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풀밭에 앉아 한참을 무언가 찾곤 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가끔 풀밭에 앉아 무언가를 한참 찾곤 한다.
어린 나와 어른이 된 내가 서 있는 곳은 세 잎이 가득한 풀밭이다. 온통 세 잎이 가득한 풀밭에서 네 잎을 가진 클로버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로 풀을 헤치며 단 하나의 변이를 찾아 헤맨다. 어떤 날에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던 것이, 어떤 날에는 정말 쉽게 발견되기도 한다. 정말 행운이 그런 것처럼. 그럴 때는 히죽히죽 웃으며 네잎클로버를 살며시 꺾어 가방에 있던 노트 혹은 책 사이에 곱게 끼워둔다.
손 코팅지를 사서 네잎클로버를 코팅한다. 모양은 투박하지만 상관없다. 행운은 코팅을 잘 하고 못 하고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 이 모든 행위는 네잎클로버가 품고 있는 행운을 영원히 가두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은가. 코팅된 네잎클로버의 행운이 아주 오래 내 곁에 머물기를 바랄 뿐이다.
요즘은 길거리에 반듯하게 코팅된 네잎클로버가 즐비하다. 키링, 책갈피를 넘어서 최근에는 무인 네잎클로버 가게도 보았다. 사실 가게는커녕, 좌판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형태였다. 접이식 테이블에 코팅된 네잎클로버를 가득 올려 두고 자신의 계좌 번호를 적어둔 그는 계좌 번호 아래 이런 문구를 적어두었다. "훔쳐 간 행운에는 효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네잎클로버가 행운의 상징이 된 이야기를 모르는 듯 하다.
기독교의 오랜 전설에 따르면, 최초의 네잎클로버를 손에 쥔 사람은 이브였다. 아담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던 순간, 이브는 풀밭에서 클로버 한 장을 꺾어 손에 쥐었다. 에덴동산에서 훔쳐 온 한 장의 풀잎, 그것이 바로 네잎클로버다. 이브는 왜 네잎클로버를 가져왔을까. 잃어버리게 될 낙원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낙원에서 쫓겨나는 순간, 상실의 자리에서 손에 쥔 한 장의 잎이 네잎클로버인 것이다. 낙원이라는 행운 자체를 잃는 순간에 쥔 것을 우리가 행운이라고 부르다니. 우리가 행운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사실은 낙원을 잃는 순간에 태어났다니!
그래서 오늘은 아주 작은 풀잎 하나, 네 장의 잎을 가진 풀잎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펼쳐보려 한다. 세 잎이 평범한 답인 자리에서 네 번째 잎이 솟아나는 일. 그 변이의 자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하여.
네잎클로버가 태어나는 자리
May 16, 2026
행운은 짓밟힌 자리에서 온다
짓밟힌 자리가 끝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그곳에서 어떤 네 번째 잎을 피워낼 수 있는가?
01
어릴 적 나는 풀밭에 앉아 한참을 무언가 찾곤 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가끔 풀밭에 앉아 무언가를 한참 찾곤 한다.
어린 나와 어른이 된 내가 서 있는 곳은 세 잎이 가득한 풀밭이다. 온통 세 잎이 가득한 풀밭에서 네 잎을 가진 클로버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로 풀을 헤치며 단 하나의 변이를 찾아 헤맨다. 어떤 날에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던 것이, 어떤 날에는 정말 쉽게 발견되기도 한다. 정말 행운이 그런 것처럼. 그럴 때는 히죽히죽 웃으며 네잎클로버를 살며시 꺾어 가방에 있던 노트 혹은 책 사이에 곱게 끼워둔다.
손 코팅지를 사서 네잎클로버를 코팅한다. 모양은 투박하지만 상관없다. 행운은 코팅을 잘 하고 못 하고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 이 모든 행위는 네잎클로버가 품고 있는 행운을 영원히 가두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은가. 코팅된 네잎클로버의 행운이 아주 오래 내 곁에 머물기를 바랄 뿐이다.
요즘은 길거리에 반듯하게 코팅된 네잎클로버가 즐비하다. 키링, 책갈피를 넘어서 최근에는 무인 네잎클로버 가게도 보았다. 사실 가게는커녕, 좌판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형태였다. 접이식 테이블에 코팅된 네잎클로버를 가득 올려 두고 자신의 계좌 번호를 적어둔 그는 계좌 번호 아래 이런 문구를 적어두었다. "훔쳐 간 행운에는 효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네잎클로버가 행운의 상징이 된 이야기를 모르는 듯 하다.
기독교의 오랜 전설에 따르면, 최초의 네잎클로버를 손에 쥔 사람은 이브였다. 아담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던 순간, 이브는 풀밭에서 클로버 한 장을 꺾어 손에 쥐었다. 에덴동산에서 훔쳐 온 한 장의 풀잎, 그것이 바로 네잎클로버다. 이브는 왜 네잎클로버를 가져왔을까. 잃어버리게 될 낙원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낙원에서 쫓겨나는 순간, 상실의 자리에서 손에 쥔 한 장의 잎이 네잎클로버인 것이다. 낙원이라는 행운 자체를 잃는 순간에 쥔 것을 우리가 행운이라고 부르다니. 우리가 행운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사실은 낙원을 잃는 순간에 태어났다니!
그래서 오늘은 아주 작은 풀잎 하나, 네 장의 잎을 가진 풀잎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펼쳐보려 한다. 세 잎이 평범한 답인 자리에서 네 번째 잎이 솟아나는 일. 그 변이의 자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하여.
네잎클로버가 태어나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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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16, 2026
행운은 짓밟힌 자리에서 온다
짓밟힌 자리가 끝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그곳에서 어떤 네 번째 잎을 피워낼 수 있는가?
After Soyoon
어릴 적 나는 풀밭에 앉아 한참을 무언가 찾곤 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가끔 풀밭에 앉아 무언가를 한참 찾곤 한다.
어린 나와 어른이 된 내가 서 있는 곳은 세 잎이 가득한 풀밭이다. 온통 세 잎이 가득한 풀밭에서 네 잎을 가진 클로버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로 풀을 헤치며 단 하나의 변이를 찾아 헤맨다. 어떤 날에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던 것이, 어떤 날에는 정말 쉽게 발견되기도 한다. 정말 행운이 그런 것처럼. 그럴 때는 히죽히죽 웃으며 네잎클로버를 살며시 꺾어 가방에 있던 노트 혹은 책 사이에 곱게 끼워둔다.
손 코팅지를 사서 네잎클로버를 코팅한다. 모양은 투박하지만 상관없다. 행운은 코팅을 잘 하고 못 하고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 이 모든 행위는 네잎클로버가 품고 있는 행운을 영원히 가두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은가. 코팅된 네잎클로버의 행운이 아주 오래 내 곁에 머물기를 바랄 뿐이다.
요즘은 길거리에 반듯하게 코팅된 네잎클로버가 즐비하다. 키링, 책갈피를 넘어서 최근에는 무인 네잎클로버 가게도 보았다. 사실 가게는커녕, 좌판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형태였다. 접이식 테이블에 코팅된 네잎클로버를 가득 올려 두고 자신의 계좌 번호를 적어둔 그는 계좌 번호 아래 이런 문구를 적어두었다. "훔쳐 간 행운에는 효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네잎클로버가 행운의 상징이 된 이야기를 모르는 듯 하다.
기독교의 오랜 전설에 따르면, 최초의 네잎클로버를 손에 쥔 사람은 이브였다. 아담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던 순간, 이브는 풀밭에서 클로버 한 장을 꺾어 손에 쥐었다. 에덴동산에서 훔쳐 온 한 장의 풀잎, 그것이 바로 네잎클로버다. 이브는 왜 네잎클로버를 가져왔을까. 잃어버리게 될 낙원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낙원에서 쫓겨나는 순간, 상실의 자리에서 손에 쥔 한 장의 잎이 네잎클로버인 것이다. 낙원이라는 행운 자체를 잃는 순간에 쥔 것을 우리가 행운이라고 부르다니. 우리가 행운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사실은 낙원을 잃는 순간에 태어났다니!
그래서 오늘은 아주 작은 풀잎 하나, 네 장의 잎을 가진 풀잎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펼쳐보려 한다. 세 잎이 평범한 답인 자리에서 네 번째 잎이 솟아나는 일. 그 변이의 자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하여.
네잎클로버가 태어나는 자리
이브의 전설은 아름답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네잎클로버는 어떻게 태어나는 것일까. 낙원에서 온 것이 아니라면, 그 한 장의 잎은 대체 어느 자리에서 솟아나는 것일까.
