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앞에서 꺼냈어야 할 한마디는 왜 이제야 떠오르는가. 이렇게 말했다면 좋았을텐데. 그 사람이 나한테 했던 말을 내가 이렇게 되받아쳤더라면 속이라도 시원했을텐데. 그 때 그 상황을 머릿 속으로 되감기한다. 완벽한 대답이 그제야 입속에서 맴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 말을 해야 했던 자리는 이미 사라졌다. 그 사람은 이미 내 앞을 떠났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물론, 이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 때 그 사람 앞에서 나는 왜 그 말 한마디를 꺼냈는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밤새 뒤척일 일은 없었을텐데. 그렇게 우리는 이불을 깨달음의 장소로 삼는다.
우리 안에는 늘 한 발 늦은 누군가가 산다. 나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 그 누군가는 매번 상황이 다 끝난 다음에야 무릎을 친다.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니다. 왜 이제야 나타났는가. 우리는 그를 부끄러워한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조금만 더 미리 느꼈더라면. 우리는 늘 상상한다. 미리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 발 앞서 읽는 사람, 리스크를 먼저 감지하고 먼저 대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오랜 소망이다. 뒤늦은 깨달음에는 늘 짙은 후회의 냄새가 배여 있고 이 냄새는 꿉꿉하고 찝찝하다. 눅눅한 곰팡이로 가득 찬 방처럼 후회의 냄새는 습하다. 이 냄새에서 벗어나는 것, 뒤늦게 깨달은 자가 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숙제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는, 우리만큼 늘 한 발 늦었던 신이 있다. 자그마치 3,000년 동안 멍청이라고 놀림받아 온 신이다. 오늘은 그 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영웅이었던 형에게 가리워져 늘 멍청이 취급을 받았던 신. 그러나 우리와 가장 닮은 신. 그래서 미워할 수 없는 신. 이 이야기가 끝날 무렵 당신은 그를 사랑하게 될까, 내가 그를 이해하고 마침내 사랑하게 된 것처럼.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옛날에 한 형제가 있었다. 두 형제는 모두 신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형의 이름은 프로메테우스. '먼저 보는 자'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그는 이름처럼 모든 일의 결과를 미리 내다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훤히 아는, 누구보다 영리한 신이었다. 동생의 이름은 . '나중에야 보는 자'라는 뜻이다. 형은 늘 미래를 내다보았지만, 동생은 늘 일이 다 벌어진 다음에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그리스 신화를 가장 먼저 적었던 옛 시인 헤시오도스는 동생 에피메테우스를 두고 이렇게 적었다. 생각이 늘 빗나가는 자. 처음부터 인간에게 화가 된 자. 그는 태생부터가 바보였다.
May 23, 2026
나중에야 보는 자
미리 보는 자의 시대에, 우리는 뒤늦게 겪고 나서야 아는 인간의 자리를 어떻게 다시 사랑할 수 있는가?
01
밤에 자려고 누우면, 그제야 낮에 했어야 할 말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 사람 앞에서 꺼냈어야 할 한마디는 왜 이제야 떠오르는가. 이렇게 말했다면 좋았을텐데. 그 사람이 나한테 했던 말을 내가 이렇게 되받아쳤더라면 속이라도 시원했을텐데. 그 때 그 상황을 머릿 속으로 되감기한다. 완벽한 대답이 그제야 입속에서 맴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 말을 해야 했던 자리는 이미 사라졌다. 그 사람은 이미 내 앞을 떠났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물론, 이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 때 그 사람 앞에서 나는 왜 그 말 한마디를 꺼냈는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밤새 뒤척일 일은 없었을텐데. 그렇게 우리는 이불을 깨달음의 장소로 삼는다.
우리 안에는 늘 한 발 늦은 누군가가 산다. 나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 그 누군가는 매번 상황이 다 끝난 다음에야 무릎을 친다.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니다. 왜 이제야 나타났는가. 우리는 그를 부끄러워한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조금만 더 미리 느꼈더라면. 우리는 늘 상상한다. 미리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 발 앞서 읽는 사람, 리스크를 먼저 감지하고 먼저 대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오랜 소망이다. 뒤늦은 깨달음에는 늘 짙은 후회의 냄새가 배여 있고 이 냄새는 꿉꿉하고 찝찝하다. 눅눅한 곰팡이로 가득 찬 방처럼 후회의 냄새는 습하다. 이 냄새에서 벗어나는 것, 뒤늦게 깨달은 자가 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숙제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는, 우리만큼 늘 한 발 늦었던 신이 있다. 자그마치 3,000년 동안 멍청이라고 놀림받아 온 신이다. 오늘은 그 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영웅이었던 형에게 가리워져 늘 멍청이 취급을 받았던 신. 그러나 우리와 가장 닮은 신. 그래서 미워할 수 없는 신. 이 이야기가 끝날 무렵 당신은 그를 사랑하게 될까, 내가 그를 이해하고 마침내 사랑하게 된 것처럼.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옛날에 한 형제가 있었다. 두 형제는 모두 신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형의 이름은 프로메테우스. '먼저 보는 자'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그는 이름처럼 모든 일의 결과를 미리 내다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훤히 아는, 누구보다 영리한 신이었다. 동생의 이름은 . '나중에야 보는 자'라는 뜻이다. 형은 늘 미래를 내다보았지만, 동생은 늘 일이 다 벌어진 다음에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그리스 신화를 가장 먼저 적었던 옛 시인 헤시오도스는 동생 에피메테우스를 두고 이렇게 적었다. 생각이 늘 빗나가는 자. 처음부터 인간에게 화가 된 자. 그는 태생부터가 바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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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3, 2026
나중에야 보는 자
미리 보는 자의 시대에, 우리는 뒤늦게 겪고 나서야 아는 인간의 자리를 어떻게 다시 사랑할 수 있는가?
After Soyoon
밤에 자려고 누우면, 그제야 낮에 했어야 할 말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 사람 앞에서 꺼냈어야 할 한마디는 왜 이제야 떠오르는가. 이렇게 말했다면 좋았을텐데. 그 사람이 나한테 했던 말을 내가 이렇게 되받아쳤더라면 속이라도 시원했을텐데. 그 때 그 상황을 머릿 속으로 되감기한다. 완벽한 대답이 그제야 입속에서 맴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 말을 해야 했던 자리는 이미 사라졌다. 그 사람은 이미 내 앞을 떠났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물론, 이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 때 그 사람 앞에서 나는 왜 그 말 한마디를 꺼냈는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밤새 뒤척일 일은 없었을텐데. 그렇게 우리는 이불을 깨달음의 장소로 삼는다.
우리 안에는 늘 한 발 늦은 누군가가 산다. 나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 그 누군가는 매번 상황이 다 끝난 다음에야 무릎을 친다.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니다. 왜 이제야 나타났는가. 우리는 그를 부끄러워한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조금만 더 미리 느꼈더라면. 우리는 늘 상상한다. 미리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 발 앞서 읽는 사람, 리스크를 먼저 감지하고 먼저 대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오랜 소망이다. 뒤늦은 깨달음에는 늘 짙은 후회의 냄새가 배여 있고 이 냄새는 꿉꿉하고 찝찝하다. 눅눅한 곰팡이로 가득 찬 방처럼 후회의 냄새는 습하다. 이 냄새에서 벗어나는 것, 뒤늦게 깨달은 자가 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숙제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는, 우리만큼 늘 한 발 늦었던 신이 있다. 자그마치 3,000년 동안 멍청이라고 놀림받아 온 신이다. 오늘은 그 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영웅이었던 형에게 가리워져 늘 멍청이 취급을 받았던 신. 그러나 우리와 가장 닮은 신. 그래서 미워할 수 없는 신. 이 이야기가 끝날 무렵 당신은 그를 사랑하게 될까, 내가 그를 이해하고 마침내 사랑하게 된 것처럼.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옛날에 한 형제가 있었다. 두 형제는 모두 신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형의 이름은 프로메테우스. '먼저 보는 자'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그는 이름처럼 모든 일의 결과를 미리 내다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훤히 아는, 누구보다 영리한 신이었다. 동생의 이름은 에피메테우스. '나중에야 보는 자'라는 뜻이다. 형은 늘 미래를 내다보았지만, 동생은 늘 일이 다 벌어진 다음에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그리스 신화를 가장 먼저 적었던 옛 시인 헤시오도스는 동생 에피메테우스를 두고 이렇게 적었다. 생각이 늘 빗나가는 자. 처음부터 인간에게 화가 된 자. 그는 태생부터가 바보였다.
이 바보 동생은 늘 일을 그르쳤다. 반면 형은 늘 탁월했으므로 동생은 늘 형에게 비교를 당했다. 그도 형처럼 탁월해지고 싶었다. 자신을 증명해내는 일을 하고싶었다. 그렇게 유명한 사건 하나가 벌어진다. 태초에 두 형제에게 있었던 일이다.
두 형제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 주어졌다. 세상에 갓 빚어진 모든 동물에게 살아갈 능력을 하나씩 나눠 주는 일이었다. 에피메테우스는 마침내 자신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형을 졸랐다. 그 일은 자기가 하고 싶다고. 자기가 잘 해보겠다고. 프로메테우스는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네가 모든 일을 다 끝내면 검사만 하겠노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에피메테우스는 신이 나서 동물들에게 능력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어떤 짐승에게는 날카로운 발톱을 주었고, 어떤 짐승에게는 두꺼운 가죽을 주었다. 누군가에게는 땅을 질주할 수 있는 빠른 다리를, 누군가에게는 하늘을 가를 수 있는 날개를 주었다. 약하고 작은 동물에게는 숨을 굴을, 추운 대륙에서 살아야 할 동물에게는 따뜻한 털을 주었다. 어느 하나 굶주리거나 잡아먹혀 사라지지 않도록, 그는 가진 것을 아낌없이, 골고루 나눠 주었다.
그러나 그는 미리 헤아릴 줄 모르던 자가 아닌가. 마지막으로 그의 앞에 인간이 섰을 때, 그의 손에 쥔 능력은 하나도 없었다. 손에 쥔 능력들을 앞선 짐승들에게 다 써버리고 만 것이다. 더 이상 그의 손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인간은 날카로운 발톱도, 두꺼운 가죽도, 빠른 다리와 날개도 없는 벌거벗은 맨몸으로 세상에 던져졌다. 모든 짐승 가운데 가장 약한 존재로.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형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의 실수를 메우기 위해 인간들에게도 무언가를 선물하리라 마음먹는다. 그것이 바로 신들의 불이었다. 그렇다. 우리가 아는 최초의 도둑질, 그 유명한 신들의 불을 훔친 도둑질은 동생이 저질러 놓은 일을 형이 수습하기 위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는 당신도 어디선가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신들만 쓰던 불을 몰래 훔쳐 벌거벗은 인간에게 건넸다. 그 불에서 도구가 생기고, 언어가 생기고, 마침내 문명이 시작되었다. 인간은 벌거벗은 맨몸으로 태어나 불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신들의 왕 제우스의 분노가, 인간이 피운 그 불길보다 더 크게 솟구쳤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세상 끝의 바위에 사슬로 묶어두었다. 매일 독수리가 날아와 그의 간을 쪼아 먹는 형벌을 내렸다. 간은 밤마다 다시 자라났다. 그럼 다음 날 아침, 독수리가 또 찾아와 간을 쪼아 먹었다. 매일 같은 아침과 밤이 반복됐다. 상처와 회복이 반복되는 아침과 밤이 프로메테우스에게 영원히 주어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불을 훔쳐서가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미리 보는 자가 아니던가.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에게 닥칠 형벌까지 미리 알고 있었다. 알고도 행한 것이다. 그는 다 알면서 불을 훔쳤고, 다 알면서 바위에 묶였다. 미래를 내다보는 그 눈으로도, 그는 끝내 자기 자신만은 구하지 못했다. 그는 인간에게 불을 선물했지만, 정작 그 불 곁에 단 한 번도 앉아 보지 못했다. 인간들이 불이라는 도구로 얼마나 번성했는지, 그 곁에 앉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는 세상 끝 바위에 홀로 묶여 있었으므로. 그는 모든 것을 보았으나,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동안 트러블 메이커 동생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에피메테우스는 인간들의 곁에 있었다. 불을 쓰며 번성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그는 안도했다. 내가 빈손이었던 덕분에 형이 저들에게 불을 주었다. 잘된 일이다. 다행이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그는 인간들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 무렵, 프로메테우스에게 벌을 주는 것만으로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았던 제우스는 인간에게도 벌을 내리기로 결심한다. 감히 신의 도구를 함부로 받다니. 그것을 함부로 쓰다니. 불을 받은 죗값을 인간에게 치르게 할 작정이었다. 제우스가 인간을 위해 준비한 벌의 이름은 판도라였다. 신들은 판도라에게 저마다 하나씩 선물을 보탰다. 그렇게 신들의 선물과 축복 속에 탄생한 여인이 최초의 여인, 판도라였다. 판도라는 신만큼이나 아름다웠으며, 신처럼 탁월한 말솜씨를 가졌으며, 신에 준하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을 가졌다. 그리고 신만큼이나 호기심이 넘쳤다. 이 넘치는 호기심이 끝내 인류의 형벌이 되었다.
