름 없이 떠돌던 감각에 언어가 붙는 일이다." 그러므로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얻는 일이 아니다. 내 안에 이미 존재했지만,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던 것에 이름을 붙여 주는 일이다. 나와 같은 상황을, 나보다 먼저 마주했던 누군가가 길어 올린 단어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나를 도달시키는 일. 그 일이 바로 읽기일 것이다.
읽기가 남이 길어 올린 단어를 나의 자리에 가져오는 일이라면, 쓰기는 그보다 더 특별한 일이다. 아직 누구도 길어 올리지 않은 단어를 내가 처음 길어 올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After Soyoon을 시작한 이후, 나는 매주 한 편의 긴 글과 수십 편의 짧은 글들을 쓴다. 글을 쓰는 행위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일이 수도 없이 반복되고, 엄지손톱을 깨물던 어린 시절의 습관이 다시 재현되는 일임을 깨닫는 요즘이다.
읽기가 남이 길어 올린 단어를 나의 자리에 가져오는 일이라면, 쓰기는 그보다 더 특별한 일이다. 아직 누구도 길어 올리지 않은 단어를 내가 처음 길어 올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After Soyoon을 시작한 이후, 나는 매주 한 편의 긴 글과 수십 편의 짧은 글들을 쓴다. 글을 쓰는 행위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일이 수도 없이 반복되고, 엄지손톱을 깨물던 어린 시절의 습관이 다시 재현되는 일임을 깨닫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쓴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단어로 나를 설명하고, 상황을 설명하고, 삶을 설명하는 일을 연습하기 위함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특히 해석자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늘 '빈 여백의 자리에 처음으로 이름 붙이는 일'을 매번 해내야만 한다. 이 일을 매주 혹은 매일 해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 고통을 통과한 자리에서는, 늘 환희가 찾아왔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쓴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단어로 나를 설명하고, 상황을 설명하고, 삶을 설명하는 일을 연습하기 위함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특히 해석자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늘 '빈 여백의 자리에 처음으로 이름 붙이는 일'을 매번 해내야만 한다. 이 일을 매주 혹은 매일 해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 고통을 통과한 자리에서는, 늘 환희가 찾아왔다.
5화의 아티클을 쓸 때 나는 '끝에 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언어의 한계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담지 못했다. 끝은 너무 평면적이었고, 경계는 너무 차갑게 느껴졌으며 변두리는 어딘가 촌스럽게 느껴졌다. 끝과 관련된 모든 단어를 탐색하다가, 한 단어를 길어 올렸다.
5화의 아티클을 쓸 때 나는 '끝에 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언어의 한계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담지 못했다. 끝은 너무 평면적이었고, 경계는 너무 차갑게 느껴졌으며 변두리는 어딘가 촌스럽게 느껴졌다. 끝과 관련된 모든 단어를 탐색하다가, 한 단어를 길어 올렸다.
"가장자리". 이제 다음 순서는 이 가장자리에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또 하나의 문장을 길어 올렸다.
"가장자리". 이제 다음 순서는 이 가장자리에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또 하나의 문장을 길어 올렸다.
"가장자리에서 용을 그리는 일"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Hic sunt dracones"가 파편의 조각으로 내 머릿속을 떠다니다가,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마친 것이다. 내가 보았던 "Hic sunt dracones"는 본래 경고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으나, 나는 이것을 모름의 경계로 해석하고자 했다. 그렇게 모름을 모른다고 인정함으로써 앎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나의 고유한 해석이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잠재적 유를 현실적 유로 길어 올린 끝에 나온 글이 "여기에 용이 있다" 글의 전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장자리에서 용을 그리는 일"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Hic sunt dracones"가 파편의 조각으로 내 머릿속을 떠다니다가,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마친 것이다. 내가 보았던 "Hic sunt dracones"는 본래 경고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으나, 나는 이것을 모름의 경계로 해석하고자 했다. 그렇게 모름을 모른다고 인정함으로써 앎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나의 고유한 해석이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잠재적 유를 현실적 유로 길어 올린 끝에 나온 글이 "여기에 용이 있다" 글의 전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든 헌트 레녹스 지구본을 보고 "Hic sunt dracones"를 발견할 수는 있겠으나, 나와 같은 해석은 하지 못하리라. 이 해석은 나의 고유한 해석이라고 자부할 때, 글을 쓰던 고통은 환희로 변환된다.