네잎클로버는 약 5,000개 중에 한 개 정도 발견된다. 5,000개의 세잎클로버 중 하나의 변이로 일어나는 것이 네잎클로버라는 뜻이다. 그 희귀함 때문에 오래전부터 네잎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네잎클로버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은 1620년, 영국의 작가 존 멜튼(John Melton)의 기록이다.
"들판을 걷던 이가 네 잎 풀을 발견하면, 머지않아 좋은 일을 만나리라."
그러나 이 행운의 잎이 어떻게 태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식물학자들이 그 원인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네 번째 잎이 솟아나는 이유는 한 가지의 단순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변이와 변화라는 것이 어떻게 하나의 이유로만 진행될 수 있겠는가. 유전적 돌연변이는 그 중 하나의 이유가 된다.
어떤 클로버는 태어날 때부터 네 잎으로 자라는 열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네 잎으로 자라는 형질이 열성이라니.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우성이 아니라, 드러날 조건이 갖춰져야만 비로소 나타나는 열성 유전자라니! 어쩐지 더욱 마음이 간다. 물론, 환경적 요인도 있다. 인산이 풍부한 토양이나, 식물 호르몬 옥신의 작용이 변이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리고 흥미로운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보는 원인이기도 하다. 세잎클로버의 생장점이 손상되었을 때, 네 번째 잎이 솟아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생장점이란 식물이 새로운 잎을 만들어 내는 자리다. 그 자리에 어떤 자극이나 압력이 가해지면, 식물의 성장 프로그램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균열이 네 번째 잎이라는 다른 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짓밟힌 자리, 꺾인 자리, 어떤 식으로든 자극이 가해진 자리에서 변이는 더 자주 일어난다. 평온한 환경에서는 세 잎이 가장 자연스러운 답이다. 그러나 여러 형태의 자극을 받은 자리에서, 식물은 원래 알고 있던 답과 다른 답을 내놓는다. 그 결과로 주어진 것이 바로 네 번째 잎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우리는 어린 시절 풀밭에서 행운을 찾아 헤매었는데, 그 행운의 정체가 사실은 짓밟히고 꺾이고 자극을 당한 흔적이었다는 것이. 누군가의 발길이 닿아 짓이김을 당했던 자리. 어떤 식으로든 성장 과정에서 상처가 새겨졌던 자리. 그 자리에서 솟아난 잎이, 우리가 행운이라 이름 붙이는 네잎클로버다.
이렇게 적고 나니 이브가 낙원을 잃는 자리에서 네잎클로버를 손에 쥔 것이 합당하게 느껴진다. 평온한 자리에서는 평범한 답이 자란다. 짓밟힌 자리에서 비로소 다른 답이 솟아나는 것, 그것이 행운의 탄생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클로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짓밟힌 자리에서 다른 답이 솟아나는 일은, 어떠한 생명이 환경의 한계, 상황의 한계를 이겨내기 위해 새로운 답을 찾는 것은 모든 생명의 진화 방식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체는 평온한 환경에서는 어제의 자신을 반복한다. 그러나 흔들리고 꺾이고 짓밟히는, 평온하지 못한 환경에서는 어제와 다른 자신을 창조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생존할 수 있고 진화할 수 있으며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 그 변이를 온몸으로 살아낸 한 사람이 있다.
71세의 짓밟힘
1941년 3월. 71세의 한 화가가 프랑스 리옹의 한 병원에 누워 있었다. 그는 십이지장암을 진단받았다. 의사는 수술을 강행했다. 수술 자체는 성공적이었으나 심각한 합병증이 따라왔다. 화가는 며칠 동안 죽음의 문턱을 오갔다. 회복은 더디고 죽음의 세계에서 생의 세계로 넘어오는 여정은 험난했다. 그렇게 그는 침대에 누워 석 달의 시간을 보냈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기에 들어섰을 때, 화가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평생 붓을 쥐어왔던 그 손으로, 이제 그림을 그리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휠체어와 침대 사이만 오가는 몸에는, 이젤 앞에 설 체력도 조각을 깎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71세의 화가는, 그렇게 자신이 평생 해온 모든 것을 잃었다. 화가의 이름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다.
그의 이름 뒤에는 따라붙는 수식어가 많다. 색채의 대가. 20세기 회화의 거장. 야수파(Fauvism)의 창시자. 일평생 예술계를 뒤흔들었던 그가, 71세의 봄에 자신이 평생 키워 온 세 잎을 모두 잃었다. 붓도, 캔버스도, 이젤 앞에 설 수 있는 몸도. 그가 평생 지켜왔던 답이 질병에 의해 짓이겨졌다. 침대에 덩그러니 남은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상처투성이의 인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거기서 멈추었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다. 평생 그림을 그려 왔으니 이제 그만 그려도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내려놓고, 회복에만 전념하거나 혹은 상실감에 무력해져 점점 희미해지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사실은 사라져 가는 삶에 불과한 삶을. 그것이 대단히 불행하거나 불운한 일은 아니었다. 71세였으므로 그는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충분히 살았고 이미 충분한 명성도 얻었다. 그러니 내게 도래한 끝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마티스는 다른 답을 선택했다. 침대에 있는 71세의 화가가 끝이 아닌 시작을 선택한 것이다.
가위로 그리기
더 이상 붓을 들 수 없게 되었을 때, 마티스는 오래전부터 손에 익은 한 가지 도구로 눈을 돌렸다. 가위였다. 처음에는 그저 손을 움직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가위가 종이를 가르며 자유로운 형태를 만들어낼 때, 마티스는 무언가가 새롭게 열리는 감각을 느꼈다. 이 도구가 나의 새로운 붓이 되리라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을까.
사실 종이를 오려 형태를 만드는 일은,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수십 년 전부터 그는 무대나 의상을 디자인할 때 색종이를 잘라 밑그림을 잡곤 했다. 다만 그때까지는 그에게 오려진 색종이들은 준비를 위한 도구였을 뿐, 작품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침대 혹은 휠체어에 있어야 하기에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그 자리에서, 마티스는 그 도구를 쓰기로 결심한다. 준비의 도구였던 가위를, 완성의 도구로 삼기로 한 것이다.
마티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있어야 했으므로 작업은 단순하지 않았다. 마티스가 원하는 색을 고르면, 조수들이 그 색을 과슈로 종이에 칠했다. 마티스는 그렇게 색이 입혀진 종이를 들고, 가위로 종이를 자르며 형태를 만들어 갔다. 무릎 위에 판을 올려 두고 직접 자르기도 했고, 큰 작품들은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벽에 핀으로 붙여 가며 함께 완성했다.
마티스는 이것을 "가위로 그리기(drawing with scissors)" 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색으로 자르기(cutting into colour)" 라고도 정의했다. 붓이 색을 칠하는 일이었다면, 가위는 색을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미리 색이 칠해진 색종이는 이미 색을 지니고 있었고, 가위는 그 색에 형태를 부여했다. 색과 형태가 동시에 만나는 새로운 미감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종이 오리기(cut-outs), 마티스가 인생의 말년에 새로이 개척한 예술 장르였다.
1943년, 74세의 마티스는 Jazz라는 작품집을 시작한다. Jazz는 스무 점의 색채 판화로 구성된 아티스트 북으로 서커스의 곡예사, 추락하는 이카로스, 라군의 물결, 위태로운 줄타기 등이 그 작품집에 수록되어 있다. 마티스는 가위 하나로 자유로운 형태와 강렬한 색의 세계를 펼쳤다. 그의 명성에 걸맞은 야수처럼. 그렇게 1947년 출판된 Jazz는, 마티스의 손글씨 노트까지 함께 실린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는 더 이상 그림만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다. 이제는 글까지 쓰는 작가가 되었다. 71세의 짓밟힘 이후, 마티스는 글까지 쓰는 네 잎의 화가로 변이한 것이다.
Henri Matisse, Icare (Icarus), from Jazz, 1947. Buffalo AKG Art Museum. 마티스가 삶과 여행과 젊음에 대해 적어둔 노트의 일부와 이카루스.
마티스의 작품에는 멋진 작품들이 많지만, 나는 그가 말년에 남긴 작품들을 가장 사랑한다. Blue Nudes, Icarus, The Snail와 같은 작품들. 이 작품들은 나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마티스를 떠올릴 때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나는 이 작품들을 볼 때마다 침대와 휠체어를 오가며 꼼짝없이 가위질을 하는 한 노인을 본다. 절망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피워 낸 노년의 화가를.
마티스는 건강이라는 낙원을 잃으며 세 가지의 잎이 짓밟혔다. 어쩌면 그의 평생의 답이었을 세 개의 잎은 다음과 같다. 붓, 캔버스, 이젤. 그 세 가지를 잃은 그 자리에서 마티스는 네 번째 잎을 피워 냈다. 그렇게 피어난 네 번째 잎이, 마티스에게 불멸의 작가라는 행운을 선사한 것이다.