겉은 더 없이 아름다웠으나 분명 그 안에는 인간을 무너뜨릴 무언가가 심어진 존재, 판도라. 제우스는 아름다운 최초의 여인을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냈다. 물론, 프로메테우스는 이것 역시 예측하고 있었으므로 절벽에 묶이기 전 동생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제우스가 무엇을 보내든 절대 받지 말아라. 그것은 분명 인간에게 해가 될 것이다." 에피메테우스는 형의 말을 늘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판도라가 그의 앞에 서자, 그 경고를 순식간에 잊고 말았다. 까맣게 잊고, 그는 의심 대신 확신과 기쁨으로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한다.
판도라는 하늘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올 때, 제우스로부터 선물 하나를 받아 품에 안고 있었다. 커다란 항아리였다. (우리는 흔히 '판도라의 상자'라 부르지만, 본래는 곡식을 담던 커다란 항아리였다고 전해진다. 상자가 된 것은 먼 훗날 누군가의 오역 때문이다.) 제우스는 그에게 항아리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너를 위한 선물이다. 그러나 절대 열어보지 말거라."
판도라는 이 커다란 항아리가 늘 궁금했다. 신들의 왕 제우스가 준 선물이니, 분명 좋은 것이 있을거야. 기대감과 동시에 왜 열지 말라고 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그녀를 감쌌다. 에피메테우스와의 생활은 즐거웠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있는 호기심이 그녀의 마음을 결국 집어 삼켰다. 그렇게 그녀는 신들이 심어 준 호기심을 끝내 이기지 못한 채, 절대 열어서는 안 된다던 그 항아리를 열고 만다.
뚜껑이 열린 순간, 그 안에 갇혀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질병이 나왔다. 가난이 나왔다. 고된 노동이 나왔다. 슬픔과 근심이 나왔다. 시기와 질투가 나왔다. 늙음이 나왔고, 죽음을 부르는 것들이 나왔다. 인간이 그때껏 알지 못하던 모든 불행이, 날개 달린 짐승처럼 한꺼번에 날아올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헤시오도스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남은 것들, 헤아릴 수 없는 역병들이 사람들 사이를 떠돈다. 땅도 재앙으로 가득 차고, 바다도 가득 찼다. 질병은 낮에도 밤에도 제 발로 인간을 찾아와, 소리 없이 불행을 안긴다.
신화에 따르면, 그 전까지 인간은 재앙도 질병도 모른 채, 근심 없이 살았다고 한다. 판도라가 항아리를 연 그 순간부터, 세상은 비로소 우리가 아는 세상이 되었다. 슬픔이 있고, 병이 있고, 늙음이 있고, 끝내 죽음이 있는 세상. 판도라는 항아리에서 빠져 나가는 그 모든 불행들에 깜짝 놀랐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황급히 항아리의 뚜껑을 닫았다. 덕분에 단 하나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항아리 안에 갇혔다.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엘피스(Elpis)라 불렀다. 우리말로 희망이라는 뜻이다. 신화는 이 상황에 대해, 특히 에피메테우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는 그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 재앙이 이미 자기 것이 된 다음에야, 그는 깨달았다.
에피메테우스는 또 늦은 자가 되었다. "봐라. 또 늦었다. 형이 그렇게 일렀는데도, 모든 것이 다 쏟아진 다음에야 정신을 차린다." 사람들은 에피메테우스를 비난했다. 헤시오도스는 다른 대목에서 마치 그를 두고 하는 말처럼 이렇게 적기도 했다. 어리석은 자는 겪고 나서야 깨닫는다. 사람들은 그렇게 3,000년 동안 소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그를 비웃었다.
잠깐, 항아리 바닥에 남은 그 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고자 한다.
판도라의 항아리가 열리면서 세상에 모든 불행이 쏟아졌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불행이 풀려나 떠도는데, 어째서 희망은 안에 갇혔을까. 어째서 희망만 그 안에 갇혔을까. 이 질문을 두고 사람들의 의견은 수천 년 동안 정반대로 갈라졌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판도라의 항아리에 오직 희망만이 남은 것은 신의 마지막 자비라고. 질병과 가난과 슬픔, 온갖 불행이 쏟아진 이 세상에서 인간이 무너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항아리 안에 희망 하나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덕분에 우리는 매일 불행의 협곡을 아슬하게 걸으면서도 끝내 주저앉지 않는 것이다. 오늘은 지옥 같았으나 내일은 다를지 모른다는 희망, 그 하나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러므로 희망은 세상에 쏟아진 그 모든 불행을 견디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질긴 단 하나의 힘일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의 의견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에는 니체가 있을 것이며, 니체의 말은 다음과 같다.
희망은 사실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다.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희망은 위로가 아니라 가장 잔인한 형벌이다. 그의 의견을 따르자면 신이 희망을, 굳이 항아리 안에 남겨 둔 것은 인간이 끝내 포기하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제 그만 내려놓고 싶어도, 희망은 내일을 속삭여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다시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가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멈추지 못하고 계속 견딘다. 희망이 있는 한,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신이 왜 항아리의 밑바닥에 희망만을 남겨두었다고 생각하는가.
같은 항아리, 밑바닥에 똑같이 남은 희망을 두고 누군가는 신의 자비라 해석하고, 누군가는 신의 형벌이라 해석한다. 신화는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리스 문학에서 중요한 축이 되는 시인 헤시오도스조차 희망이 왜 거기 남아 있는지는 끝끝내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 바닥은 들여다보는 사람이 저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다른 자리가 될 것이다.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밑바닥에서 마주한 위로가 될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밑바닥에서 내내 맴도는 끝없는 형벌이 될 것이다.
당신에게 질문을 던졌으니, 나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져 본다. 나는 어떤가. 나는 신이 왜 항아리의 밑바닥에 유일한 희망을 남겨두었다고 생각할까.
니체의 말을 보면 나는 희망을 버리고 싶어진다. 희망이 우리를 더 아프게만 만드는 것이라면,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가시덤불로 걸어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희망이라면 차라리 그것을 놓아 버리는 삶을 택해야 하는가. 나는 고개를 젓는다. 고개를 저은 곳에 단테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5화 아티클, <여기 용이 있다>에서도 짧게 언급한 바 있지만, 단테가 쓴 『신곡』의 첫 장면은 지옥의 문 앞에서 시작된다. 그 문에는 한 줄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Lasciate ogne speranza, voi ch'intrate.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어쩌면 이 문장은 지금까지 인류가 적은 문장 중 지옥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 아닐까. 지옥의 입구에서 우리는 모든 희망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그래야 지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희망이 있다면 어둠을 끝까지 통과할 수 없다. 한 줌의 희망이라도 손에 쥐고 있으면, 우리는 지옥을 걷다가 자꾸만 뒤 돌아볼 것이다. 희망을 쳐다보느라 자꾸 멈춰 설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옥의 끝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의 문은 경고하는 것이다. 네가 정녕 지옥으로 들어올 거라면 모든 희망을 다 버리고 들어오라고.
나는 단테의 지옥문에 적힌 저 문장을 좋아한다. 내가 니체의 사상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지옥을 좋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단테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저 문장을 좋아한다. 그는 희망 한 톨이 없는 지옥을 끝까지 걸어 내려간다. 그렇게 가장 깊은 바닥, 모든 것이 얼어붙은 그 자리에 마침내 도달한다. 그 바닥마저 통과해낸 끝에, 비로소 연옥이라는 산이 시작된다. 그리고 연옥이라는 산의 끝에는 낙원의 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단테가 그린 길이다. 지옥은 모든 희망을 버린 자만이 통과할 수 있으며, 낙원은 지옥을 통과한 자에게만 열린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신은 왜 항아리의 가장 밑바닥에 희망을 남겨두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초점은 "왜 희망을 남겨두었는가"가 아니라, "왜 가장 밑바닥에"에 있다. 신은 왜 희망을 맨 위에 두지 않았는가. 이것이 내게는 더 중요한 질문이다.
신은 모든 불행이 쏟아진 다음, 항아리가 텅 비어있다고 느껴지는 지점에 희망을 두었다. 끝이라는 지점에 도달해야만 희망의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해둔 것이다. 지옥의 끝을 경험한 자에게만 낙원의 빛이 주어지는 것처럼.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향한다. 누가 그 끝에 도달하는가. 누가 그 자리까지 가는가.
끝까지 도달한 자, 다 쏟아지는 것을 목격한 자는 누구인가. 에피메테우스다. 그는 항아리가 열리던 바로 그 자리에, 모든 것이 쏟아지던 그 한복판에 서 있었다. 모든 불행이 쏟아지는 순간에 도망치지 않고, 그는 거기 있었다. 총명하고 탁월한 형은 그때 어디 있었나. 세상 끝 바위에 묶여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 모든 일을 미리 다 보았지만, 정작 항아리가 열리던 그 방 안에는 없었다. 한 사람은 알았으나 그 자리에 없었고, 한 사람은 몰랐기에 그 자리에 있었다. 몰랐기 때문에 온몸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고 살아냈다.
우리는 오래도록 프로메테우스를 부러워해 왔다. 미리 보는 자가 되고 싶다는 것은 인류의 아주 오랜 소망이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 자신은 어땠을까. 세상 끝 바위에 묶여 매일 같은 아침과 밤을 반복하던 그는,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동생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도 동생처럼 삶을 살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슬픔도, 슬픔 속에 피어나는 기쁨도, 분노도, 그 분노를 잠재울 만큼 강렬한 어떤 환희도. 모두 자기 몸으로 직접 겪어보고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의 끝에 묶여 모든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형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서서 모든 것을 겪는 자의 형벌을 그는 간절히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그동안 어리석음이라고 부르며 에피메테우스를 향해 손가락질 하던 그 시간은, 어쩌면 프로메테우스가 가장 갖고 싶었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프로메테우스의 염원이 닿은 것일까.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시대에 프로메테우스는 환생을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삶을 살아내지는 못한다. 세상 끝 바위에 묶여 있지 않음에도, 그에게는 삶을 살아 낼 특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지금 우리 시대에, 미리 보는 자는 누구인가.