누구든 헌트 레녹스 지구본을 보고 "Hic sunt dracones"를 발견할 수는 있겠으나, 나와 같은 해석은 하지 못하리라. 이 해석은 나의 고유한 해석이라고 자부할 때, 글을 쓰던 고통은 환희로 변환된다.
After Soyoon에는 토대가 되는 몇 개의 문장이 있다.
After Soyoon에는 토대가 되는 몇 개의 문장이 있다.
끝에 서야 비로소 보인다.
정답 이후의 질문.
해석이 삶을 결정한다.
끝에 서야 비로소 보인다.
정답 이후의 질문.
해석이 삶을 결정한다.
이 문장들은 모두 내가 흘러가는 고통에 형태를 주는 일, 쓰기를 통해 유에서 유로 창조해 낸 문장들이다. 그런 측면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받아 적는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쓰는 행위가 정말 중요한 이유는 우리 내면에 이름 없이 떠돌던 감각을 처음으로 태어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 문장들은 모두 내가 흘러가는 고통에 형태를 주는 일, 쓰기를 통해 유에서 유로 창조해 낸 문장들이다. 그런 측면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받아 적는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쓰는 행위가 정말 중요한 이유는 우리 내면에 이름 없이 떠돌던 감각을 처음으로 태어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A.F.T.E.R 프레임에서 T에 해당하는 TEXT는 읽기와 쓰기를 의미한다. 읽기로 나를 대변할 언어를 발견하고, 쓰기로 세상에 없던 단어를 길어 올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책을 읽으며 내가 줄곧 느꼈지만 이름 붙이지 못했던 자리를 발견하고, 자기 자신의 글을 쓰며 누구도 아직 명명하지 못한 새로운 자리를 길어 올린다. 이 두 가지 작업이 한 사람의 평생에 걸쳐 진행되면, 그 사람의 삶은 '자기만의 사전'을 획득하게 된다.
A.F.T.E.R 프레임에서 T에 해당하는 TEXT는 읽기와 쓰기를 의미한다. 읽기로 나를 대변할 언어를 발견하고, 쓰기로 세상에 없던 단어를 길어 올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책을 읽으며 내가 줄곧 느꼈지만 이름 붙이지 못했던 자리를 발견하고, 자기 자신의 글을 쓰며 누구도 아직 명명하지 못한 새로운 자리를 길어 올린다. 이 두 가지 작업이 한 사람의 평생에 걸쳐 진행되면, 그 사람의 삶은 '자기만의 사전'을 획득하게 된다.
그 사전 안의 단어들은 어떤 외국어로도, 심지어 모국어로도 쉽게 번역되지 않을 것이다. 그 단어들은 그 사람의 세계 안에서만 정확한 자리를 갖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만의 단어를 가진다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는 일일 것이다.
그 사전 안의 단어들은 어떤 외국어로도, 심지어 모국어로도 쉽게 번역되지 않을 것이다. 그 단어들은 그 사람의 세계 안에서만 정확한 자리를 갖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만의 단어를 가진다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는 일일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에게 한이 있고 포르투갈 사람에게 saudade가 있듯, 한 사람에게도 자기만의 한이 있고 자기만의 saudade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한 단어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문장일 수도 있고, 한 단락일 수도 있으며, 책 한 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자기만의 단어를 가지고 있는가, 자신의 내면에 펼쳐지는 풍경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자기만의 언어를 가졌는가. 이것이 한 사람이 얼마나 선명한 자기 세계를 가졌는가를 가르는 기준이다.