짓밟힌 자리에서 진짜 자아가 태어난다
마티스 본인은 자신의 변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가 직접 남긴 말을 들어보자.
"내가 병을 앓은 이후에 만든 작품들만이, 나의 진짜 자아를 이룬다. 자유롭고, 해방된."
그의 진짜 자아는 병을 앓은 이후의 작품 속에서 비로소 태어난 것이다. 그는 또 다른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두 번째 수술에서 회복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복했으니, 나는 빌린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떠오르는 해는 나에게 선물이며, 나는 그렇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마티스는 자신의 말년을 두 번째 삶, seconde vie라고 불렀다. 이 표현이 마음에 오래 머문다. 나 역시, 그와 같이 암 수술을 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을 때 두 번째 삶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두 번째 삶. 첫 번째 삶이 끝난 자리에서 시작된, 전혀 다른 삶. 마티스는 자신의 짓밟힘을 끝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는 그 지점을 시작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시작 너머에서 만난 자기 자신을, 71세 이전까지 살아온 그 어떠한 자신보다 더 진짜라고 말했다.
Henri Matisse, Nu bleu II (Blue Nude II), 1952. Centre Pompidou, Paris.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과 마주한다. 우리의 진짜 자아는 끝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티스는 상실과 고통의 자리에서 이전의 자아가 아닌 새로운 자아를 만났다. 가위를 들고 색을 해방하기 시작함으로써 만나게 된 새로운 자아가 그의 진짜 자아였다. 그러니까 평생을 붓으로 살아온 사람이, 71세에 가위를 들면서야 비로소 자신의 진짜 얼굴과 만났다고 고백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변이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변이는 평온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상처받고, 짓이겨지고, 밟히고, 손상되고, 무언가를 상실한 자리. 오직 그 자리에서만 변이는 일어난다. 다시 말해 상처와 짓이김과 상실은, 변이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다. 변이가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다.
세잎클로버가 짓밟히지 않았다면 네 번째 잎은 솟아날 필요가 없다. 세잎클로버가 짓이겨졌기 때문에 네 번째 잎이 솟아날 이유가 생긴 것이다. 마티스가 붓을 잃지 않았다면 가위를 든 새로운 자아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짓밟힘은 네 번째 잎의 조건이고 상실이 새로운 자아의 조건이다.
우리의 진짜 자아는 평온한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다. 그것은 짓밟힌 자리에서, 손상된 자리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자리에서만 피어난다.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하는 그 자리가, 사실은 진짜 자아가 태어나는 유일한 자리인 것이다.
변이를 행운으로 만드는 것은
무언가를 상실하는 자리가 우리의 진짜 자아가 태어나는 유일한 자리라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상실의 자리에 있다면 위로가 되겠지만, 만약 평온한 자리에 있다면 상당히 곤혹스러울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 곤경에 빠진 이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글을 쓰고자 노력한다. 그것이 늘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글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곤혹스러움에서 구조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지금부터 네잎클로버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을 더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네잎클로버가 행운의 상징이 된 것은 변이 자체가 행운이기 때문은 아니다. 인간들이 그것을 행운이라고 부르는 관점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변이를 두고 우리는 기형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네 잎은 열성 형질이 발현된 결과이며, 생물학적으로는 그저 잎 수의 변이일 뿐이다. 행운도, 기형도 아닌 하나의 변이인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행운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해석이라는 뜻이다. 해석에 따라 현상은 달라진다.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네잎클로버의 숫자, 4를 통해 알아보자. 서양에서 네 번째 잎이 행운의 상징이 되는 동안, 동아시아에서 숫자 4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4는 피해야 할 불길한 숫자가 되었다. 내가 매주 피클볼을 치러가는 코트는 4층에 있는데, 4층을 가기 위해 나는 늘 엘리베이터에서 F층을 누른다. 4층이라는 숫자 자체를 표기하는 것을 두려워할 만큼 불길하게 여기는 것이다.
같은 숫자 4를 두고, 한쪽은 행운을 보고 다른 한쪽은 죽음을 본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드는가. 숫자는 같으므로 숫자 그 자체는 차이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무엇이 차이를 만드는가. 그렇다, 그 숫자를바라보는 시선, 곧 해석이다.
네잎클로버도 그러했다. 누군가 처음으로 풀밭에서 그 작은 변이를 들여다보고, 흔하지 않은 잎을 보았으니 좋은 일이 생기는 신호일지 모른다고 해석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사람의 해석이 그 변이를 행운으로 만들었다. 이브의 전설도 마찬가지다. 낙원에서 추방되는 상실의 순간에 대해,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손에 쥔 한 장의 잎으로 해석함으로써, 상실의 자리를 기억의 증표로 바꾸었다. 그 해석이 없었다면, 그것은 그저 쫓겨남에 불과했을 것이다.
마티스도 그러했다. 그가 seconde vie라는 이름을 자신의 변이에 붙이지 않았다면, 그 시간은 그저 비극적인 말년의 회복기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티스는 그 시간을 두 번째 삶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빌린 시간 속에서 마주하는 매일의 태양을 선물로 해석했다. 그 해석이 71세에 운명에게 짓밟힌 그의 인생을 해방의 입구로 만든 것이다.
모든 변이는 자연스럽게 행운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짓밟힘은 자동으로 변이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선이, 누군가의 해석이 그 자리에 전혀 다른 이름을 붙일 때, 끝을 시작이라고 정의할 때, 그제야 비로소 그 자리는 변이가 되고 행운이 된다. After Soyoon을 통해 줄곧 말해온 한 문장을 다시 떠올린다. 해석이 삶을 결정한다. 짓밟힘이 변이가 되는 자리에서도, 그 명제는 어김없이 작동한다. 아니, 이 명제가 가장 정확하게 작동하는 지점이 바로 짓밟힘이 변이가 되는 자리일 것이다.
해석의 부재에서
해석이 존재한다면, 짓밟힘은 변이가 일어나는 자리가 된다. 상실은 행운이 탄생하는 지점이 된다. 그러나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는 짓밟힘만 남는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며 짓밟히는 경험을 한다. 어쩌면 삶을 산다는 것은 수많은 짓밟힘과 크고 작은 짓이겨짐을 견뎌 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떤 자극은 변이가 되고 어떤 자극은 손상으로만 끝난다. 어떤 손상은 행운이 되고 어떤 손상은 그저 상처로만 남는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 짓밟힘을 들여다보는 시선이다. 자극받고 손상받고 있는 그 지점에 대해 내가 무슨 질문을 하고 있는가다. 짓밟힌 자리에 그저 머물러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묻는다면, 그 자리는 상처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짓밟힌 자리를 들여다보고 이 자리에서 무엇이 솟아날 수 있을까라고 묻기 시작하면, 그 자리는 변이의 입구가 된다. 행운의 시작이 된다.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마티스는 가위를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이젤 앞에 서지 못하니 더 이상 화가가 아니라며 멈추지 않고, 그는 다른 방식으로 화가가 될 수 있을까를 물었다. 질문은 변이의 첫 단추다. 짓밟힘이 상처로만 머물지 않고 변이로 재탄생되기 위해서는 질문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자기만의 답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해석이다. 이 해석에 따라 나에게 펼쳐지는 행운이 달라진다.
자기계발은 종종 말한다. 어려움은 기회다. 그러나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 어려움은 기회가 아니다. 어려움은 그냥 어려움이다. 다만 어려움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어려움은 변이의 입구가 된다. 변이의 입구까지 도달해야만 어려움은 기회가 된다. 해석하지 못한다면 어려움은 어려움으로 남을 것이다. 짓밟힘은 그저 상처로만 남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에는, 짓밟힌 자리가 있는가.
인생의 방향을 잃은 자리. 사랑하는 누군가와 이별한 자리.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자리. 믿었던 정답이 무너진 자리.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그런 자리 위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 짓밟힘의 한가운데서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를 묻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네잎클로버는 우리에게 말한다. 짓밟힌 자리는 끝의 자리가 아니라 변이의 입구일 수 있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원래는 솟아날 이유가 없었던 네 번째 잎이 솟아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마티스는 한층 더 깊은 곳을 보여준다. 짓밟힘 이후에 피어난 그 잎이, 어쩌면 짓밟힘 이전의 세 잎보다 더 진짜 나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을.
나 역시 마티스와 같이 암 수술을 했다. 나도 그처럼 수술 후 후유증으로 손에 쥐고 있던 마이크를 잃었다. 그것이 변이가 될지 그저 상처로 남을지,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지금도 내 일기장에는 운명에게 짓밟히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가 될지 알지 못해 벌벌 떠는 내가 있다. 나는 그때 무척 두려웠다. 다른 환우들보다 6배는 더 큰 내 암이, 림프까지 전이된 그 모든 상황들이 내게 펼쳐졌을까. 어찌하여 운명은 내게 이리도 혹독하게 구는가.