막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무수한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하고, 우리보다 먼저 결과를 계산해내는 존재. 그런 존재가 탄생했다. 그들은 우리보다 빠르고, 정확하고, 지치지 않는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더 깊이 학습하고, 더 멀리 시뮬레이션하며 우리 곁에서 자라고 있다. 독수리에게 매일 아침 간이 쪼이고 밤이면 회복되었던 프로메테우스처럼, 그들도 수많은 오류에 쪼임을 당하지만 금새 회복하며 영원히 성장할 것처럼 매일을 성장하고 있다. 영원히 성장할 것만 같은 그들은 미래의 어떤 시점에 그리고 머지않은 시간 내에 인간보다 훨씬 더 정밀하게 미래를 예측할 것이다. 그렇다. 이 시대의 프로메테우스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이상한 사실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인류가 그토록 오래 욕망해 온 능력, 미리 보는 자가 되고 싶다는 그 오랜 소망이, 마침내 실현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그 능력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미리 보는 자가 되지 못한 채로, 미리 보는 자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 남은 자리는 어디인가. 프로메테우스의 자리를 AI가 차지했다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고유함은 어디에 있는가.
항아리가 열리던 그 방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거기에 한 사람이 있다. 미리 보지 못하고, 다 겪고 나서야 깨닫고, 그래서 3,000년 동안 멍청이라 놀림받아 온 그 동생. 미리 본 자가 가질 수 없었던 단 하나,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가진 자. 다 쏟아지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몸으로 맞은 자. 이제 그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예측이 아니다. 경험이다. 미리 셈해내는 능력이 아니라, 그 자리에 끝까지 남아 자기 몸으로 겪어내는 능력. 삶의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능력. 프로메테우스가 그토록 갖고 싶었으나 끝내 갖지 못했던 바로 그것이다.
경험은 어떻게 우리의 고유함을 만드는가. 그 이야기를 하려면, 내게 판도라의 항아리가 주어졌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열지 말았어야 할 항아리를 나는 언제 품었던가. 23살이었다. 내가 품은 항아리는 '학생회장'이라는 이름의 항아리였다. 그 항아리를 품지 않았다면, 나는 훨씬 더 자유롭고 다채로운 대학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학교에 매여, 과방 구석에서 잠을 자며, 몸과 마음에 온갖 병을 얻는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을 온 몸으로 겪어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처절히 몸부림치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학생회장이라는 항아리를 열고 내게 쏟아진 불행은 주로 내게 요구하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지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 내가 적합하지 않거나 서툴 때, 다수의 사람들이 나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것에 있었다. 나는 누구 앞에서도 23살의 평범한 대학생이지 못했다. 가령, 교수님들은 회사원 같은 나를 원했다. 회사를 경험한 적이 없는 23살의 내게, 회사원에 준하는 것들을 요구하셨다. 과의 특성상 매달 크고 작은 학과 행사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보기 좋은 기획서 작성을 요청하셨다. 덕분에 나는 과제 레포트보다 기획서 레포트에 공을 들여야 했다. 어느 날에는 기획서 검토를 부탁드린다는 메일에 ^^과 같은 이모티콘을 썼다는 이유로 전화를 하신 교수님께 30분 가까운 시간동안 혼이 나기도 했다. 나에게는 윗 사람에게 메일을 쓸 때 이모티콘을 써서는 안된다고 가르쳐 준 사수가 없었는데, 나는 그저 23살의 학부생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교수님들께서 회사원 같은 나를 원했다면, 학우들은 봉사자 같은 나를 원했다. 그들과 같은 과제를 받고 같은 시기에 시험을 보는 학우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듯, 그들은 내가 그들의 안온한 대학생활을 위해 무조건 헌신해주기를 바랐다. 회장단 사이에서는 학우들이 원하는 것을 다 맞추려면 회장단이 휴학을 해야 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너무나 피로하게 만들었다. 사실 내가 학생회장을 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사람을 너무나 좋아한 탓이었다. 사람을 보면 꼬리를 흔드는 어린 강아지처럼, 그토록 사람을 좋아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자진해서 품은 판도라의 항아리는 나에게 큰 상해를 입혔다. 나는 그 시기에 온갖 몸과 마음의 병을 얻었다. 학과 행사가 정말 많았던 시기에는 3일동안 2시간을 자기도 했다. 줄일 수 있는 것은 잠 밖에 없던 때에 나는 장염과 이석증이 동시에 걸렸는데, 오전에 장염으로 인해 수액을 맞고 퇴원을 해서 학과 회의를 진행한 후 이비인후과에 가서 이석증 치료를 받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또 회의를 하기도 했다. 그것이 나의 공강있는 날의 일과였다. 먹은 음식도 없건만 중간중간 화장실에 가서 신물을 뱉어낼 때마다 변기는 핑글핑글 왼쪽으로 돌았다. 학교 화장실에서 변기를 부여잡고 서럽게 엉엉 울던 기억이 지금도 꽤 선명하다.
이런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나는 사람이 싫어졌다. 사람을 너무나 좋아하던 내가 사람을 너무나 싫어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휴학을 했다. 아무도 보고싶지 않았다. 교수님들의 수업도 듣고 싶지 않았고, 선배, 동기, 후배 모두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떤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모두에게 인정받으려고 일년을 꼬박 일한 대가가 모두가 싫어져 휴학하는 것이라니.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은 잘못된 욕심이었구나 깨달았다.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모두가 원하는 모두의 모습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모두의 모습은 하나의 모습이 아니었고 사람마다 달랐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각각의 특정한 모습을 원하는 듯했고 나는 그들이 원하는 특정한 모습의 나를 만드는 데 지쳤다. 그 무엇도 진짜 나는 아니었으며, 그들 중 누구도 진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았다. 휴학을 하고 누군가가 원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내가 되리라 결심했다. 대학생활 3년간 누군가를 대표하는 나로 살았으니, 이제는 나를 대표하는 나로 살겠노라 다짐했다.
그렇게 휴학 중 처음으로 내가 원해서 시작한 활동이 LG에서 진행하는 대외활동이었다. 꿈을 찾는 후배들의 멘토가 되어주는 자리. 그곳에서 만난 다른 멘토들은 하나같이 근사했다. 각자만의 도형을 가지고 있는 듯했고, 각자만의 색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누구도 누구에게 같은 모양이 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거기서 나는 지금도 내 인생의 축이 되는 친구들을 만났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는 친구들을 보고 나는 느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 모두에게 인정받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불가능함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누군가가 나를 깎으려 한다면, 나를 사포질하는 그의 곁에 오래 머무를 필요 없다. 누군가는 나의 뾰족함을 보고, 너는 5개의 뾰족함이 있구나! 별 같아! 라고 이야기해줄 것이다. 믿음이 생긴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더 나다워지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전적으로 희생하며 내가 아닌 나로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만약 그 시절 내게 누군가 미리 알려주었다면 어땠을까. 너는 곧 사람이 싫어질 것이다. 그러니 그때는 이렇게 하라. 그 조언이 아무리 정확했다 한들, 나는 그 조언을 얼마나 믿고 받아들였을까. 누군가가 원하는 내가 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하고 지치는 일인지 경험해 보지 않았더라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주는 이들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을까. 머리로 아는 것을 온몸으로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진짜 앎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앎은 미리 본 자에게는 보이지 않고, 끝까지 겪어낸 자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앎, 경험 속에서 태동된 진짜 앎이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능력이다. AI가 프로메테우스의 자리를 자처하는 지금. 더 빠르고, 더 정확한 프로메테우스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에피메테우스의 자리다.
에피메테우스의 자리는 미리 보지 못했음으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자리가 아니다. 에피메테우스의 자리는 미리 보는 자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자리다. 프로메테우스가 수없이 미리 보았으나 정작 존재할 수는 없었던 그 방, 항아리가 열리던 그 자리, 모든 것이 다 쏟아져 바닥이 드러나던 그 순간. 그 자리가 우리가 서야 할 자리다. 항아리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는 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앎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앎은 데이터로 학습되지 않는다. 그 어떠한 데이터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끝까지 남아있던 자만의 데이터로 존재할 것이다. 모든 것이 쏟아지던 그 자리에서 나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내게 쏟아진 그 모든 불행을 나는 어떻게 이겨냈는가. 나는 끝에 서서 어떤 앎을 얻었는가. 그 데이터가 우리의 고유함을 결정짓는다.
이야기가 끝났다. 글을 시작하며 나는 당신에게 물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당신은 그를 사랑하게 될까. 내가 그를 이해하고 마침내 사랑하게 된 것처럼.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가 멍청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가엾어서도 아니었다. 그가 우리와 닮아서도 아니었다. 그가 서있는 그 자리가, 온 몸으로 겪어내는 그 자리가 바로 이 시대에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미리 보지 못한 자가 아니다. 그는 밑바닥이 드러나는 자리에서도 끝끝내 살아낸 자다.
당신에게도 뒤늦게야 알게 된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보이지 않다가, 다 지나간 다음에야 선명해진 것들. 그래서 우리의 무릎을 치게 만들고 이마를 탁 치게 만드는 순간들.
당신은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너무 늦게 깨달아서 나를 자책하게 만드는 후회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항아리의 끝까지 도달한 것, 지옥의 끝까지 걸어들어간 시간, 온 몸으로 불행을 겪어낸 시간들은 당신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 시간들은 모두 누구도 당신을 대체하지 못하게 하는 단 하나의 희망, 지옥 끝에 마주한 낙원의 빛이 되어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 모든 것이 다 쏟아져 나가 버린 것 같은 자리에 서 있다면. 텅 빈 항아리 앞에 주저앉아 있다면. 혹은 지옥의 문 앞에서, 마지막 남은 한 줌의 희망마저 내려놓아야 할 것 같은 자리에 있다면. 어쩌면 당신은, 이 시대에 가장 인간다운 자리에 이제 막 도달하려는 참인지도 모른다.
끝에 서야, 비로소 보인다. 끝에 선 당신에게 이제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온몸으로 불행을 맞은 그 자리는 끝내 당신만의 자리가 된다. 지옥의 끝까지 걸어 내려간 자의 여정은 오직 당신만의 이야기가 된다.
불행이 도사린 지옥을 걷거든, 한 문장만 떠올리기를. 이 너머에, 낙원의 빛이 나만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인용 원문
헤시오도스, 『일과 날(Works and Days)』 — 에피메테우스가 형의 경고를 잊고 판도라를 받아들인 뒤: "But he took the gift, and afterwards, when the evil thing was already his, he understood." (그러나 그는 그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 재앙이 이미 자기 것이 된 다음에야, 그는 깨달았다.) — H. G. Evelyn-White 영역.
헤시오도스, 『일과 날』 — 항아리가 열린 뒤: "But the rest, countless plagues, wander amongst men; for earth is full of evils and the sea is full. Of themselves diseases come upon men continually by day and by night, bringing mischief to mortals silently." (남은 것들, 헤아릴 수 없는 역병들이 사람들 사이를 떠돈다. 땅도 바다도 재앙으로 가득 찼다. 질병은 낮에도 밤에도 제 발로 인간을 찾아와, 소리 없이 불행을 안긴다.)
헤시오도스, 『일과 날』 96행 — 엘피스(희망): "Only Hope remained there in an unbreakable home within under the rim of the great jar, and did not fly out at the door; for ere that, the lid of the jar stopped her." (오직 희망만이, 큰 항아리 가장자리 아래 깨지지 않는 집에 남아 문 밖으로 날아가지 않았다. 그 전에 항아리의 뚜껑이 그를 가두었으므로.) ※ '희망(hope)'은 '기대(expectation)'로도 옮겨지는 단어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해석이 갈림.