대한민국 사람에게 한이 있고 포르투갈 사람에게 saudade가 있듯, 한 사람에게도 자기만의 한이 있고 자기만의 saudade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한 단어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문장일 수도 있고, 한 단락일 수도 있으며, 책 한 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자기만의 단어를 가지고 있는가, 자신의 내면에 펼쳐지는 풍경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자기만의 언어를 가졌는가. 이것이 한 사람이 얼마나 선명한 자기 세계를 가졌는가를 가르는 기준이다.
당신은 자기만의 단어를 가지고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쉬이 번역되지 않는 그 단어를.
당신은 자기만의 단어를 가지고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쉬이 번역되지 않는 그 단어를.
당신의 가슴 한가운데서 일렁이지만, 그 어떤 사전에도 정확히 등재되어 있지 않은 그 자리.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려 해도 쉽게 번역이 되지 않는 그 자리. 그것을 명명할 자기만의 단어를 가지고 있는가.
당신의 가슴 한가운데서 일렁이지만, 그 어떤 사전에도 정확히 등재되어 있지 않은 그 자리.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려 해도 쉽게 번역이 되지 않는 그 자리. 그것을 명명할 자기만의 단어를 가지고 있는가.
만약 아직 그 단어를 가지지 못했다면, 두 가지 일을 시작함으로써 당신은 자기만의 단어를 가질 수 있다. 읽는 일과 쓰는 일. 좋은 글을 읽으며 자기 안에 떠돌던 감각에 이름 붙일 수 있는 단어를 찾고, 나만의 글을 쓰며(그것이 이 아티클처럼 11000자에 달하는 긴 글이 아니라, 아주 짧은 일기여도 괜찮다.) 아직 누구도 명명하지 못한 단어에 처음으로 이름 붙이는 일을 시작해보자.
만약 아직 그 단어를 가지지 못했다면, 두 가지 일을 시작함으로써 당신은 자기만의 단어를 가질 수 있다. 읽는 일과 쓰는 일. 좋은 글을 읽으며 자기 안에 떠돌던 감각에 이름 붙일 수 있는 단어를 찾고, 나만의 글을 쓰며(그것이 이 아티클처럼 11000자에 달하는 긴 글이 아니라, 아주 짧은 일기여도 괜찮다.) 아직 누구도 명명하지 못한 단어에 처음으로 이름 붙이는 일을 시작해보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 그의 말을 나의 언어로 재해석하자면, 해석이 삶을 결정한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가진 만큼 세계를 살아낼 수 있고, 해석하는 만큼 삶을 다채롭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세계의 크기를 결정하는 일은 결국 어떤 언어를 발견해 나의 것으로 만드는가. 그리고 나의 심연에서 어떤 언어를 길어 올리는가에 달려있다. 한 사람의 평생은 어쩌면 자기만의 사전을 천천히 써 내려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 그의 말을 나의 언어로 재해석하자면, 해석이 삶을 결정한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가진 만큼 세계를 살아낼 수 있고, 해석하는 만큼 삶을 다채롭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세계의 크기를 결정하는 일은 결국 어떤 언어를 발견해 나의 것으로 만드는가. 그리고 나의 심연에서 어떤 언어를 길어 올리는가에 달려있다. 한 사람의 평생은 어쩌면 자기만의 사전을 천천히 써 내려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긴 글의 끝에서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사전에는, 어떤 단어가 적혀가고 있는가.
그러므로 나는 긴 글의 끝에서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사전에는, 어떤 단어가 적혀가고 있는가.
참고 자료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Aubrey F. G. Bell, In Portugal, John Lane, 191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논리-철학 논고』, 1922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맺히다"
참고 자료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Aubrey F. G. Bell, In Portugal, John Lane, 191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논리-철학 논고』, 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