그러나 나는 두려움 속에서도 묻고자 했다. 왜 나에게가 아니라 이 자리에서 무엇이 솟아날 수 있을까를 물었다. After Soyoon은 그 질문에서 시작된, 나의 네 번째 잎이다. 마티스가 붓을 잃은 자리에서 가위를 들었듯이, 나는 마이크를 잃은 자리에서 펜을 들었다.
나 역시 짓밟혔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짓밟힘 속에서 기어코 네 번째 잎을 피워낸 사람으로서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지금 어떤 자리에서 짓밟혔는가. 그 자리를 상처라고 부르고 있는가, 변이의 입구라고 부르고 있는가. 그 자리에서 왜 나에게를 묻고 있는가, 이 자리에서 무엇이 솟아날 수 있을까를 묻고 있는가.
이브가 낙원을 잃는 자리에서 네잎클로버를 손에 쥐었듯이. 마티스가 붓을 잃는 자리에서 가위를 들었듯이. 네 번째 잎은 늘 짓밟힌 자리에 있다. 평온한 자리가 아니라. 만약 당신이 상실의 자리, 손상의 자리, 짓밟히는 자리에 서 있다면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그 자리를 변이의 입구로 삼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진심으로 당신에게 축하를 건넨다. 당신은 새로운 잎을 피워낼 것이다. 그리고 그 잎을 통해 진짜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만끽할 것이다.
인용 원문
"Only what I created after my illness constitutes my real self: free, liberated." (내가 병을 앓은 이후에 만든 작품들만이, 나의 진짜 자아를 이룬다. 자유롭고, 해방된.)
"I didn't expect to recover from my second operation but since I did, I consider that I'm living on borrowed time. Every day that dawns is a gift to me and I take it in that way." (두 번째 수술에서 회복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복했으니, 나는 빌린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떠오르는 해는 나에게 선물이며, 나는 그렇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John Melton (1620): "If a man walking in the fields find any four-leaved grass, he shall in a small while after find some good thing." (들판을 걷던 이가 네 잎 풀을 발견하면, 머지않아 좋은 일을 만나리라.)
John Melton, 1620 - 네잎클로버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으로 알려져 있음.
네잎클로버 발생 원인(유전적 변이, 환경 요인, 생장점 손상): 위키백과 '네잎클로버' 항목 및 식물학 연구 자료
Henri Matisse, Jazz, Tériade, 1947
앙리 마티스의 투병과 종이오리기(cut-outs) 작업: The Museum of Modern Art, Henri Matisse: The Cut-Outs (2014); Hilary Spurling, Matisse the Master 등
마티스 인용 출처: 위 인용 원문 참조 (영문 미술·의학 사료에 수록)
이브의 전설은 아름답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네잎클로버는 어떻게 태어나는 것일까. 낙원에서 온 것이 아니라면, 그 한 장의 잎은 대체 어느 자리에서 솟아나는 것일까.
이브의 전설은 아름답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네잎클로버는 어떻게 태어나는 것일까. 낙원에서 온 것이 아니라면, 그 한 장의 잎은 대체 어느 자리에서 솟아나는 것일까.
네잎클로버는 약 5,000개 중에 한 개 정도 발견된다. 5,000개의 세잎클로버 중 하나의 변이로 일어나는 것이 네잎클로버라는 뜻이다. 그 희귀함 때문에 오래전부터 네잎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네잎클로버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은 1620년, 영국의 작가 존 멜튼(John Melton)의 기록이다.
네잎클로버는 약 5,000개 중에 한 개 정도 발견된다. 5,000개의 세잎클로버 중 하나의 변이로 일어나는 것이 네잎클로버라는 뜻이다. 그 희귀함 때문에 오래전부터 네잎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네잎클로버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은 1620년, 영국의 작가 존 멜튼(John Melton)의 기록이다.
"들판을 걷던 이가 네 잎 풀을 발견하면, 머지않아 좋은 일을 만나리라."
"들판을 걷던 이가 네 잎 풀을 발견하면, 머지않아 좋은 일을 만나리라."
그러나 이 행운의 잎이 어떻게 태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식물학자들이 그 원인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네 번째 잎이 솟아나는 이유는 한 가지의 단순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변이와 변화라는 것이 어떻게 하나의 이유로만 진행될 수 있겠는가. 유전적 돌연변이는 그 중 하나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 행운의 잎이 어떻게 태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식물학자들이 그 원인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네 번째 잎이 솟아나는 이유는 한 가지의 단순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변이와 변화라는 것이 어떻게 하나의 이유로만 진행될 수 있겠는가. 유전적 돌연변이는 그 중 하나의 이유가 된다.
어떤 클로버는 태어날 때부터 네 잎으로 자라는 열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네 잎으로 자라는 형질이 열성이라니.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우성이 아니라, 드러날 조건이 갖춰져야만 비로소 나타나는 열성 유전자라니! 어쩐지 더욱 마음이 간다. 물론, 환경적 요인도 있다. 인산이 풍부한 토양이나, 식물 호르몬 옥신의 작용이 변이를 유발하기도 한다.
어떤 클로버는 태어날 때부터 네 잎으로 자라는 열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네 잎으로 자라는 형질이 열성이라니.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우성이 아니라, 드러날 조건이 갖춰져야만 비로소 나타나는 열성 유전자라니! 어쩐지 더욱 마음이 간다. 물론, 환경적 요인도 있다. 인산이 풍부한 토양이나, 식물 호르몬 옥신의 작용이 변이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리고 흥미로운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보는 원인이기도 하다. 세잎클로버의 생장점이 손상되었을 때, 네 번째 잎이 솟아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생장점이란 식물이 새로운 잎을 만들어 내는 자리다. 그 자리에 어떤 자극이나 압력이 가해지면, 식물의 성장 프로그램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균열이 네 번째 잎이라는 다른 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보는 원인이기도 하다. 세잎클로버의 생장점이 손상되었을 때, 네 번째 잎이 솟아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생장점이란 식물이 새로운 잎을 만들어 내는 자리다. 그 자리에 어떤 자극이나 압력이 가해지면, 식물의 성장 프로그램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균열이 네 번째 잎이라는 다른 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짓밟힌 자리, 꺾인 자리, 어떤 식으로든 자극이 가해진 자리에서 변이는 더 자주 일어난다. 평온한 환경에서는 세 잎이 가장 자연스러운 답이다. 그러나 여러 형태의 자극을 받은 자리에서, 식물은 원래 알고 있던 답과 다른 답을 내놓는다. 그 결과로 주어진 것이 바로 네 번째 잎이다.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짓밟힌 자리, 꺾인 자리, 어떤 식으로든 자극이 가해진 자리에서 변이는 더 자주 일어난다. 평온한 환경에서는 세 잎이 가장 자연스러운 답이다. 그러나 여러 형태의 자극을 받은 자리에서, 식물은 원래 알고 있던 답과 다른 답을 내놓는다. 그 결과로 주어진 것이 바로 네 번째 잎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우리는 어린 시절 풀밭에서 행운을 찾아 헤매었는데, 그 행운의 정체가 사실은 짓밟히고 꺾이고 자극을 당한 흔적이었다는 것이. 누군가의 발길이 닿아 짓이김을 당했던 자리. 어떤 식으로든 성장 과정에서 상처가 새겨졌던 자리. 그 자리에서 솟아난 잎이, 우리가 행운이라 이름 붙이는 네잎클로버다.
흥미롭지 않은가. 우리는 어린 시절 풀밭에서 행운을 찾아 헤매었는데, 그 행운의 정체가 사실은 짓밟히고 꺾이고 자극을 당한 흔적이었다는 것이. 누군가의 발길이 닿아 짓이김을 당했던 자리. 어떤 식으로든 성장 과정에서 상처가 새겨졌던 자리. 그 자리에서 솟아난 잎이, 우리가 행운이라 이름 붙이는 네잎클로버다.
이렇게 적고 나니 이브가 낙원을 잃는 자리에서 네잎클로버를 손에 쥔 것이 합당하게 느껴진다. 평온한 자리에서는 평범한 답이 자란다. 짓밟힌 자리에서 비로소 다른 답이 솟아나는 것, 그것이 행운의 탄생일 것이다.