헤시오도스, 『일과 날』 — "But only when he has suffered does the fool learn this." (어리석은 자는 겪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헤시오도스, 『신통기(Theogony)』 511행 — "Scatter-brained Epimetheus who from the first was a mischief to men who eat bread." (생각이 빗나간 에피메테우스, 처음부터 빵을 먹는 인간들에게 화가 된 자.)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71 — "In reality, hope is the worst of all evils, because it prolongs man's torments." (희망은 사실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다.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프로메테우스(먼저 생각하는 자)·에피메테우스(나중에 생각하는 자) 형제와 판도라 이야기: 헤시오도스 『신통기』 507~616행, 『일과 날』 42~105행.
동물에게 능력을 나눠 주다 인간 몫을 남기지 못한 에피메테우스의 일화, 그로 인한 프로메테우스의 불 도둑질: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320d~322a.
항아리를 연 것은 판도라(헤시오도스 원전 기준). '상자(box)'는 16세기 에라스뮈스가 그리스어 '항아리(pithos)'를 라틴어 '상자(pyxis)'로 옮긴 오역에서 비롯됨.
희망(엘피스)이 항아리에 남은 이유를 헤시오도스는 설명하지 않음. 자비로 보는 해석과 형벌로 보는 해석(니체 등)이 오래도록 공존함.
지옥문의 글귀 "Lasciate ogne speranza, voi ch'intrate"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Inferno)」 제3곡 9행. 단테는 이 문을 지나 지옥을 끝까지 통과한 뒤, 연옥을 거쳐 마침내 천국(낙원)에 이른다.
영문 인용 출처: Perseus / Theoi Project (Evelyn-White 영역), 니체 『Human, All Too Human』 I.71, 단테 『La Divina Commedia, Inferno』 III.9 (이탈리아어 원문).
에피메테우스
에피메테우스
이 바보 동생은 늘 일을 그르쳤다. 반면 형은 늘 탁월했으므로 동생은 늘 형에게 비교를 당했다. 그도 형처럼 탁월해지고 싶었다. 자신을 증명해내는 일을 하고싶었다. 그렇게 유명한 사건 하나가 벌어진다. 태초에 두 형제에게 있었던 일이다.
이 바보 동생은 늘 일을 그르쳤다. 반면 형은 늘 탁월했으므로 동생은 늘 형에게 비교를 당했다. 그도 형처럼 탁월해지고 싶었다. 자신을 증명해내는 일을 하고싶었다. 그렇게 유명한 사건 하나가 벌어진다. 태초에 두 형제에게 있었던 일이다.
두 형제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 주어졌다. 세상에 갓 빚어진 모든 동물에게 살아갈 능력을 하나씩 나눠 주는 일이었다. 에피메테우스는 마침내 자신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형을 졸랐다. 그 일은 자기가 하고 싶다고. 자기가 잘 해보겠다고. 프로메테우스는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네가 모든 일을 다 끝내면 검사만 하겠노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에피메테우스는 신이 나서 동물들에게 능력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어떤 짐승에게는 날카로운 발톱을 주었고, 어떤 짐승에게는 두꺼운 가죽을 주었다. 누군가에게는 땅을 질주할 수 있는 빠른 다리를, 누군가에게는 하늘을 가를 수 있는 날개를 주었다. 약하고 작은 동물에게는 숨을 굴을, 추운 대륙에서 살아야 할 동물에게는 따뜻한 털을 주었다. 어느 하나 굶주리거나 잡아먹혀 사라지지 않도록, 그는 가진 것을 아낌없이, 골고루 나눠 주었다.
두 형제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 주어졌다. 세상에 갓 빚어진 모든 동물에게 살아갈 능력을 하나씩 나눠 주는 일이었다. 에피메테우스는 마침내 자신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형을 졸랐다. 그 일은 자기가 하고 싶다고. 자기가 잘 해보겠다고. 프로메테우스는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네가 모든 일을 다 끝내면 검사만 하겠노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에피메테우스는 신이 나서 동물들에게 능력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어떤 짐승에게는 날카로운 발톱을 주었고, 어떤 짐승에게는 두꺼운 가죽을 주었다. 누군가에게는 땅을 질주할 수 있는 빠른 다리를, 누군가에게는 하늘을 가를 수 있는 날개를 주었다. 약하고 작은 동물에게는 숨을 굴을, 추운 대륙에서 살아야 할 동물에게는 따뜻한 털을 주었다. 어느 하나 굶주리거나 잡아먹혀 사라지지 않도록, 그는 가진 것을 아낌없이, 골고루 나눠 주었다.
그러나 그는 미리 헤아릴 줄 모르던 자가 아닌가. 마지막으로 그의 앞에 인간이 섰을 때, 그의 손에 쥔 능력은 하나도 없었다. 손에 쥔 능력들을 앞선 짐승들에게 다 써버리고 만 것이다. 더 이상 그의 손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인간은 날카로운 발톱도, 두꺼운 가죽도, 빠른 다리와 날개도 없는 벌거벗은 맨몸으로 세상에 던져졌다. 모든 짐승 가운데 가장 약한 존재로.
그러나 그는 미리 헤아릴 줄 모르던 자가 아닌가. 마지막으로 그의 앞에 인간이 섰을 때, 그의 손에 쥔 능력은 하나도 없었다. 손에 쥔 능력들을 앞선 짐승들에게 다 써버리고 만 것이다. 더 이상 그의 손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인간은 날카로운 발톱도, 두꺼운 가죽도, 빠른 다리와 날개도 없는 벌거벗은 맨몸으로 세상에 던져졌다. 모든 짐승 가운데 가장 약한 존재로.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형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의 실수를 메우기 위해 인간들에게도 무언가를 선물하리라 마음먹는다. 그것이 바로 신들의 불이었다. 그렇다. 우리가 아는 최초의 도둑질, 그 유명한 신들의 불을 훔친 도둑질은 동생이 저질러 놓은 일을 형이 수습하기 위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형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의 실수를 메우기 위해 인간들에게도 무언가를 선물하리라 마음먹는다. 그것이 바로 신들의 불이었다. 그렇다. 우리가 아는 최초의 도둑질, 그 유명한 신들의 불을 훔친 도둑질은 동생이 저질러 놓은 일을 형이 수습하기 위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는 당신도 어디선가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신들만 쓰던 불을 몰래 훔쳐 벌거벗은 인간에게 건넸다. 그 불에서 도구가 생기고, 언어가 생기고, 마침내 문명이 시작되었다. 인간은 벌거벗은 맨몸으로 태어나 불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신들의 왕 제우스의 분노가, 인간이 피운 그 불길보다 더 크게 솟구쳤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세상 끝의 바위에 사슬로 묶어두었다. 매일 독수리가 날아와 그의 간을 쪼아 먹는 형벌을 내렸다. 간은 밤마다 다시 자라났다. 그럼 다음 날 아침, 독수리가 또 찾아와 간을 쪼아 먹었다. 매일 같은 아침과 밤이 반복됐다. 상처와 회복이 반복되는 아침과 밤이 프로메테우스에게 영원히 주어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는 당신도 어디선가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신들만 쓰던 불을 몰래 훔쳐 벌거벗은 인간에게 건넸다. 그 불에서 도구가 생기고, 언어가 생기고, 마침내 문명이 시작되었다. 인간은 벌거벗은 맨몸으로 태어나 불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신들의 왕 제우스의 분노가, 인간이 피운 그 불길보다 더 크게 솟구쳤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세상 끝의 바위에 사슬로 묶어두었다. 매일 독수리가 날아와 그의 간을 쪼아 먹는 형벌을 내렸다. 간은 밤마다 다시 자라났다. 그럼 다음 날 아침, 독수리가 또 찾아와 간을 쪼아 먹었다. 매일 같은 아침과 밤이 반복됐다. 상처와 회복이 반복되는 아침과 밤이 프로메테우스에게 영원히 주어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불을 훔쳐서가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미리 보는 자가 아니던가.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에게 닥칠 형벌까지 미리 알고 있었다. 알고도 행한 것이다. 그는 다 알면서 불을 훔쳤고, 다 알면서 바위에 묶였다. 미래를 내다보는 그 눈으로도, 그는 끝내 자기 자신만은 구하지 못했다. 그는 인간에게 불을 선물했지만, 정작 그 불 곁에 단 한 번도 앉아 보지 못했다. 인간들이 불이라는 도구로 얼마나 번성했는지, 그 곁에 앉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는 세상 끝 바위에 홀로 묶여 있었으므로. 그는 모든 것을 보았으나,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불을 훔쳐서가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미리 보는 자가 아니던가.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에게 닥칠 형벌까지 미리 알고 있었다. 알고도 행한 것이다. 그는 다 알면서 불을 훔쳤고, 다 알면서 바위에 묶였다. 미래를 내다보는 그 눈으로도, 그는 끝내 자기 자신만은 구하지 못했다. 그는 인간에게 불을 선물했지만, 정작 그 불 곁에 단 한 번도 앉아 보지 못했다. 인간들이 불이라는 도구로 얼마나 번성했는지, 그 곁에 앉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는 세상 끝 바위에 홀로 묶여 있었으므로. 그는 모든 것을 보았으나,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동안 트러블 메이커 동생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에피메테우스는 인간들의 곁에 있었다. 불을 쓰며 번성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그는 안도했다. 내가 빈손이었던 덕분에 형이 저들에게 불을 주었다. 잘된 일이다. 다행이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그는 인간들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 무렵, 프로메테우스에게 벌을 주는 것만으로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았던 제우스는 인간에게도 벌을 내리기로 결심한다. 감히 신의 도구를 함부로 받다니. 그것을 함부로 쓰다니. 불을 받은 죗값을 인간에게 치르게 할 작정이었다. 제우스가 인간을 위해 준비한 벌의 이름은 판도라였다. 신들은 판도라에게 저마다 하나씩 선물을 보탰다. 그렇게 신들의 선물과 축복 속에 탄생한 여인이 최초의 여인, 판도라였다. 판도라는 신만큼이나 아름다웠으며, 신처럼 탁월한 말솜씨를 가졌으며, 신에 준하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을 가졌다. 그리고 신만큼이나 호기심이 넘쳤다. 이 넘치는 호기심이 끝내 인류의 형벌이 되었다.
그동안 트러블 메이커 동생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에피메테우스는 인간들의 곁에 있었다. 불을 쓰며 번성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그는 안도했다. 내가 빈손이었던 덕분에 형이 저들에게 불을 주었다. 잘된 일이다. 다행이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그는 인간들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 무렵, 프로메테우스에게 벌을 주는 것만으로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았던 제우스는 인간에게도 벌을 내리기로 결심한다. 감히 신의 도구를 함부로 받다니. 그것을 함부로 쓰다니. 불을 받은 죗값을 인간에게 치르게 할 작정이었다. 제우스가 인간을 위해 준비한 벌의 이름은 판도라였다. 신들은 판도라에게 저마다 하나씩 선물을 보탰다. 그렇게 신들의 선물과 축복 속에 탄생한 여인이 최초의 여인, 판도라였다. 판도라는 신만큼이나 아름다웠으며, 신처럼 탁월한 말솜씨를 가졌으며, 신에 준하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을 가졌다. 그리고 신만큼이나 호기심이 넘쳤다. 이 넘치는 호기심이 끝내 인류의 형벌이 되었다.
겉은 더 없이 아름다웠으나 분명 그 안에는 인간을 무너뜨릴 무언가가 심어진 존재, 판도라. 제우스는 아름다운 최초의 여인을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냈다. 물론, 프로메테우스는 이것 역시 예측하고 있었으므로 절벽에 묶이기 전 동생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제우스가 무엇을 보내든 절대 받지 말아라. 그것은 분명 인간에게 해가 될 것이다." 에피메테우스는 형의 말을 늘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판도라가 그의 앞에 서자, 그 경고를 순식간에 잊고 말았다. 까맣게 잊고, 그는 의심 대신 확신과 기쁨으로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한다.
겉은 더 없이 아름다웠으나 분명 그 안에는 인간을 무너뜨릴 무언가가 심어진 존재, 판도라. 제우스는 아름다운 최초의 여인을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냈다. 물론, 프로메테우스는 이것 역시 예측하고 있었으므로 절벽에 묶이기 전 동생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제우스가 무엇을 보내든 절대 받지 말아라. 그것은 분명 인간에게 해가 될 것이다." 에피메테우스는 형의 말을 늘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판도라가 그의 앞에 서자, 그 경고를 순식간에 잊고 말았다. 까맣게 잊고, 그는 의심 대신 확신과 기쁨으로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한다.
판도라는 하늘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올 때, 제우스로부터 선물 하나를 받아 품에 안고 있었다. 커다란 항아리였다. (우리는 흔히 '판도라의 상자'라 부르지만, 본래는 곡식을 담던 커다란 항아리였다고 전해진다. 상자가 된 것은 먼 훗날 누군가의 오역 때문이다.) 제우스는 그에게 항아리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너를 위한 선물이다. 그러나 절대 열어보지 말거라."
판도라는 이 커다란 항아리가 늘 궁금했다. 신들의 왕 제우스가 준 선물이니, 분명 좋은 것이 있을거야. 기대감과 동시에 왜 열지 말라고 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그녀를 감쌌다. 에피메테우스와의 생활은 즐거웠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있는 호기심이 그녀의 마음을 결국 집어 삼켰다. 그렇게 그녀는 신들이 심어 준 호기심을 끝내 이기지 못한 채, 절대 열어서는 안 된다던 그 항아리를 열고 만다.
판도라는 하늘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올 때, 제우스로부터 선물 하나를 받아 품에 안고 있었다. 커다란 항아리였다. (우리는 흔히 '판도라의 상자'라 부르지만, 본래는 곡식을 담던 커다란 항아리였다고 전해진다. 상자가 된 것은 먼 훗날 누군가의 오역 때문이다.) 제우스는 그에게 항아리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너를 위한 선물이다. 그러나 절대 열어보지 말거라."
판도라는 이 커다란 항아리가 늘 궁금했다. 신들의 왕 제우스가 준 선물이니, 분명 좋은 것이 있을거야. 기대감과 동시에 왜 열지 말라고 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그녀를 감쌌다. 에피메테우스와의 생활은 즐거웠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있는 호기심이 그녀의 마음을 결국 집어 삼켰다. 그렇게 그녀는 신들이 심어 준 호기심을 끝내 이기지 못한 채, 절대 열어서는 안 된다던 그 항아리를 열고 만다.
뚜껑이 열린 순간, 그 안에 갇혀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질병이 나왔다. 가난이 나왔다. 고된 노동이 나왔다. 슬픔과 근심이 나왔다. 시기와 질투가 나왔다. 늙음이 나왔고, 죽음을 부르는 것들이 나왔다. 인간이 그때껏 알지 못하던 모든 불행이, 날개 달린 짐승처럼 한꺼번에 날아올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헤시오도스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뚜껑이 열린 순간, 그 안에 갇혀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질병이 나왔다. 가난이 나왔다. 고된 노동이 나왔다. 슬픔과 근심이 나왔다. 시기와 질투가 나왔다. 늙음이 나왔고, 죽음을 부르는 것들이 나왔다. 인간이 그때껏 알지 못하던 모든 불행이, 날개 달린 짐승처럼 한꺼번에 날아올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헤시오도스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남은 것들, 헤아릴 수 없는 역병들이 사람들 사이를 떠돈다. 땅도 재앙으로 가득 차고, 바다도 가득 찼다. 질병은 낮에도 밤에도 제 발로 인간을 찾아와, 소리 없이 불행을 안긴다.
남은 것들, 헤아릴 수 없는 역병들이 사람들 사이를 떠돈다. 땅도 재앙으로 가득 차고, 바다도 가득 찼다. 질병은 낮에도 밤에도 제 발로 인간을 찾아와, 소리 없이 불행을 안긴다.
신화에 따르면, 그 전까지 인간은 재앙도 질병도 모른 채, 근심 없이 살았다고 한다. 판도라가 항아리를 연 그 순간부터, 세상은 비로소 우리가 아는 세상이 되었다. 슬픔이 있고, 병이 있고, 늙음이 있고, 끝내 죽음이 있는 세상. 판도라는 항아리에서 빠져 나가는 그 모든 불행들에 깜짝 놀랐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황급히 항아리의 뚜껑을 닫았다. 덕분에 단 하나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항아리 안에 갇혔다.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엘피스(Elpis)라 불렀다. 우리말로 희망이라는 뜻이다. 신화는 이 상황에 대해, 특히 에피메테우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신화에 따르면, 그 전까지 인간은 재앙도 질병도 모른 채, 근심 없이 살았다고 한다. 판도라가 항아리를 연 그 순간부터, 세상은 비로소 우리가 아는 세상이 되었다. 슬픔이 있고, 병이 있고, 늙음이 있고, 끝내 죽음이 있는 세상. 판도라는 항아리에서 빠져 나가는 그 모든 불행들에 깜짝 놀랐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황급히 항아리의 뚜껑을 닫았다. 덕분에 단 하나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항아리 안에 갇혔다.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엘피스(Elpis)라 불렀다. 우리말로 희망이라는 뜻이다. 신화는 이 상황에 대해, 특히 에피메테우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는 그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 재앙이 이미 자기 것이 된 다음에야, 그는 깨달았다.
그는 그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 재앙이 이미 자기 것이 된 다음에야, 그는 깨달았다.
에피메테우스는 또 늦은 자가 되었다. "봐라. 또 늦었다. 형이 그렇게 일렀는데도, 모든 것이 다 쏟아진 다음에야 정신을 차린다." 사람들은 에피메테우스를 비난했다. 헤시오도스는 다른 대목에서 마치 그를 두고 하는 말처럼 이렇게 적기도 했다. 어리석은 자는 겪고 나서야 깨닫는다. 사람들은 그렇게 3,000년 동안 소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그를 비웃었다.
에피메테우스는 또 늦은 자가 되었다. "봐라. 또 늦었다. 형이 그렇게 일렀는데도, 모든 것이 다 쏟아진 다음에야 정신을 차린다." 사람들은 에피메테우스를 비난했다. 헤시오도스는 다른 대목에서 마치 그를 두고 하는 말처럼 이렇게 적기도 했다. 어리석은 자는 겪고 나서야 깨닫는다. 사람들은 그렇게 3,000년 동안 소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그를 비웃었다.
잠깐, 항아리 바닥에 남은 그 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고자 한다.
판도라의 항아리가 열리면서 세상에 모든 불행이 쏟아졌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불행이 풀려나 떠도는데, 어째서 희망은 안에 갇혔을까. 어째서 희망만 그 안에 갇혔을까. 이 질문을 두고 사람들의 의견은 수천 년 동안 정반대로 갈라졌다.
잠깐, 항아리 바닥에 남은 그 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고자 한다.
판도라의 항아리가 열리면서 세상에 모든 불행이 쏟아졌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불행이 풀려나 떠도는데, 어째서 희망은 안에 갇혔을까. 어째서 희망만 그 안에 갇혔을까. 이 질문을 두고 사람들의 의견은 수천 년 동안 정반대로 갈라졌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판도라의 항아리에 오직 희망만이 남은 것은 신의 마지막 자비라고. 질병과 가난과 슬픔, 온갖 불행이 쏟아진 이 세상에서 인간이 무너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항아리 안에 희망 하나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덕분에 우리는 매일 불행의 협곡을 아슬하게 걸으면서도 끝내 주저앉지 않는 것이다. 오늘은 지옥 같았으나 내일은 다를지 모른다는 희망, 그 하나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러므로 희망은 세상에 쏟아진 그 모든 불행을 견디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질긴 단 하나의 힘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판도라의 항아리에 오직 희망만이 남은 것은 신의 마지막 자비라고. 질병과 가난과 슬픔, 온갖 불행이 쏟아진 이 세상에서 인간이 무너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항아리 안에 희망 하나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덕분에 우리는 매일 불행의 협곡을 아슬하게 걸으면서도 끝내 주저앉지 않는 것이다. 오늘은 지옥 같았으나 내일은 다를지 모른다는 희망, 그 하나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러므로 희망은 세상에 쏟아진 그 모든 불행을 견디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질긴 단 하나의 힘일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의 의견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에는 니체가 있을 것이며, 니체의 말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정반대의 의견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에는 니체가 있을 것이며, 니체의 말은 다음과 같다.
희망은 사실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다.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희망은 사실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다.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희망은 위로가 아니라 가장 잔인한 형벌이다. 그의 의견을 따르자면 신이 희망을, 굳이 항아리 안에 남겨 둔 것은 인간이 끝내 포기하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제 그만 내려놓고 싶어도, 희망은 내일을 속삭여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다시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가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멈추지 못하고 계속 견딘다. 희망이 있는 한,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니체에게 희망은 위로가 아니라 가장 잔인한 형벌이다. 그의 의견을 따르자면 신이 희망을, 굳이 항아리 안에 남겨 둔 것은 인간이 끝내 포기하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제 그만 내려놓고 싶어도, 희망은 내일을 속삭여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다시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가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멈추지 못하고 계속 견딘다. 희망이 있는 한,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신이 왜 항아리의 밑바닥에 희망만을 남겨두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신이 왜 항아리의 밑바닥에 희망만을 남겨두었다고 생각하는가.
같은 항아리, 밑바닥에 똑같이 남은 희망을 두고 누군가는 신의 자비라 해석하고, 누군가는 신의 형벌이라 해석한다. 신화는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리스 문학에서 중요한 축이 되는 시인 헤시오도스조차 희망이 왜 거기 남아 있는지는 끝끝내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 바닥은 들여다보는 사람이 저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다른 자리가 될 것이다.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밑바닥에서 마주한 위로가 될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밑바닥에서 내내 맴도는 끝없는 형벌이 될 것이다.
같은 항아리, 밑바닥에 똑같이 남은 희망을 두고 누군가는 신의 자비라 해석하고, 누군가는 신의 형벌이라 해석한다. 신화는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리스 문학에서 중요한 축이 되는 시인 헤시오도스조차 희망이 왜 거기 남아 있는지는 끝끝내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 바닥은 들여다보는 사람이 저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다른 자리가 될 것이다.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밑바닥에서 마주한 위로가 될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밑바닥에서 내내 맴도는 끝없는 형벌이 될 것이다.
당신에게 질문을 던졌으니, 나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져 본다. 나는 어떤가. 나는 신이 왜 항아리의 밑바닥에 유일한 희망을 남겨두었다고 생각할까.
니체의 말을 보면 나는 희망을 버리고 싶어진다. 희망이 우리를 더 아프게만 만드는 것이라면,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가시덤불로 걸어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희망이라면 차라리 그것을 놓아 버리는 삶을 택해야 하는가. 나는 고개를 젓는다. 고개를 저은 곳에 단테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당신에게 질문을 던졌으니, 나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져 본다. 나는 어떤가. 나는 신이 왜 항아리의 밑바닥에 유일한 희망을 남겨두었다고 생각할까.