이렇게 적고 나니 이브가 낙원을 잃는 자리에서 네잎클로버를 손에 쥔 것이 합당하게 느껴진다. 평온한 자리에서는 평범한 답이 자란다. 짓밟힌 자리에서 비로소 다른 답이 솟아나는 것, 그것이 행운의 탄생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클로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짓밟힌 자리에서 다른 답이 솟아나는 일은, 어떠한 생명이 환경의 한계, 상황의 한계를 이겨내기 위해 새로운 답을 찾는 것은 모든 생명의 진화 방식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체는 평온한 환경에서는 어제의 자신을 반복한다. 그러나 흔들리고 꺾이고 짓밟히는, 평온하지 못한 환경에서는 어제와 다른 자신을 창조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생존할 수 있고 진화할 수 있으며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클로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짓밟힌 자리에서 다른 답이 솟아나는 일은, 어떠한 생명이 환경의 한계, 상황의 한계를 이겨내기 위해 새로운 답을 찾는 것은 모든 생명의 진화 방식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체는 평온한 환경에서는 어제의 자신을 반복한다. 그러나 흔들리고 꺾이고 짓밟히는, 평온하지 못한 환경에서는 어제와 다른 자신을 창조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생존할 수 있고 진화할 수 있으며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 그 변이를 온몸으로 살아낸 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여기, 그 변이를 온몸으로 살아낸 한 사람이 있다.
71세의 짓밟힘
71세의 짓밟힘
1941년 3월. 71세의 한 화가가 프랑스 리옹의 한 병원에 누워 있었다. 그는 십이지장암을 진단받았다. 의사는 수술을 강행했다. 수술 자체는 성공적이었으나 심각한 합병증이 따라왔다. 화가는 며칠 동안 죽음의 문턱을 오갔다. 회복은 더디고 죽음의 세계에서 생의 세계로 넘어오는 여정은 험난했다. 그렇게 그는 침대에 누워 석 달의 시간을 보냈다.
1941년 3월. 71세의 한 화가가 프랑스 리옹의 한 병원에 누워 있었다. 그는 십이지장암을 진단받았다. 의사는 수술을 강행했다. 수술 자체는 성공적이었으나 심각한 합병증이 따라왔다. 화가는 며칠 동안 죽음의 문턱을 오갔다. 회복은 더디고 죽음의 세계에서 생의 세계로 넘어오는 여정은 험난했다. 그렇게 그는 침대에 누워 석 달의 시간을 보냈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기에 들어섰을 때, 화가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평생 붓을 쥐어왔던 그 손으로, 이제 그림을 그리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휠체어와 침대 사이만 오가는 몸에는, 이젤 앞에 설 체력도 조각을 깎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기에 들어섰을 때, 화가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평생 붓을 쥐어왔던 그 손으로, 이제 그림을 그리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휠체어와 침대 사이만 오가는 몸에는, 이젤 앞에 설 체력도 조각을 깎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71세의 화가는, 그렇게 자신이 평생 해온 모든 것을 잃었다. 화가의 이름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다.
71세의 화가는, 그렇게 자신이 평생 해온 모든 것을 잃었다. 화가의 이름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다.
그의 이름 뒤에는 따라붙는 수식어가 많다. 색채의 대가. 20세기 회화의 거장. 야수파(Fauvism)의 창시자. 일평생 예술계를 뒤흔들었던 그가, 71세의 봄에 자신이 평생 키워 온 세 잎을 모두 잃었다. 붓도, 캔버스도, 이젤 앞에 설 수 있는 몸도. 그가 평생 지켜왔던 답이 질병에 의해 짓이겨졌다. 침대에 덩그러니 남은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상처투성이의 인간이었다.
그의 이름 뒤에는 따라붙는 수식어가 많다. 색채의 대가. 20세기 회화의 거장. 야수파(Fauvism)의 창시자. 일평생 예술계를 뒤흔들었던 그가, 71세의 봄에 자신이 평생 키워 온 세 잎을 모두 잃었다. 붓도, 캔버스도, 이젤 앞에 설 수 있는 몸도. 그가 평생 지켜왔던 답이 질병에 의해 짓이겨졌다. 침대에 덩그러니 남은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상처투성이의 인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거기서 멈추었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다. 평생 그림을 그려 왔으니 이제 그만 그려도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내려놓고, 회복에만 전념하거나 혹은 상실감에 무력해져 점점 희미해지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사실은 사라져 가는 삶에 불과한 삶을. 그것이 대단히 불행하거나 불운한 일은 아니었다. 71세였으므로 그는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충분히 살았고 이미 충분한 명성도 얻었다. 그러니 내게 도래한 끝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거기서 멈추었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다. 평생 그림을 그려 왔으니 이제 그만 그려도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내려놓고, 회복에만 전념하거나 혹은 상실감에 무력해져 점점 희미해지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사실은 사라져 가는 삶에 불과한 삶을. 그것이 대단히 불행하거나 불운한 일은 아니었다. 71세였으므로 그는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충분히 살았고 이미 충분한 명성도 얻었다. 그러니 내게 도래한 끝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마티스는 다른 답을 선택했다. 침대에 있는 71세의 화가가 끝이 아닌 시작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마티스는 다른 답을 선택했다. 침대에 있는 71세의 화가가 끝이 아닌 시작을 선택한 것이다.
가위로 그리기
가위로 그리기
더 이상 붓을 들 수 없게 되었을 때, 마티스는 오래전부터 손에 익은 한 가지 도구로 눈을 돌렸다. 가위였다. 처음에는 그저 손을 움직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가위가 종이를 가르며 자유로운 형태를 만들어낼 때, 마티스는 무언가가 새롭게 열리는 감각을 느꼈다. 이 도구가 나의 새로운 붓이 되리라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을까.
더 이상 붓을 들 수 없게 되었을 때, 마티스는 오래전부터 손에 익은 한 가지 도구로 눈을 돌렸다. 가위였다. 처음에는 그저 손을 움직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가위가 종이를 가르며 자유로운 형태를 만들어낼 때, 마티스는 무언가가 새롭게 열리는 감각을 느꼈다. 이 도구가 나의 새로운 붓이 되리라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을까.
사실 종이를 오려 형태를 만드는 일은,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수십 년 전부터 그는 무대나 의상을 디자인할 때 색종이를 잘라 밑그림을 잡곤 했다. 다만 그때까지는 그에게 오려진 색종이들은 준비를 위한 도구였을 뿐, 작품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침대 혹은 휠체어에 있어야 하기에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그 자리에서, 마티스는 그 도구를 쓰기로 결심한다. 준비의 도구였던 가위를, 완성의 도구로 삼기로 한 것이다.
사실 종이를 오려 형태를 만드는 일은,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수십 년 전부터 그는 무대나 의상을 디자인할 때 색종이를 잘라 밑그림을 잡곤 했다. 다만 그때까지는 그에게 오려진 색종이들은 준비를 위한 도구였을 뿐, 작품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침대 혹은 휠체어에 있어야 하기에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그 자리에서, 마티스는 그 도구를 쓰기로 결심한다. 준비의 도구였던 가위를, 완성의 도구로 삼기로 한 것이다.
마티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있어야 했으므로 작업은 단순하지 않았다. 마티스가 원하는 색을 고르면, 조수들이 그 색을 과슈로 종이에 칠했다. 마티스는 그렇게 색이 입혀진 종이를 들고, 가위로 종이를 자르며 형태를 만들어 갔다. 무릎 위에 판을 올려 두고 직접 자르기도 했고, 큰 작품들은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벽에 핀으로 붙여 가며 함께 완성했다.
마티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있어야 했으므로 작업은 단순하지 않았다. 마티스가 원하는 색을 고르면, 조수들이 그 색을 과슈로 종이에 칠했다. 마티스는 그렇게 색이 입혀진 종이를 들고, 가위로 종이를 자르며 형태를 만들어 갔다. 무릎 위에 판을 올려 두고 직접 자르기도 했고, 큰 작품들은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벽에 핀으로 붙여 가며 함께 완성했다.
마티스는 이것을 "가위로 그리기(drawing with scissors)" 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색으로 자르기(cutting into colour)" 라고도 정의했다. 붓이 색을 칠하는 일이었다면, 가위는 색을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미리 색이 칠해진 색종이는 이미 색을 지니고 있었고, 가위는 그 색에 형태를 부여했다. 색과 형태가 동시에 만나는 새로운 미감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종이 오리기(cut-outs), 마티스가 인생의 말년에 새로이 개척한 예술 장르였다.
마티스는 이것을 "가위로 그리기(drawing with scissors)" 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색으로 자르기(cutting into colour)" 라고도 정의했다. 붓이 색을 칠하는 일이었다면, 가위는 색을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미리 색이 칠해진 색종이는 이미 색을 지니고 있었고, 가위는 그 색에 형태를 부여했다. 색과 형태가 동시에 만나는 새로운 미감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종이 오리기(cut-outs), 마티스가 인생의 말년에 새로이 개척한 예술 장르였다.