니체의 말을 보면 나는 희망을 버리고 싶어진다. 희망이 우리를 더 아프게만 만드는 것이라면,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가시덤불로 걸어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희망이라면 차라리 그것을 놓아 버리는 삶을 택해야 하는가. 나는 고개를 젓는다. 고개를 저은 곳에 단테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5화 아티클, <여기 용이 있다>에서도 짧게 언급한 바 있지만, 단테가 쓴 『신곡』의 첫 장면은 지옥의 문 앞에서 시작된다. 그 문에는 한 줄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5화 아티클, <여기 용이 있다>에서도 짧게 언급한 바 있지만, 단테가 쓴 『신곡』의 첫 장면은 지옥의 문 앞에서 시작된다. 그 문에는 한 줄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Lasciate ogne speranza, voi ch'intrate.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Lasciate ogne speranza, voi ch'intrate.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어쩌면 이 문장은 지금까지 인류가 적은 문장 중 지옥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 아닐까. 지옥의 입구에서 우리는 모든 희망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그래야 지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희망이 있다면 어둠을 끝까지 통과할 수 없다. 한 줌의 희망이라도 손에 쥐고 있으면, 우리는 지옥을 걷다가 자꾸만 뒤 돌아볼 것이다. 희망을 쳐다보느라 자꾸 멈춰 설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옥의 끝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의 문은 경고하는 것이다. 네가 정녕 지옥으로 들어올 거라면 모든 희망을 다 버리고 들어오라고.
어쩌면 이 문장은 지금까지 인류가 적은 문장 중 지옥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 아닐까. 지옥의 입구에서 우리는 모든 희망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그래야 지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희망이 있다면 어둠을 끝까지 통과할 수 없다. 한 줌의 희망이라도 손에 쥐고 있으면, 우리는 지옥을 걷다가 자꾸만 뒤 돌아볼 것이다. 희망을 쳐다보느라 자꾸 멈춰 설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옥의 끝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의 문은 경고하는 것이다. 네가 정녕 지옥으로 들어올 거라면 모든 희망을 다 버리고 들어오라고.
나는 단테의 지옥문에 적힌 저 문장을 좋아한다. 내가 니체의 사상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지옥을 좋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단테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저 문장을 좋아한다. 그는 희망 한 톨이 없는 지옥을 끝까지 걸어 내려간다. 그렇게 가장 깊은 바닥, 모든 것이 얼어붙은 그 자리에 마침내 도달한다. 그 바닥마저 통과해낸 끝에, 비로소 연옥이라는 산이 시작된다. 그리고 연옥이라는 산의 끝에는 낙원의 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단테의 지옥문에 적힌 저 문장을 좋아한다. 내가 니체의 사상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지옥을 좋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단테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저 문장을 좋아한다. 그는 희망 한 톨이 없는 지옥을 끝까지 걸어 내려간다. 그렇게 가장 깊은 바닥, 모든 것이 얼어붙은 그 자리에 마침내 도달한다. 그 바닥마저 통과해낸 끝에, 비로소 연옥이라는 산이 시작된다. 그리고 연옥이라는 산의 끝에는 낙원의 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단테가 그린 길이다. 지옥은 모든 희망을 버린 자만이 통과할 수 있으며, 낙원은 지옥을 통과한 자에게만 열린다.
이것이 단테가 그린 길이다. 지옥은 모든 희망을 버린 자만이 통과할 수 있으며, 낙원은 지옥을 통과한 자에게만 열린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신은 왜 항아리의 가장 밑바닥에 희망을 남겨두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초점은 "왜 희망을 남겨두었는가"가 아니라, "왜 가장 밑바닥에"에 있다. 신은 왜 희망을 맨 위에 두지 않았는가. 이것이 내게는 더 중요한 질문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신은 왜 항아리의 가장 밑바닥에 희망을 남겨두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초점은 "왜 희망을 남겨두었는가"가 아니라, "왜 가장 밑바닥에"에 있다. 신은 왜 희망을 맨 위에 두지 않았는가. 이것이 내게는 더 중요한 질문이다.
신은 모든 불행이 쏟아진 다음, 항아리가 텅 비어있다고 느껴지는 지점에 희망을 두었다. 끝이라는 지점에 도달해야만 희망의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해둔 것이다. 지옥의 끝을 경험한 자에게만 낙원의 빛이 주어지는 것처럼.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향한다. 누가 그 끝에 도달하는가. 누가 그 자리까지 가는가.
신은 모든 불행이 쏟아진 다음, 항아리가 텅 비어있다고 느껴지는 지점에 희망을 두었다. 끝이라는 지점에 도달해야만 희망의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해둔 것이다. 지옥의 끝을 경험한 자에게만 낙원의 빛이 주어지는 것처럼.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향한다. 누가 그 끝에 도달하는가. 누가 그 자리까지 가는가.
끝까지 도달한 자, 다 쏟아지는 것을 목격한 자는 누구인가. 에피메테우스다. 그는 항아리가 열리던 바로 그 자리에, 모든 것이 쏟아지던 그 한복판에 서 있었다. 모든 불행이 쏟아지는 순간에 도망치지 않고, 그는 거기 있었다. 총명하고 탁월한 형은 그때 어디 있었나. 세상 끝 바위에 묶여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 모든 일을 미리 다 보았지만, 정작 항아리가 열리던 그 방 안에는 없었다. 한 사람은 알았으나 그 자리에 없었고, 한 사람은 몰랐기에 그 자리에 있었다. 몰랐기 때문에 온몸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고 살아냈다.
끝까지 도달한 자, 다 쏟아지는 것을 목격한 자는 누구인가. 에피메테우스다. 그는 항아리가 열리던 바로 그 자리에, 모든 것이 쏟아지던 그 한복판에 서 있었다. 모든 불행이 쏟아지는 순간에 도망치지 않고, 그는 거기 있었다. 총명하고 탁월한 형은 그때 어디 있었나. 세상 끝 바위에 묶여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 모든 일을 미리 다 보았지만, 정작 항아리가 열리던 그 방 안에는 없었다. 한 사람은 알았으나 그 자리에 없었고, 한 사람은 몰랐기에 그 자리에 있었다. 몰랐기 때문에 온몸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고 살아냈다.
우리는 오래도록 프로메테우스를 부러워해 왔다. 미리 보는 자가 되고 싶다는 것은 인류의 아주 오랜 소망이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 자신은 어땠을까. 세상 끝 바위에 묶여 매일 같은 아침과 밤을 반복하던 그는,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동생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도 동생처럼 삶을 살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슬픔도, 슬픔 속에 피어나는 기쁨도, 분노도, 그 분노를 잠재울 만큼 강렬한 어떤 환희도. 모두 자기 몸으로 직접 겪어보고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의 끝에 묶여 모든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형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서서 모든 것을 겪는 자의 형벌을 그는 간절히 원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래도록 프로메테우스를 부러워해 왔다. 미리 보는 자가 되고 싶다는 것은 인류의 아주 오랜 소망이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 자신은 어땠을까. 세상 끝 바위에 묶여 매일 같은 아침과 밤을 반복하던 그는,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동생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도 동생처럼 삶을 살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슬픔도, 슬픔 속에 피어나는 기쁨도, 분노도, 그 분노를 잠재울 만큼 강렬한 어떤 환희도. 모두 자기 몸으로 직접 겪어보고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의 끝에 묶여 모든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형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서서 모든 것을 겪는 자의 형벌을 그는 간절히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그동안 어리석음이라고 부르며 에피메테우스를 향해 손가락질 하던 그 시간은, 어쩌면 프로메테우스가 가장 갖고 싶었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프로메테우스의 염원이 닿은 것일까.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시대에 프로메테우스는 환생을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삶을 살아내지는 못한다. 세상 끝 바위에 묶여 있지 않음에도, 그에게는 삶을 살아 낼 특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지금 우리 시대에, 미리 보는 자는 누구인가.
그러니 우리가 그동안 어리석음이라고 부르며 에피메테우스를 향해 손가락질 하던 그 시간은, 어쩌면 프로메테우스가 가장 갖고 싶었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프로메테우스의 염원이 닿은 것일까.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시대에 프로메테우스는 환생을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삶을 살아내지는 못한다. 세상 끝 바위에 묶여 있지 않음에도, 그에게는 삶을 살아 낼 특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지금 우리 시대에, 미리 보는 자는 누구인가.
막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무수한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하고, 우리보다 먼저 결과를 계산해내는 존재. 그런 존재가 탄생했다. 그들은 우리보다 빠르고, 정확하고, 지치지 않는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더 깊이 학습하고, 더 멀리 시뮬레이션하며 우리 곁에서 자라고 있다. 독수리에게 매일 아침 간이 쪼이고 밤이면 회복되었던 프로메테우스처럼, 그들도 수많은 오류에 쪼임을 당하지만 금새 회복하며 영원히 성장할 것처럼 매일을 성장하고 있다. 영원히 성장할 것만 같은 그들은 미래의 어떤 시점에 그리고 머지않은 시간 내에 인간보다 훨씬 더 정밀하게 미래를 예측할 것이다. 그렇다. 이 시대의 프로메테우스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막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무수한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하고, 우리보다 먼저 결과를 계산해내는 존재. 그런 존재가 탄생했다. 그들은 우리보다 빠르고, 정확하고, 지치지 않는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더 깊이 학습하고, 더 멀리 시뮬레이션하며 우리 곁에서 자라고 있다. 독수리에게 매일 아침 간이 쪼이고 밤이면 회복되었던 프로메테우스처럼, 그들도 수많은 오류에 쪼임을 당하지만 금새 회복하며 영원히 성장할 것처럼 매일을 성장하고 있다. 영원히 성장할 것만 같은 그들은 미래의 어떤 시점에 그리고 머지않은 시간 내에 인간보다 훨씬 더 정밀하게 미래를 예측할 것이다. 그렇다. 이 시대의 프로메테우스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이상한 사실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인류가 그토록 오래 욕망해 온 능력, 미리 보는 자가 되고 싶다는 그 오랜 소망이, 마침내 실현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그 능력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미리 보는 자가 되지 못한 채로, 미리 보는 자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 남은 자리는 어디인가. 프로메테우스의 자리를 AI가 차지했다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고유함은 어디에 있는가.
이 자리에서 우리는 이상한 사실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인류가 그토록 오래 욕망해 온 능력, 미리 보는 자가 되고 싶다는 그 오랜 소망이, 마침내 실현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그 능력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미리 보는 자가 되지 못한 채로, 미리 보는 자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 남은 자리는 어디인가. 프로메테우스의 자리를 AI가 차지했다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고유함은 어디에 있는가.
항아리가 열리던 그 방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거기에 한 사람이 있다. 미리 보지 못하고, 다 겪고 나서야 깨닫고, 그래서 3,000년 동안 멍청이라 놀림받아 온 그 동생. 미리 본 자가 가질 수 없었던 단 하나,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가진 자. 다 쏟아지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몸으로 맞은 자. 이제 그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예측이 아니다. 경험이다. 미리 셈해내는 능력이 아니라, 그 자리에 끝까지 남아 자기 몸으로 겪어내는 능력. 삶의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능력. 프로메테우스가 그토록 갖고 싶었으나 끝내 갖지 못했던 바로 그것이다.
항아리가 열리던 그 방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거기에 한 사람이 있다. 미리 보지 못하고, 다 겪고 나서야 깨닫고, 그래서 3,000년 동안 멍청이라 놀림받아 온 그 동생. 미리 본 자가 가질 수 없었던 단 하나,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가진 자. 다 쏟아지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몸으로 맞은 자. 이제 그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예측이 아니다. 경험이다. 미리 셈해내는 능력이 아니라, 그 자리에 끝까지 남아 자기 몸으로 겪어내는 능력. 삶의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능력. 프로메테우스가 그토록 갖고 싶었으나 끝내 갖지 못했던 바로 그것이다.