1943년, 74세의 마티스는 Jazz라는 작품집을 시작한다. Jazz는 스무 점의 색채 판화로 구성된 아티스트 북으로 서커스의 곡예사, 추락하는 이카로스, 라군의 물결, 위태로운 줄타기 등이 그 작품집에 수록되어 있다. 마티스는 가위 하나로 자유로운 형태와 강렬한 색의 세계를 펼쳤다. 그의 명성에 걸맞은 야수처럼. 그렇게 1947년 출판된 Jazz는, 마티스의 손글씨 노트까지 함께 실린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는 더 이상 그림만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다. 이제는 글까지 쓰는 작가가 되었다. 71세의 짓밟힘 이후, 마티스는 글까지 쓰는 네 잎의 화가로 변이한 것이다.
1943년, 74세의 마티스는 Jazz라는 작품집을 시작한다. Jazz는 스무 점의 색채 판화로 구성된 아티스트 북으로 서커스의 곡예사, 추락하는 이카로스, 라군의 물결, 위태로운 줄타기 등이 그 작품집에 수록되어 있다. 마티스는 가위 하나로 자유로운 형태와 강렬한 색의 세계를 펼쳤다. 그의 명성에 걸맞은 야수처럼. 그렇게 1947년 출판된 Jazz는, 마티스의 손글씨 노트까지 함께 실린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는 더 이상 그림만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다. 이제는 글까지 쓰는 작가가 되었다. 71세의 짓밟힘 이후, 마티스는 글까지 쓰는 네 잎의 화가로 변이한 것이다.
Henri Matisse, Icare (Icarus), from Jazz, 1947. Buffalo AKG Art Museum. 마티스가 삶과 여행과 젊음에 대해 적어둔 노트의 일부와 이카루스.
Henri Matisse, Icare (Icarus), from Jazz, 1947. Buffalo AKG Art Museum. 마티스가 삶과 여행과 젊음에 대해 적어둔 노트의 일부와 이카루스.
마티스의 작품에는 멋진 작품들이 많지만, 나는 그가 말년에 남긴 작품들을 가장 사랑한다. Blue Nudes, Icarus, The Snail와 같은 작품들. 이 작품들은 나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마티스를 떠올릴 때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나는 이 작품들을 볼 때마다 침대와 휠체어를 오가며 꼼짝없이 가위질을 하는 한 노인을 본다. 절망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피워 낸 노년의 화가를.
마티스의 작품에는 멋진 작품들이 많지만, 나는 그가 말년에 남긴 작품들을 가장 사랑한다. Blue Nudes, Icarus, The Snail와 같은 작품들. 이 작품들은 나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마티스를 떠올릴 때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나는 이 작품들을 볼 때마다 침대와 휠체어를 오가며 꼼짝없이 가위질을 하는 한 노인을 본다. 절망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피워 낸 노년의 화가를.
마티스는 건강이라는 낙원을 잃으며 세 가지의 잎이 짓밟혔다. 어쩌면 그의 평생의 답이었을 세 개의 잎은 다음과 같다. 붓, 캔버스, 이젤. 그 세 가지를 잃은 그 자리에서 마티스는 네 번째 잎을 피워 냈다. 그렇게 피어난 네 번째 잎이, 마티스에게 불멸의 작가라는 행운을 선사한 것이다.
마티스는 건강이라는 낙원을 잃으며 세 가지의 잎이 짓밟혔다. 어쩌면 그의 평생의 답이었을 세 개의 잎은 다음과 같다. 붓, 캔버스, 이젤. 그 세 가지를 잃은 그 자리에서 마티스는 네 번째 잎을 피워 냈다. 그렇게 피어난 네 번째 잎이, 마티스에게 불멸의 작가라는 행운을 선사한 것이다.
짓밟힌 자리에서 진짜 자아가 태어난다
짓밟힌 자리에서 진짜 자아가 태어난다
마티스 본인은 자신의 변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가 직접 남긴 말을 들어보자.
마티스 본인은 자신의 변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가 직접 남긴 말을 들어보자.
"내가 병을 앓은 이후에 만든 작품들만이, 나의 진짜 자아를 이룬다. 자유롭고, 해방된."
"내가 병을 앓은 이후에 만든 작품들만이, 나의 진짜 자아를 이룬다. 자유롭고, 해방된."
그의 진짜 자아는 병을 앓은 이후의 작품 속에서 비로소 태어난 것이다. 그는 또 다른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의 진짜 자아는 병을 앓은 이후의 작품 속에서 비로소 태어난 것이다. 그는 또 다른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두 번째 수술에서 회복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복했으니, 나는 빌린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떠오르는 해는 나에게 선물이며, 나는 그렇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두 번째 수술에서 회복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복했으니, 나는 빌린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떠오르는 해는 나에게 선물이며, 나는 그렇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마티스는 자신의 말년을 두 번째 삶, seconde vie라고 불렀다. 이 표현이 마음에 오래 머문다. 나 역시, 그와 같이 암 수술을 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을 때 두 번째 삶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두 번째 삶. 첫 번째 삶이 끝난 자리에서 시작된, 전혀 다른 삶. 마티스는 자신의 짓밟힘을 끝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는 그 지점을 시작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시작 너머에서 만난 자기 자신을, 71세 이전까지 살아온 그 어떠한 자신보다 더 진짜라고 말했다.
마티스는 자신의 말년을 두 번째 삶, seconde vie라고 불렀다. 이 표현이 마음에 오래 머문다. 나 역시, 그와 같이 암 수술을 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을 때 두 번째 삶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두 번째 삶. 첫 번째 삶이 끝난 자리에서 시작된, 전혀 다른 삶. 마티스는 자신의 짓밟힘을 끝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는 그 지점을 시작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시작 너머에서 만난 자기 자신을, 71세 이전까지 살아온 그 어떠한 자신보다 더 진짜라고 말했다.
Henri Matisse, Nu bleu II (Blue Nude II), 1952. Centre Pompidou, Paris.
Henri Matisse, Nu bleu II (Blue Nude II), 1952. Centre Pompidou, Paris.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과 마주한다. 우리의 진짜 자아는 끝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티스는 상실과 고통의 자리에서 이전의 자아가 아닌 새로운 자아를 만났다. 가위를 들고 색을 해방하기 시작함으로써 만나게 된 새로운 자아가 그의 진짜 자아였다. 그러니까 평생을 붓으로 살아온 사람이, 71세에 가위를 들면서야 비로소 자신의 진짜 얼굴과 만났다고 고백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과 마주한다. 우리의 진짜 자아는 끝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티스는 상실과 고통의 자리에서 이전의 자아가 아닌 새로운 자아를 만났다. 가위를 들고 색을 해방하기 시작함으로써 만나게 된 새로운 자아가 그의 진짜 자아였다. 그러니까 평생을 붓으로 살아온 사람이, 71세에 가위를 들면서야 비로소 자신의 진짜 얼굴과 만났다고 고백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변이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변이는 평온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상처받고, 짓이겨지고, 밟히고, 손상되고, 무언가를 상실한 자리. 오직 그 자리에서만 변이는 일어난다. 다시 말해 상처와 짓이김과 상실은, 변이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다. 변이가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다.
나는 이것이 변이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변이는 평온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상처받고, 짓이겨지고, 밟히고, 손상되고, 무언가를 상실한 자리. 오직 그 자리에서만 변이는 일어난다. 다시 말해 상처와 짓이김과 상실은, 변이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다. 변이가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다.
세잎클로버가 짓밟히지 않았다면 네 번째 잎은 솟아날 필요가 없다. 세잎클로버가 짓이겨졌기 때문에 네 번째 잎이 솟아날 이유가 생긴 것이다. 마티스가 붓을 잃지 않았다면 가위를 든 새로운 자아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짓밟힘은 네 번째 잎의 조건이고 상실이 새로운 자아의 조건이다.
세잎클로버가 짓밟히지 않았다면 네 번째 잎은 솟아날 필요가 없다. 세잎클로버가 짓이겨졌기 때문에 네 번째 잎이 솟아날 이유가 생긴 것이다. 마티스가 붓을 잃지 않았다면 가위를 든 새로운 자아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짓밟힘은 네 번째 잎의 조건이고 상실이 새로운 자아의 조건이다.
우리의 진짜 자아는 평온한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다. 그것은 짓밟힌 자리에서, 손상된 자리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자리에서만 피어난다.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하는 그 자리가, 사실은 진짜 자아가 태어나는 유일한 자리인 것이다.
우리의 진짜 자아는 평온한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다. 그것은 짓밟힌 자리에서, 손상된 자리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자리에서만 피어난다.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하는 그 자리가, 사실은 진짜 자아가 태어나는 유일한 자리인 것이다.