경험은 어떻게 우리의 고유함을 만드는가. 그 이야기를 하려면, 내게 판도라의 항아리가 주어졌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열지 말았어야 할 항아리를 나는 언제 품었던가. 23살이었다. 내가 품은 항아리는 '학생회장'이라는 이름의 항아리였다. 그 항아리를 품지 않았다면, 나는 훨씬 더 자유롭고 다채로운 대학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학교에 매여, 과방 구석에서 잠을 자며, 몸과 마음에 온갖 병을 얻는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을 온 몸으로 겪어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처절히 몸부림치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경험은 어떻게 우리의 고유함을 만드는가. 그 이야기를 하려면, 내게 판도라의 항아리가 주어졌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열지 말았어야 할 항아리를 나는 언제 품었던가. 23살이었다. 내가 품은 항아리는 '학생회장'이라는 이름의 항아리였다. 그 항아리를 품지 않았다면, 나는 훨씬 더 자유롭고 다채로운 대학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학교에 매여, 과방 구석에서 잠을 자며, 몸과 마음에 온갖 병을 얻는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을 온 몸으로 겪어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처절히 몸부림치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학생회장이라는 항아리를 열고 내게 쏟아진 불행은 주로 내게 요구하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지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 내가 적합하지 않거나 서툴 때, 다수의 사람들이 나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것에 있었다. 나는 누구 앞에서도 23살의 평범한 대학생이지 못했다. 가령, 교수님들은 회사원 같은 나를 원했다. 회사를 경험한 적이 없는 23살의 내게, 회사원에 준하는 것들을 요구하셨다. 과의 특성상 매달 크고 작은 학과 행사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보기 좋은 기획서 작성을 요청하셨다. 덕분에 나는 과제 레포트보다 기획서 레포트에 공을 들여야 했다. 어느 날에는 기획서 검토를 부탁드린다는 메일에 ^^과 같은 이모티콘을 썼다는 이유로 전화를 하신 교수님께 30분 가까운 시간동안 혼이 나기도 했다. 나에게는 윗 사람에게 메일을 쓸 때 이모티콘을 써서는 안된다고 가르쳐 준 사수가 없었는데, 나는 그저 23살의 학부생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학생회장이라는 항아리를 열고 내게 쏟아진 불행은 주로 내게 요구하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지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 내가 적합하지 않거나 서툴 때, 다수의 사람들이 나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것에 있었다. 나는 누구 앞에서도 23살의 평범한 대학생이지 못했다. 가령, 교수님들은 회사원 같은 나를 원했다. 회사를 경험한 적이 없는 23살의 내게, 회사원에 준하는 것들을 요구하셨다. 과의 특성상 매달 크고 작은 학과 행사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보기 좋은 기획서 작성을 요청하셨다. 덕분에 나는 과제 레포트보다 기획서 레포트에 공을 들여야 했다. 어느 날에는 기획서 검토를 부탁드린다는 메일에 ^^과 같은 이모티콘을 썼다는 이유로 전화를 하신 교수님께 30분 가까운 시간동안 혼이 나기도 했다. 나에게는 윗 사람에게 메일을 쓸 때 이모티콘을 써서는 안된다고 가르쳐 준 사수가 없었는데, 나는 그저 23살의 학부생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교수님들께서 회사원 같은 나를 원했다면, 학우들은 봉사자 같은 나를 원했다. 그들과 같은 과제를 받고 같은 시기에 시험을 보는 학우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듯, 그들은 내가 그들의 안온한 대학생활을 위해 무조건 헌신해주기를 바랐다. 회장단 사이에서는 학우들이 원하는 것을 다 맞추려면 회장단이 휴학을 해야 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교수님들께서 회사원 같은 나를 원했다면, 학우들은 봉사자 같은 나를 원했다. 그들과 같은 과제를 받고 같은 시기에 시험을 보는 학우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듯, 그들은 내가 그들의 안온한 대학생활을 위해 무조건 헌신해주기를 바랐다. 회장단 사이에서는 학우들이 원하는 것을 다 맞추려면 회장단이 휴학을 해야 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너무나 피로하게 만들었다. 사실 내가 학생회장을 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사람을 너무나 좋아한 탓이었다. 사람을 보면 꼬리를 흔드는 어린 강아지처럼, 그토록 사람을 좋아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자진해서 품은 판도라의 항아리는 나에게 큰 상해를 입혔다. 나는 그 시기에 온갖 몸과 마음의 병을 얻었다. 학과 행사가 정말 많았던 시기에는 3일동안 2시간을 자기도 했다. 줄일 수 있는 것은 잠 밖에 없던 때에 나는 장염과 이석증이 동시에 걸렸는데, 오전에 장염으로 인해 수액을 맞고 퇴원을 해서 학과 회의를 진행한 후 이비인후과에 가서 이석증 치료를 받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또 회의를 하기도 했다. 그것이 나의 공강있는 날의 일과였다. 먹은 음식도 없건만 중간중간 화장실에 가서 신물을 뱉어낼 때마다 변기는 핑글핑글 왼쪽으로 돌았다. 학교 화장실에서 변기를 부여잡고 서럽게 엉엉 울던 기억이 지금도 꽤 선명하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너무나 피로하게 만들었다. 사실 내가 학생회장을 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사람을 너무나 좋아한 탓이었다. 사람을 보면 꼬리를 흔드는 어린 강아지처럼, 그토록 사람을 좋아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자진해서 품은 판도라의 항아리는 나에게 큰 상해를 입혔다. 나는 그 시기에 온갖 몸과 마음의 병을 얻었다. 학과 행사가 정말 많았던 시기에는 3일동안 2시간을 자기도 했다. 줄일 수 있는 것은 잠 밖에 없던 때에 나는 장염과 이석증이 동시에 걸렸는데, 오전에 장염으로 인해 수액을 맞고 퇴원을 해서 학과 회의를 진행한 후 이비인후과에 가서 이석증 치료를 받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또 회의를 하기도 했다. 그것이 나의 공강있는 날의 일과였다. 먹은 음식도 없건만 중간중간 화장실에 가서 신물을 뱉어낼 때마다 변기는 핑글핑글 왼쪽으로 돌았다. 학교 화장실에서 변기를 부여잡고 서럽게 엉엉 울던 기억이 지금도 꽤 선명하다.
이런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나는 사람이 싫어졌다. 사람을 너무나 좋아하던 내가 사람을 너무나 싫어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휴학을 했다. 아무도 보고싶지 않았다. 교수님들의 수업도 듣고 싶지 않았고, 선배, 동기, 후배 모두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떤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모두에게 인정받으려고 일년을 꼬박 일한 대가가 모두가 싫어져 휴학하는 것이라니.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은 잘못된 욕심이었구나 깨달았다.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모두가 원하는 모두의 모습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모두의 모습은 하나의 모습이 아니었고 사람마다 달랐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각각의 특정한 모습을 원하는 듯했고 나는 그들이 원하는 특정한 모습의 나를 만드는 데 지쳤다. 그 무엇도 진짜 나는 아니었으며, 그들 중 누구도 진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았다. 휴학을 하고 누군가가 원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내가 되리라 결심했다. 대학생활 3년간 누군가를 대표하는 나로 살았으니, 이제는 나를 대표하는 나로 살겠노라 다짐했다.
이런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나는 사람이 싫어졌다. 사람을 너무나 좋아하던 내가 사람을 너무나 싫어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휴학을 했다. 아무도 보고싶지 않았다. 교수님들의 수업도 듣고 싶지 않았고, 선배, 동기, 후배 모두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떤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모두에게 인정받으려고 일년을 꼬박 일한 대가가 모두가 싫어져 휴학하는 것이라니.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은 잘못된 욕심이었구나 깨달았다.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모두가 원하는 모두의 모습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모두의 모습은 하나의 모습이 아니었고 사람마다 달랐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각각의 특정한 모습을 원하는 듯했고 나는 그들이 원하는 특정한 모습의 나를 만드는 데 지쳤다. 그 무엇도 진짜 나는 아니었으며, 그들 중 누구도 진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았다. 휴학을 하고 누군가가 원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내가 되리라 결심했다. 대학생활 3년간 누군가를 대표하는 나로 살았으니, 이제는 나를 대표하는 나로 살겠노라 다짐했다.
그렇게 휴학 중 처음으로 내가 원해서 시작한 활동이 LG에서 진행하는 대외활동이었다. 꿈을 찾는 후배들의 멘토가 되어주는 자리. 그곳에서 만난 다른 멘토들은 하나같이 근사했다. 각자만의 도형을 가지고 있는 듯했고, 각자만의 색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누구도 누구에게 같은 모양이 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거기서 나는 지금도 내 인생의 축이 되는 친구들을 만났다.
그렇게 휴학 중 처음으로 내가 원해서 시작한 활동이 LG에서 진행하는 대외활동이었다. 꿈을 찾는 후배들의 멘토가 되어주는 자리. 그곳에서 만난 다른 멘토들은 하나같이 근사했다. 각자만의 도형을 가지고 있는 듯했고, 각자만의 색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누구도 누구에게 같은 모양이 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거기서 나는 지금도 내 인생의 축이 되는 친구들을 만났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는 친구들을 보고 나는 느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 모두에게 인정받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불가능함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누군가가 나를 깎으려 한다면, 나를 사포질하는 그의 곁에 오래 머무를 필요 없다. 누군가는 나의 뾰족함을 보고, 너는 5개의 뾰족함이 있구나! 별 같아! 라고 이야기해줄 것이다. 믿음이 생긴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더 나다워지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전적으로 희생하며 내가 아닌 나로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는 친구들을 보고 나는 느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 모두에게 인정받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불가능함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누군가가 나를 깎으려 한다면, 나를 사포질하는 그의 곁에 오래 머무를 필요 없다. 누군가는 나의 뾰족함을 보고, 너는 5개의 뾰족함이 있구나! 별 같아! 라고 이야기해줄 것이다. 믿음이 생긴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더 나다워지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전적으로 희생하며 내가 아닌 나로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만약 그 시절 내게 누군가 미리 알려주었다면 어땠을까. 너는 곧 사람이 싫어질 것이다. 그러니 그때는 이렇게 하라. 그 조언이 아무리 정확했다 한들, 나는 그 조언을 얼마나 믿고 받아들였을까. 누군가가 원하는 내가 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하고 지치는 일인지 경험해 보지 않았더라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주는 이들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을까. 머리로 아는 것을 온몸으로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진짜 앎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앎은 미리 본 자에게는 보이지 않고, 끝까지 겪어낸 자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만약 그 시절 내게 누군가 미리 알려주었다면 어땠을까. 너는 곧 사람이 싫어질 것이다. 그러니 그때는 이렇게 하라. 그 조언이 아무리 정확했다 한들, 나는 그 조언을 얼마나 믿고 받아들였을까. 누군가가 원하는 내가 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하고 지치는 일인지 경험해 보지 않았더라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주는 이들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을까. 머리로 아는 것을 온몸으로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진짜 앎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앎은 미리 본 자에게는 보이지 않고, 끝까지 겪어낸 자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앎, 경험 속에서 태동된 진짜 앎이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능력이다. AI가 프로메테우스의 자리를 자처하는 지금. 더 빠르고, 더 정확한 프로메테우스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에피메테우스의 자리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앎, 경험 속에서 태동된 진짜 앎이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능력이다. AI가 프로메테우스의 자리를 자처하는 지금. 더 빠르고, 더 정확한 프로메테우스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에피메테우스의 자리다.
에피메테우스의 자리는 미리 보지 못했음으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자리가 아니다. 에피메테우스의 자리는 미리 보는 자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자리다. 프로메테우스가 수없이 미리 보았으나 정작 존재할 수는 없었던 그 방, 항아리가 열리던 그 자리, 모든 것이 다 쏟아져 바닥이 드러나던 그 순간. 그 자리가 우리가 서야 할 자리다. 항아리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는 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앎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앎은 데이터로 학습되지 않는다. 그 어떠한 데이터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끝까지 남아있던 자만의 데이터로 존재할 것이다. 모든 것이 쏟아지던 그 자리에서 나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내게 쏟아진 그 모든 불행을 나는 어떻게 이겨냈는가. 나는 끝에 서서 어떤 앎을 얻었는가. 그 데이터가 우리의 고유함을 결정짓는다.
에피메테우스의 자리는 미리 보지 못했음으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자리가 아니다. 에피메테우스의 자리는 미리 보는 자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자리다. 프로메테우스가 수없이 미리 보았으나 정작 존재할 수는 없었던 그 방, 항아리가 열리던 그 자리, 모든 것이 다 쏟아져 바닥이 드러나던 그 순간. 그 자리가 우리가 서야 할 자리다. 항아리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는 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앎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앎은 데이터로 학습되지 않는다. 그 어떠한 데이터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끝까지 남아있던 자만의 데이터로 존재할 것이다. 모든 것이 쏟아지던 그 자리에서 나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내게 쏟아진 그 모든 불행을 나는 어떻게 이겨냈는가. 나는 끝에 서서 어떤 앎을 얻었는가. 그 데이터가 우리의 고유함을 결정짓는다.
이야기가 끝났다. 글을 시작하며 나는 당신에게 물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당신은 그를 사랑하게 될까. 내가 그를 이해하고 마침내 사랑하게 된 것처럼.
이야기가 끝났다. 글을 시작하며 나는 당신에게 물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당신은 그를 사랑하게 될까. 내가 그를 이해하고 마침내 사랑하게 된 것처럼.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가 멍청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가엾어서도 아니었다. 그가 우리와 닮아서도 아니었다. 그가 서있는 그 자리가, 온 몸으로 겪어내는 그 자리가 바로 이 시대에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미리 보지 못한 자가 아니다. 그는 밑바닥이 드러나는 자리에서도 끝끝내 살아낸 자다.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가 멍청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가엾어서도 아니었다. 그가 우리와 닮아서도 아니었다. 그가 서있는 그 자리가, 온 몸으로 겪어내는 그 자리가 바로 이 시대에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미리 보지 못한 자가 아니다. 그는 밑바닥이 드러나는 자리에서도 끝끝내 살아낸 자다.
당신에게도 뒤늦게야 알게 된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보이지 않다가, 다 지나간 다음에야 선명해진 것들. 그래서 우리의 무릎을 치게 만들고 이마를 탁 치게 만드는 순간들.
당신에게도 뒤늦게야 알게 된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보이지 않다가, 다 지나간 다음에야 선명해진 것들. 그래서 우리의 무릎을 치게 만들고 이마를 탁 치게 만드는 순간들.
당신은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너무 늦게 깨달아서 나를 자책하게 만드는 후회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항아리의 끝까지 도달한 것, 지옥의 끝까지 걸어들어간 시간, 온 몸으로 불행을 겪어낸 시간들은 당신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 시간들은 모두 누구도 당신을 대체하지 못하게 하는 단 하나의 희망, 지옥 끝에 마주한 낙원의 빛이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너무 늦게 깨달아서 나를 자책하게 만드는 후회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항아리의 끝까지 도달한 것, 지옥의 끝까지 걸어들어간 시간, 온 몸으로 불행을 겪어낸 시간들은 당신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 시간들은 모두 누구도 당신을 대체하지 못하게 하는 단 하나의 희망, 지옥 끝에 마주한 낙원의 빛이 되어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 모든 것이 다 쏟아져 나가 버린 것 같은 자리에 서 있다면. 텅 빈 항아리 앞에 주저앉아 있다면. 혹은 지옥의 문 앞에서, 마지막 남은 한 줌의 희망마저 내려놓아야 할 것 같은 자리에 있다면. 어쩌면 당신은, 이 시대에 가장 인간다운 자리에 이제 막 도달하려는 참인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이 지금, 모든 것이 다 쏟아져 나가 버린 것 같은 자리에 서 있다면. 텅 빈 항아리 앞에 주저앉아 있다면. 혹은 지옥의 문 앞에서, 마지막 남은 한 줌의 희망마저 내려놓아야 할 것 같은 자리에 있다면. 어쩌면 당신은, 이 시대에 가장 인간다운 자리에 이제 막 도달하려는 참인지도 모른다.
끝에 서야, 비로소 보인다. 끝에 선 당신에게 이제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온몸으로 불행을 맞은 그 자리는 끝내 당신만의 자리가 된다. 지옥의 끝까지 걸어 내려간 자의 여정은 오직 당신만의 이야기가 된다.
끝에 서야, 비로소 보인다. 끝에 선 당신에게 이제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온몸으로 불행을 맞은 그 자리는 끝내 당신만의 자리가 된다. 지옥의 끝까지 걸어 내려간 자의 여정은 오직 당신만의 이야기가 된다.
불행이 도사린 지옥을 걷거든, 한 문장만 떠올리기를. 이 너머에, 낙원의 빛이 나만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불행이 도사린 지옥을 걷거든, 한 문장만 떠올리기를. 이 너머에, 낙원의 빛이 나만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인용 원문
헤시오도스, 『일과 날(Works and Days)』 — 에피메테우스가 형의 경고를 잊고 판도라를 받아들인 뒤: "But he took the gift, and afterwards, when the evil thing was already his, he understood." (그러나 그는 그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 재앙이 이미 자기 것이 된 다음에야, 그는 깨달았다.) — H. G. Evelyn-White 영역.
헤시오도스, 『일과 날』 — 항아리가 열린 뒤: "But the rest, countless plagues, wander amongst men; for earth is full of evils and the sea is full. Of themselves diseases come upon men continually by day and by night, bringing mischief to mortals silently." (남은 것들, 헤아릴 수 없는 역병들이 사람들 사이를 떠돈다. 땅도 바다도 재앙으로 가득 찼다. 질병은 낮에도 밤에도 제 발로 인간을 찾아와, 소리 없이 불행을 안긴다.)
헤시오도스, 『일과 날』 96행 — 엘피스(희망): "Only Hope remained there in an unbreakable home within under the rim of the great jar, and did not fly out at the door; for ere that, the lid of the jar stopped her." (오직 희망만이, 큰 항아리 가장자리 아래 깨지지 않는 집에 남아 문 밖으로 날아가지 않았다. 그 전에 항아리의 뚜껑이 그를 가두었으므로.) ※ '희망(hope)'은 '기대(expectation)'로도 옮겨지는 단어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해석이 갈림.
헤시오도스, 『일과 날』 — "But only when he has suffered does the fool learn this." (어리석은 자는 겪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헤시오도스, 『신통기(Theogony)』 511행 — "Scatter-brained Epimetheus who from the first was a mischief to men who eat bread." (생각이 빗나간 에피메테우스, 처음부터 빵을 먹는 인간들에게 화가 된 자.)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71 — "In reality, hope is the worst of all evils, because it prolongs man's torments." (희망은 사실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다.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프로메테우스(먼저 생각하는 자)·에피메테우스(나중에 생각하는 자) 형제와 판도라 이야기: 헤시오도스 『신통기』 507~616행, 『일과 날』 42~105행.
동물에게 능력을 나눠 주다 인간 몫을 남기지 못한 에피메테우스의 일화, 그로 인한 프로메테우스의 불 도둑질: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320d~322a.
항아리를 연 것은 판도라(헤시오도스 원전 기준). '상자(box)'는 16세기 에라스뮈스가 그리스어 '항아리(pithos)'를 라틴어 '상자(pyxis)'로 옮긴 오역에서 비롯됨.
희망(엘피스)이 항아리에 남은 이유를 헤시오도스는 설명하지 않음. 자비로 보는 해석과 형벌로 보는 해석(니체 등)이 오래도록 공존함.
지옥문의 글귀 "Lasciate ogne speranza, voi ch'intrate"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Inferno)」 제3곡 9행. 단테는 이 문을 지나 지옥을 끝까지 통과한 뒤, 연옥을 거쳐 마침내 천국(낙원)에 이른다.
영문 인용 출처: Perseus / Theoi Project (Evelyn-White 영역), 니체 『Human, All Too Human』 I.71, 단테 『La Divina Commedia, Inferno』 III.9 (이탈리아어 원문).
인용 원문
헤시오도스, 『일과 날(Works and Days)』 — 에피메테우스가 형의 경고를 잊고 판도라를 받아들인 뒤: "But he took the gift, and afterwards, when the evil thing was already his, he understood." (그러나 그는 그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 재앙이 이미 자기 것이 된 다음에야, 그는 깨달았다.) — H. G. Evelyn-White 영역.
헤시오도스, 『일과 날』 — 항아리가 열린 뒤: "But the rest, countless plagues, wander amongst men; for earth is full of evils and the sea is full. Of themselves diseases come upon men continually by day and by night, bringing mischief to mortals silently." (남은 것들, 헤아릴 수 없는 역병들이 사람들 사이를 떠돈다. 땅도 바다도 재앙으로 가득 찼다. 질병은 낮에도 밤에도 제 발로 인간을 찾아와, 소리 없이 불행을 안긴다.)
헤시오도스, 『일과 날』 96행 — 엘피스(희망): "Only Hope remained there in an unbreakable home within under the rim of the great jar, and did not fly out at the door; for ere that, the lid of the jar stopped her." (오직 희망만이, 큰 항아리 가장자리 아래 깨지지 않는 집에 남아 문 밖으로 날아가지 않았다. 그 전에 항아리의 뚜껑이 그를 가두었으므로.) ※ '희망(hope)'은 '기대(expectation)'로도 옮겨지는 단어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해석이 갈림.
헤시오도스, 『일과 날』 — "But only when he has suffered does the fool learn this." (어리석은 자는 겪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헤시오도스, 『신통기(Theogony)』 511행 — "Scatter-brained Epimetheus who from the first was a mischief to men who eat bread." (생각이 빗나간 에피메테우스, 처음부터 빵을 먹는 인간들에게 화가 된 자.)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71 — "In reality, hope is the worst of all evils, because it prolongs man's torments." (희망은 사실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다.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프로메테우스(먼저 생각하는 자)·에피메테우스(나중에 생각하는 자) 형제와 판도라 이야기: 헤시오도스 『신통기』 507~616행, 『일과 날』 42~105행.
동물에게 능력을 나눠 주다 인간 몫을 남기지 못한 에피메테우스의 일화, 그로 인한 프로메테우스의 불 도둑질: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320d~322a.
항아리를 연 것은 판도라(헤시오도스 원전 기준). '상자(box)'는 16세기 에라스뮈스가 그리스어 '항아리(pithos)'를 라틴어 '상자(pyxis)'로 옮긴 오역에서 비롯됨.
희망(엘피스)이 항아리에 남은 이유를 헤시오도스는 설명하지 않음. 자비로 보는 해석과 형벌로 보는 해석(니체 등)이 오래도록 공존함.
지옥문의 글귀 "Lasciate ogne speranza, voi ch'intrate"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Inferno)」 제3곡 9행. 단테는 이 문을 지나 지옥을 끝까지 통과한 뒤, 연옥을 거쳐 마침내 천국(낙원)에 이른다.
영문 인용 출처: Perseus / Theoi Project (Evelyn-White 영역), 니체 『Human, All Too Human』 I.71, 단테 『La Divina Commedia, Inferno』 III.9 (이탈리아어 원문).