변이를 행운으로 만드는 것은
변이를 행운으로 만드는 것은
무언가를 상실하는 자리가 우리의 진짜 자아가 태어나는 유일한 자리라니.
무언가를 상실하는 자리가 우리의 진짜 자아가 태어나는 유일한 자리라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상실의 자리에 있다면 위로가 되겠지만, 만약 평온한 자리에 있다면 상당히 곤혹스러울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 곤경에 빠진 이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글을 쓰고자 노력한다. 그것이 늘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글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곤혹스러움에서 구조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지금부터 네잎클로버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을 더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상실의 자리에 있다면 위로가 되겠지만, 만약 평온한 자리에 있다면 상당히 곤혹스러울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 곤경에 빠진 이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글을 쓰고자 노력한다. 그것이 늘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글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곤혹스러움에서 구조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지금부터 네잎클로버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을 더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네잎클로버가 행운의 상징이 된 것은 변이 자체가 행운이기 때문은 아니다. 인간들이 그것을 행운이라고 부르는 관점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변이를 두고 우리는 기형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네 잎은 열성 형질이 발현된 결과이며, 생물학적으로는 그저 잎 수의 변이일 뿐이다. 행운도, 기형도 아닌 하나의 변이인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네잎클로버가 행운의 상징이 된 것은 변이 자체가 행운이기 때문은 아니다. 인간들이 그것을 행운이라고 부르는 관점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변이를 두고 우리는 기형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네 잎은 열성 형질이 발현된 결과이며, 생물학적으로는 그저 잎 수의 변이일 뿐이다. 행운도, 기형도 아닌 하나의 변이인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행운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해석이라는 뜻이다. 해석에 따라 현상은 달라진다.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네잎클로버의 숫자, 4를 통해 알아보자. 서양에서 네 번째 잎이 행운의 상징이 되는 동안, 동아시아에서 숫자 4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4는 피해야 할 불길한 숫자가 되었다. 내가 매주 피클볼을 치러가는 코트는 4층에 있는데, 4층을 가기 위해 나는 늘 엘리베이터에서 F층을 누른다. 4층이라는 숫자 자체를 표기하는 것을 두려워할 만큼 불길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행운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해석이라는 뜻이다. 해석에 따라 현상은 달라진다.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네잎클로버의 숫자, 4를 통해 알아보자. 서양에서 네 번째 잎이 행운의 상징이 되는 동안, 동아시아에서 숫자 4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4는 피해야 할 불길한 숫자가 되었다. 내가 매주 피클볼을 치러가는 코트는 4층에 있는데, 4층을 가기 위해 나는 늘 엘리베이터에서 F층을 누른다. 4층이라는 숫자 자체를 표기하는 것을 두려워할 만큼 불길하게 여기는 것이다.
같은 숫자 4를 두고, 한쪽은 행운을 보고 다른 한쪽은 죽음을 본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드는가. 숫자는 같으므로 숫자 그 자체는 차이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무엇이 차이를 만드는가. 그렇다, 그 숫자를바라보는 시선, 곧 해석이다.
같은 숫자 4를 두고, 한쪽은 행운을 보고 다른 한쪽은 죽음을 본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드는가. 숫자는 같으므로 숫자 그 자체는 차이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무엇이 차이를 만드는가. 그렇다, 그 숫자를바라보는 시선, 곧 해석이다.
네잎클로버도 그러했다. 누군가 처음으로 풀밭에서 그 작은 변이를 들여다보고, 흔하지 않은 잎을 보았으니 좋은 일이 생기는 신호일지 모른다고 해석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사람의 해석이 그 변이를 행운으로 만들었다. 이브의 전설도 마찬가지다. 낙원에서 추방되는 상실의 순간에 대해,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손에 쥔 한 장의 잎으로 해석함으로써, 상실의 자리를 기억의 증표로 바꾸었다. 그 해석이 없었다면, 그것은 그저 쫓겨남에 불과했을 것이다.
네잎클로버도 그러했다. 누군가 처음으로 풀밭에서 그 작은 변이를 들여다보고, 흔하지 않은 잎을 보았으니 좋은 일이 생기는 신호일지 모른다고 해석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사람의 해석이 그 변이를 행운으로 만들었다. 이브의 전설도 마찬가지다. 낙원에서 추방되는 상실의 순간에 대해,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손에 쥔 한 장의 잎으로 해석함으로써, 상실의 자리를 기억의 증표로 바꾸었다. 그 해석이 없었다면, 그것은 그저 쫓겨남에 불과했을 것이다.
마티스도 그러했다. 그가 seconde vie라는 이름을 자신의 변이에 붙이지 않았다면, 그 시간은 그저 비극적인 말년의 회복기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티스는 그 시간을 두 번째 삶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빌린 시간 속에서 마주하는 매일의 태양을 선물로 해석했다. 그 해석이 71세에 운명에게 짓밟힌 그의 인생을 해방의 입구로 만든 것이다.
마티스도 그러했다. 그가 seconde vie라는 이름을 자신의 변이에 붙이지 않았다면, 그 시간은 그저 비극적인 말년의 회복기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티스는 그 시간을 두 번째 삶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빌린 시간 속에서 마주하는 매일의 태양을 선물로 해석했다. 그 해석이 71세에 운명에게 짓밟힌 그의 인생을 해방의 입구로 만든 것이다.
모든 변이는 자연스럽게 행운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짓밟힘은 자동으로 변이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선이, 누군가의 해석이 그 자리에 전혀 다른 이름을 붙일 때, 끝을 시작이라고 정의할 때, 그제야 비로소 그 자리는 변이가 되고 행운이 된다. After Soyoon을 통해 줄곧 말해온 한 문장을 다시 떠올린다. 해석이 삶을 결정한다. 짓밟힘이 변이가 되는 자리에서도, 그 명제는 어김없이 작동한다. 아니, 이 명제가 가장 정확하게 작동하는 지점이 바로 짓밟힘이 변이가 되는 자리일 것이다.
모든 변이는 자연스럽게 행운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짓밟힘은 자동으로 변이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선이, 누군가의 해석이 그 자리에 전혀 다른 이름을 붙일 때, 끝을 시작이라고 정의할 때, 그제야 비로소 그 자리는 변이가 되고 행운이 된다. After Soyoon을 통해 줄곧 말해온 한 문장을 다시 떠올린다. 해석이 삶을 결정한다. 짓밟힘이 변이가 되는 자리에서도, 그 명제는 어김없이 작동한다. 아니, 이 명제가 가장 정확하게 작동하는 지점이 바로 짓밟힘이 변이가 되는 자리일 것이다.
해석의 부재에서
해석의 부재에서
해석이 존재한다면, 짓밟힘은 변이가 일어나는 자리가 된다. 상실은 행운이 탄생하는 지점이 된다. 그러나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는 짓밟힘만 남는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며 짓밟히는 경험을 한다. 어쩌면 삶을 산다는 것은 수많은 짓밟힘과 크고 작은 짓이겨짐을 견뎌 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해석이 존재한다면, 짓밟힘은 변이가 일어나는 자리가 된다. 상실은 행운이 탄생하는 지점이 된다. 그러나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는 짓밟힘만 남는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며 짓밟히는 경험을 한다. 어쩌면 삶을 산다는 것은 수많은 짓밟힘과 크고 작은 짓이겨짐을 견뎌 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떤 자극은 변이가 되고 어떤 자극은 손상으로만 끝난다. 어떤 손상은 행운이 되고 어떤 손상은 그저 상처로만 남는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 짓밟힘을 들여다보는 시선이다. 자극받고 손상받고 있는 그 지점에 대해 내가 무슨 질문을 하고 있는가다. 짓밟힌 자리에 그저 머물러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묻는다면, 그 자리는 상처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짓밟힌 자리를 들여다보고 이 자리에서 무엇이 솟아날 수 있을까라고 묻기 시작하면, 그 자리는 변이의 입구가 된다. 행운의 시작이 된다.
어떤 자극은 변이가 되고 어떤 자극은 손상으로만 끝난다. 어떤 손상은 행운이 되고 어떤 손상은 그저 상처로만 남는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 짓밟힘을 들여다보는 시선이다. 자극받고 손상받고 있는 그 지점에 대해 내가 무슨 질문을 하고 있는가다. 짓밟힌 자리에 그저 머물러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묻는다면, 그 자리는 상처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짓밟힌 자리를 들여다보고 이 자리에서 무엇이 솟아날 수 있을까라고 묻기 시작하면, 그 자리는 변이의 입구가 된다. 행운의 시작이 된다.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마티스는 가위를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이젤 앞에 서지 못하니 더 이상 화가가 아니라며 멈추지 않고, 그는 다른 방식으로 화가가 될 수 있을까를 물었다. 질문은 변이의 첫 단추다. 짓밟힘이 상처로만 머물지 않고 변이로 재탄생되기 위해서는 질문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자기만의 답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해석이다. 이 해석에 따라 나에게 펼쳐지는 행운이 달라진다.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마티스는 가위를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이젤 앞에 서지 못하니 더 이상 화가가 아니라며 멈추지 않고, 그는 다른 방식으로 화가가 될 수 있을까를 물었다. 질문은 변이의 첫 단추다. 짓밟힘이 상처로만 머물지 않고 변이로 재탄생되기 위해서는 질문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자기만의 답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해석이다. 이 해석에 따라 나에게 펼쳐지는 행운이 달라진다.
자기계발은 종종 말한다. 어려움은 기회다. 그러나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 어려움은 기회가 아니다. 어려움은 그냥 어려움이다. 다만 어려움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어려움은 변이의 입구가 된다. 변이의 입구까지 도달해야만 어려움은 기회가 된다. 해석하지 못한다면 어려움은 어려움으로 남을 것이다. 짓밟힘은 그저 상처로만 남을 것이다.
자기계발은 종종 말한다. 어려움은 기회다. 그러나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 어려움은 기회가 아니다. 어려움은 그냥 어려움이다. 다만 어려움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어려움은 변이의 입구가 된다. 변이의 입구까지 도달해야만 어려움은 기회가 된다. 해석하지 못한다면 어려움은 어려움으로 남을 것이다. 짓밟힘은 그저 상처로만 남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에는, 짓밟힌 자리가 있는가.
당신의 인생에는, 짓밟힌 자리가 있는가.
인생의 방향을 잃은 자리. 사랑하는 누군가와 이별한 자리.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자리. 믿었던 정답이 무너진 자리.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그런 자리 위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 짓밟힘의 한가운데서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를 묻고 있을 수도 있다.
인생의 방향을 잃은 자리. 사랑하는 누군가와 이별한 자리.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자리. 믿었던 정답이 무너진 자리.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그런 자리 위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 짓밟힘의 한가운데서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를 묻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네잎클로버는 우리에게 말한다. 짓밟힌 자리는 끝의 자리가 아니라 변이의 입구일 수 있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원래는 솟아날 이유가 없었던 네 번째 잎이 솟아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마티스는 한층 더 깊은 곳을 보여준다. 짓밟힘 이후에 피어난 그 잎이, 어쩌면 짓밟힘 이전의 세 잎보다 더 진짜 나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네잎클로버는 우리에게 말한다. 짓밟힌 자리는 끝의 자리가 아니라 변이의 입구일 수 있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원래는 솟아날 이유가 없었던 네 번째 잎이 솟아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마티스는 한층 더 깊은 곳을 보여준다. 짓밟힘 이후에 피어난 그 잎이, 어쩌면 짓밟힘 이전의 세 잎보다 더 진짜 나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을.
나 역시 마티스와 같이 암 수술을 했다. 나도 그처럼 수술 후 후유증으로 손에 쥐고 있던 마이크를 잃었다. 그것이 변이가 될지 그저 상처로 남을지,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지금도 내 일기장에는 운명에게 짓밟히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가 될지 알지 못해 벌벌 떠는 내가 있다. 나는 그때 무척 두려웠다. 다른 환우들보다 6배는 더 큰 내 암이, 림프까지 전이된 그 모든 상황들이 내게 펼쳐졌을까. 어찌하여 운명은 내게 이리도 혹독하게 구는가.
나 역시 마티스와 같이 암 수술을 했다. 나도 그처럼 수술 후 후유증으로 손에 쥐고 있던 마이크를 잃었다. 그것이 변이가 될지 그저 상처로 남을지,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지금도 내 일기장에는 운명에게 짓밟히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가 될지 알지 못해 벌벌 떠는 내가 있다. 나는 그때 무척 두려웠다. 다른 환우들보다 6배는 더 큰 내 암이, 림프까지 전이된 그 모든 상황들이 내게 펼쳐졌을까. 어찌하여 운명은 내게 이리도 혹독하게 구는가.
그러나 나는 두려움 속에서도 묻고자 했다. 왜 나에게가 아니라 이 자리에서 무엇이 솟아날 수 있을까를 물었다. After Soyoon은 그 질문에서 시작된, 나의 네 번째 잎이다. 마티스가 붓을 잃은 자리에서 가위를 들었듯이, 나는 마이크를 잃은 자리에서 펜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두려움 속에서도 묻고자 했다. 왜 나에게가 아니라 이 자리에서 무엇이 솟아날 수 있을까를 물었다. After Soyoon은 그 질문에서 시작된, 나의 네 번째 잎이다. 마티스가 붓을 잃은 자리에서 가위를 들었듯이, 나는 마이크를 잃은 자리에서 펜을 들었다.
나 역시 짓밟혔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짓밟힘 속에서 기어코 네 번째 잎을 피워낸 사람으로서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나 역시 짓밟혔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짓밟힘 속에서 기어코 네 번째 잎을 피워낸 사람으로서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지금 어떤 자리에서 짓밟혔는가. 그 자리를 상처라고 부르고 있는가, 변이의 입구라고 부르고 있는가. 그 자리에서 왜 나에게를 묻고 있는가, 이 자리에서 무엇이 솟아날 수 있을까를 묻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어떤 자리에서 짓밟혔는가. 그 자리를 상처라고 부르고 있는가, 변이의 입구라고 부르고 있는가. 그 자리에서 왜 나에게를 묻고 있는가, 이 자리에서 무엇이 솟아날 수 있을까를 묻고 있는가.
이브가 낙원을 잃는 자리에서 네잎클로버를 손에 쥐었듯이. 마티스가 붓을 잃는 자리에서 가위를 들었듯이. 네 번째 잎은 늘 짓밟힌 자리에 있다. 평온한 자리가 아니라. 만약 당신이 상실의 자리, 손상의 자리, 짓밟히는 자리에 서 있다면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그 자리를 변이의 입구로 삼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진심으로 당신에게 축하를 건넨다. 당신은 새로운 잎을 피워낼 것이다. 그리고 그 잎을 통해 진짜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만끽할 것이다.
이브가 낙원을 잃는 자리에서 네잎클로버를 손에 쥐었듯이. 마티스가 붓을 잃는 자리에서 가위를 들었듯이. 네 번째 잎은 늘 짓밟힌 자리에 있다. 평온한 자리가 아니라. 만약 당신이 상실의 자리, 손상의 자리, 짓밟히는 자리에 서 있다면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그 자리를 변이의 입구로 삼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진심으로 당신에게 축하를 건넨다. 당신은 새로운 잎을 피워낼 것이다. 그리고 그 잎을 통해 진짜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만끽할 것이다.
인용 원문
"Only what I created after my illness constitutes my real self: free, liberated." (내가 병을 앓은 이후에 만든 작품들만이, 나의 진짜 자아를 이룬다. 자유롭고, 해방된.)
"I didn't expect to recover from my second operation but since I did, I consider that I'm living on borrowed time. Every day that dawns is a gift to me and I take it in that way." (두 번째 수술에서 회복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복했으니, 나는 빌린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떠오르는 해는 나에게 선물이며, 나는 그렇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John Melton (1620): "If a man walking in the fields find any four-leaved grass, he shall in a small while after find some good thing." (들판을 걷던 이가 네 잎 풀을 발견하면, 머지않아 좋은 일을 만나리라.)
John Melton, 1620 - 네잎클로버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으로 알려져 있음.
네잎클로버 발생 원인(유전적 변이, 환경 요인, 생장점 손상): 위키백과 '네잎클로버' 항목 및 식물학 연구 자료
Henri Matisse, Jazz, Tériade, 1947
앙리 마티스의 투병과 종이오리기(cut-outs) 작업: The Museum of Modern Art, Henri Matisse: The Cut-Outs (2014); Hilary Spurling, Matisse the Master 등
마티스 인용 출처: 위 인용 원문 참조 (영문 미술·의학 사료에 수록)
인용 원문
"Only what I created after my illness constitutes my real self: free, liberated." (내가 병을 앓은 이후에 만든 작품들만이, 나의 진짜 자아를 이룬다. 자유롭고, 해방된.)
"I didn't expect to recover from my second operation but since I did, I consider that I'm living on borrowed time. Every day that dawns is a gift to me and I take it in that way." (두 번째 수술에서 회복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복했으니, 나는 빌린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떠오르는 해는 나에게 선물이며, 나는 그렇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John Melton (1620): "If a man walking in the fields find any four-leaved grass, he shall in a small while after find some good thing." (들판을 걷던 이가 네 잎 풀을 발견하면, 머지않아 좋은 일을 만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